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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Jul 23. 2024

[언어라이브드] K게이 런던 뱅커 성장기: 캘리 2

  이주라는 금쪽같은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우리 로드트립의 마지막 거점은 차로 샌프란시스코로부터 4시간 떨어져 있는 레이크 타호 (Lake Tahoe)이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주를 양다리로 걸친 호수 마을이고 그 둘레는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1960년대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화려한 전적이 있으며 당시 월트 디즈니가 개폐회식 감독하고 역사상 첫 텔레비전 생중계 올림픽이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에게 마저 잊히고 있는 팩트이다.


  웰즈가 잡은 숙소는 또 하나의 아기자기한 B&B. 이번 여행을 위해서 사전 리서치 제대로 한 것 같았다. 유선 케이블 꽂아 인터넷을 띄우고 검색창 안에 키보드를 두드려도 이 숙소가 과연 뜰까나? 입소문 아니면 존재를 알기 쉬운 장소 같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젯밤 체크인 할 때 로비에서 마주친 중년 투숙객들은 로컬처럼 보였고 나 같은 젊은 20대의, 게다가 외국인인 관광객은 아예 없었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웰즈는 사라져 있었다. 옆 베개에 차가운 메모지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Saejean, see you at breakfast.”

  (세쥔, 아침 식사 때 만나.)

  

  세쥔? 빌리 진의 한국인 사촌일까? 어느 북미 코리아타운 호스테스 삘 나는걸. 기자 출신도 나름 PTSD랍시고 난독증 오나? S-a-e-j-i-n 알파벳 6글자가 그렇게도 외우기 어렵나? 그리고 왜 먼저 가버린 걸까?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지지고 볶은 것도 아니고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나름 잘 지내온 것 같은데..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내가 어젯밤 말실수를 저질렀나? 아니면 자존심 상할 행동을 범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과오는 없는 것 같았다. 이 돌발상황을 내가 과대해석하는 것 일수도. 그럴 수 있지 않나- 아무리 불가분의 커플도 둘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 가끔씩 개인타임이 필요하듯. 그런데 우리는 그런 관계까지 가려면 한창 멀었는데.. 냉정히 따지고 보면 지금 이 관계도 뭐라 정립하기 모호한 썸도 아닌, 원나잇도 아닌, 게다가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시기상조인.. 그냥 원나잇 곱하기 12, 그러니까 트웰브 나잇 관계인 건가? 어쨌든 웰즈가 자동차 끌고 샌프란시스코로 먼저 도주해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 삼으려 했다.


  이빨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얀 민무늬 티셔츠 위에 복슬복슬한 회색 모헤어 가디건을 걸쳤다. 내 최애 니트 소장품. 진정 마르니 (Marni) 포에버다. 거울 보며 앞머리에 물을 살짝 묻혔다. 머리 할 때가 된 듯. 파마기가 거의 풀려 볼륨감이 죽어있었다. 뒤늦게 커밍아웃한 많은 중년 게이들이 여자를 사권 스트레이트 시절이 있었던 반면 나는 스트레이트 헤어 시절이 있었다.


  식당으로 가니 웰즈가 구석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한쪽 입꼬리가 치켜세워진 채 블랙베리를 바쁘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회사로부터 급한 이메일에 처리하기 위해 먼저 식당으로 피신 온 걸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싱글벙글한 기색이었다. 내가 접근하니 블랙베리 액정을 뒤집고 테이블 모퉁이로 치웠다.


  “You slept well?”

  (잘 잤어?)


  “So so. How about you?”

  (그저 그래. 넌?)


  “Likewise. Anyway, I thought I’d do some emailing whilst you were asleep. I didn’t want to wake you up..”

  (나도. 어쨌든 네가 자는 동안 나 이메일 좀 하려고. 깨우기 싫었거든..)


  “Thanks for the post-it. You spelt my name wrong by the way.”

  (포스트잇 고마워. 근데 내 이름 스펠링 들렸더라고.)


  웰즈 머리 위에는 이 식당에서 지금 아침 식사 중이거나 식사 예정인 투숙객들의 이름이 하늘색과 핑크색 마커펜으로 화이트보드에 적혀있었다. 당연 내가 여자일 줄 알고 내 이름은 핑크색으로 적혀있었다. 그것도 다시 한번 Saejean으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식당 직원들은 웰즈의 동반자가 남자라는 걸 프론트 데스크로부터 통보받지 못했나 보다. 차라리 내 이름이 철수 또는 준호였더라면 웰즈 옆에 나란히 파란색으로 적혀있었으려나? 외국인들에게조차 남성스럽게 들리는 이름들이었을까? 웰즈가 화이트보드를 직시하고 있는 나를 위로 쳐다봤다.


  “I know, they thought you were a girl.”

  (그러니까, 네가 여자인 줄 알았나 봐.)


  “Whatever goes.. It’s California!”

  (상관 안 해.. 여긴 캘리포니아니까!)


  자리에 앉아 블랙커피와 스크램블 계란을 주문했다. 그리고 웰즈는 지도 하나 꺼내더니 오늘의 관광 코스를 볼펜으로 그어가며 내게 브리핑해 줬다. 진지하게 끄덕이는 내 모습이 마치 항해 직전 선장으로부터 항로를 설명받는 크루멤버처럼 보였을 거다. 오늘 여정이 순조로웠으면. 타호 호수 둘레길 드라이빙 후 인근 산을 가볍게 등산하고 마지막으로 에메랄드 베이 (Emerald Bay) 주립 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럼 저녁 먹을 시간쯤 돼있을 거라고. 식사를 마친 웰즈는 먼저 방으로 가 씻고 나갈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블랙베리를 쥐어잡더니 어느새 복도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서 아침이나 든든하게 먹어야지.




  오늘이나 어제나 그제나.. 식사, 관광, 테이크어웨이 커피로 짜인 일련의 과정이 끝나가는 하루.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벌써 저녁 8시. 금일의 승자는 웰즈인듯했다. 계획대로 관광 버킷 리스트를 털털 털어버려 무척이나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즐거웠지만 컨버스 운동화 신은 발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곱씹으며 온종일 상쾌한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고 긴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때문에 머리는 맑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무한반복 리플레이되는 ‘세진,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의 울림. 식당으로 가는 도중 일몰이 시작되더니 금세 차 안의 베이지색 가죽은 뜨거운 주황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우리 둘 다 햇빛 가리개를 내렸다. 그리고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Wells, so what are we?”

  (웰즈, 우리 뭐야?)


  “We’re just getting to know each other.. I mean, we had just met, right?”

  (막 서로 알아가는 단계지..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치?)

 

  “I know, I know.. But it sometimes helps to define things.”

  (알아, 알아.. 하지만 규정짓는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거든.)


  “Not necessarily.”

  (꼭 그렇지는 않아.)


  적막이 흘렀다. 괜히 이야기 꺼냈나 싶었다. 하지만 묻고 싶은 질문 묻고야 말아야겠다. 아니면 속으로 곪아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So. Are you seeing other people?”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있어?)


  “Well.. I’m dating a few..”

  (뭐.. 몇 명 만나고 있어..)


  머리가 멍해졌다. 일방적이었던 익스클루시브 연애. 내가 너무 순진했다. 듣기 싫었지만 뭐 당연한 대답이지.. 웰즈는 나보다 사회생활을 20년 더 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을 거고 인간관계가 그만큼 나보다 더 얽혀있었을 거고. 게다가 난 서울에 있고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고. 엊그제 갓 만난 내가 그의 마음을 홀로 사로잡는다는 것은 처절하게 나이브한, 시초부터 모순적인 발상이지 않나. 같은 질문을 내게 되묻지 않는 의도는 또 뭐지. 내가 다른 누구를 만나고 있든 말든 ‘I don’t care’라고 응답한 거나 마찬가지로 와닿았다. 무답도 대답이니까. 둘의 관계 진전에 별 깊은 관심이 없다는 반증인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갈밭 마당에 차를 대고 둘은 식당 안으로 아무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표백된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금발 웨이트리스를 따라 예약된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테이블보 위에는 종이가 올려져 있었고 나와 웰즈 사이에는 촛대 하나와 무지개 색깔의 크래용이 비치되어 있었다. 주문한 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식당의 유치한 배려인 듯했다. 하지만 어쩌면 몇 어른 들은 잊힌 동심을 재발견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을 테고.. 웰즈가 빨강 크레용을 집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하트를 그린 후 테두리 안을 색칠하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그린 건가? 종소리 들으면 군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크레용이 주어지면 오토로 도화지 위에 하트를 남발하는 게 웰즈 특유의 조건형성인 건지.. 도저히 속내를 모르겠다.


  테이블 반대편에 있는 내 손을 잡았다.


  “Back in the car. I know it’s not the answer you wanted to hear..”

  (아까 차 안에서. 네가 듣고자 한 대답이 아니었다는 거 아는데..)


  “But I really like you. And I would like to give this more time. Would that be okay with you?”

  (너 정말 좋아해. 그리고 시간 좀 더 두고 지내봤으면 좋겠어. 괜찮겠어?)


  이 세문장의 의미를 파헤쳐 분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가장 간절한 솔직함은 무언중에 발현되지 않던가. 감정은 가린 채 수박 겉핥기식의 이야기만 하던 웰즈가 이렇게 진솔한 말을 한적은 처음이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냉랭하던 그에게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분껄까? 아니면 여행 끝자락에 실망한 내 마음을 가다듬고자 이런 말을 건넨 걸까? 비록 오랜 시간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그를 향해 한 발자국 전진하면 어느새 나 자신이 몇 발자국 뒤로 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점차 멀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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