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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Aug 30. 2024

[언어라이브드] K-게이 런던 뱅커 성장기: 템스

  오늘 금요일 저녁은 바쁘다. 레이코 생파 잠깐 들렀다가 런던 출장 중인 웰즈와 저녁 먹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백여 명의 연수생들은 임의로 세 군데 숙소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엔젤역 근처 (구)치칠 전문외과 병동에, 그리고 다른 애들은 각각 빅벤 (Big Ben) 시계탑과 세인트폴 대성당 (St. Paul's Cathedral; 원래 성당이었으나 16세기 유럽 개신교 개혁 이후 영국 성공회 교회로 바뀜) 바로 코앞에 있는 서비스 아파트에 흩어져 석 달 세기를 하고 있었다. 레이코는 과거 지명을 본떠 ‘The King’s Wardrobe’ (왕의 옷장)라고 불리는 후자 숙소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옷장은 미니쿠퍼 한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코딱지만 한 일방통행 골목길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름에서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듯 왕이 세인트폴 대성당 행사에 참석하기 전에 옷 갈아입고 헤어와 풀메이크업을 받았던 장소란다. 오늘날 청담동 신부 의상 대기실정도로 비유하면 적합할 듯. 이같이 미로같이 오밀조밀한 런던 금융 시가지는 구석 하나하나 유서 없는 데가 없었다. 여의도 공터에 서울 내 단일건물로 가장 큰 규모의 백화점 들어선다고 떠들썩한 대한민국의 풍토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집에 와서 양복을 벗고 편안한 리넨 소재의 크림색 셔츠와 베이지색 고무줄 바지로 갈아입었다. 옅은 색깔 때문에 대충 다림질해도 쭈글쭈글해 보이지 않았다. 낮기온은 아직 한창 여름이었지만 저녁은 점점 서늘해져 갔다. 매년 8월 마지막 토요일에 개최되는 노팅힐 카니발이 사실상 여름의 비공식적 종지부이다. 그리고 다이어리 달력을 보니 그게 내일이다.. 런던에 도착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레이코는 우선 일찌감치 자기 숙소에서 간단한 생파를 하고 나서 인드라, 리사, 크리스토프, 그리고 남친 알렉시와 함께 소호에 있는 Andrew Edmunds라는 아늑한 레스토랑에서 2차를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나도 진정으로 가고 싶었으나 웰즈의 초대를 차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의 기약이 없을지도 모르는 관계이었기에..


  화장실에 들렀다.


  세면대 거울 보며 강렬한 여름 햇살로 푸석푸석해진 머리에 스타일링 에센스를 가볍게 발라줬다. 머리카락에 윤기가 살더니 앞머리 굵은 웨이브가 오른쪽 눈썹 위 이마를 살짝 덮었다. 못 보던 주근깨도 눈가 밑에 확 올라와 있었다. 이제 히알루론산 기본 보습만으로는 안 되겠다. 근데 웰즈가 내 머리가 촉촉하던 바비인형마냥 빗자루 같건 상관이나 할까? 내가 보지 못하는 자신 내면에 매력 요소가 깔려 있었던 걸까? 이타심 역부족에다가 이성보다 감정으로 밀치고 들이대며 심지어 참을성마저 부재한 내 억센 모습 이면에 도대체 어떠한 이끌림이 있는 걸까? 재치가 유별나 그를 한번 시원하게 웃긴 적도 없는 것 같다. 흠. 화장실 불을 끄고 현관을 나가려다가 식탁 의자에 걸쳐둔 얇은 아이보리색 면 자켓을 집었다. 아무리 여름일지라도 런던의 저녁은 선선하다.


  집 밖을 나서고 들른 곳은 보틀샵 (bottle shop; 주류 판매점)이다. 한 동네의 소비문화 수준이 가장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척도이다. 엔젤역 주변은 주택가도 상업가도 아닌, 부촌도 빈촌도 아닌 좀 모호한 접경지대였다. 술의 셀렉션도 이를 반영했다. 초고가 보르도 (Bordeaux)산 샤토디켐 (Château d'Yquem) 디저트 와인 아래칸에는 초저가 호주산 옐로우테일 (Yellow Tail) 시리즈가 포도종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 안쪽에 스파클링 와인 섹션이 있었다. 도난이 잦아서인지 계산대 옆이었다. 비대공주님을 위한 선물이라 카바 (Cava)나 프로세코 (Prosecco) 또는 크레망 (Crémant;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은 프랑스산 스파클링 와인)을 선물해 주면 아마 미린과 함께 등 푸른 생선 비린내 잡는 요리주로 쓸 거다. 샴페인도 흔해빠진 모엣샹동 (Moët & Chandon)이나 뵈브클리코 (Veuve Clicquot)말고 뭔가 특색 있고 기억에 남을만한 한 병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위쪽 구석에 모셔져 있는 루이나르 (Ruinart)의 블랑드블랑 (Blanc de Blancs) 샴페인을 집었다. 그야말로 백퍼 샤도네이종 포도만으로 빚은 고급진 술이다. 레이코보다 더 신나 있었을 듯한 가게 주인의 “good choice, my friend”를 한 귀로 흘리며 한신카드를 꺼냈다. 어차피 돈은 당겨 쓰는 거니까.



  레이코의 아파트 안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The King’s Wardrobe에 머무는 연수생들 모두 초대됐으며 심지어 처음 보는 연수생 몇 명도 거실을 헤매고 있었다. 식탁 위는 각종 와인과 레이코가 직접 만든 원형 모양의 가지각색 니기리 스시 몇십 점이 올려져 있었고 심지어 연어알과 날치알 군함스시도 몇 점 눈에 띄었다. 런던에 살지도 않으면서 이런 식재료는 어떻게 공수한 건지. 뭐 하나 해도 제대로 하자주의가 녹아든 정성이었다.


  “Reiko, happy sweet 16!”

  (레이코, 16세 축하해!)


  “Funny. In dog years, I’d be dead.”

  (웃겨. 그 나이의 개였다면 이미 죽었겠네.)


  “Anyway, drink this after everyone’s fucked off.”

  (어쨌든, 이거 다들 꺼진 다음에 마셔라.)


  레이코가 와인 쇼핑백 안을 힐끔 쳐다봤다.


  “ヤバ! J’adore Ruinart! Hell no! I’m not opening it for those bitches.. Let me chill it.”

  (대박! 루이나르 사랑해! 당연하지! 저놈들 위해서 안 열어.. 냉장시킬게.)


  역시 탁월한 내 선택. 그녀를 부엌으로 따라가 보니 먼저 도착한 리사와 인드라가 와인 한잔씩 들고 있었다. 모든 하우스 파티의 공통점은 주최자의 찐인싸들은 부엌에 집합한다는 점. 따스해서인지 아니면 남 뒷다마 까기 으슥하고 프라이빗한 공간 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부엌에 가면 은밀한 속삭임으로 실내공기가 더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두 명 볼 양쪽에 인사를 했다. 살짝 점도 있는 투명한 액체를 보아서는 사케를 마시고 있는 듯. 아니나 다를까 레이코가 냉장고를 열고 샴페인을 넣더니 맨 아랫칸에 눕혀있던 1.8리터짜리 다싸이 사케 대병을 양손으로 꺼냈다. 라벨 하단에 23 숫자가 적힌 쥰마이 다이긴죠급 최고급 사케였다.


  “This is my favourite from my mom’s home town in Yamaguchi. She sent it to me for my birthday, would you believe?”  

  (엄마 고향인 야마구치현에서 만드는 내 최애템이야. 생일을 위해 엄마가 보내주시질 않았겠니?)


  그리고 와인잔이 출렁일 정도로 듬뿍 따라줬다.


  국내 주류 애호가들도 한 번쯤은 마셔봤을 다싸이 23. 겉 단백질층을 정미하고 남은 쌀알의 크기가 원래 크기에 비해 23%이라 지어진 상품명. 이 랜덤 최적화 수치가 백발 장인들에 의해 어떻게 산정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적당한 산도감을 웃도는 은은한 바나나향의 목 넘김이 꿀물 같았다. 야마구치현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하기(萩) 도자기인데 이는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인 도공들에 의해 정립된 스타일이라고 한다. 점토와 백색 유약의 상호작용을 이용해 표면을 일부러 거칠게 표현한 이 투박한 양식은 자연스러운 낡음과 불완전의 미를 찬양하는 와비사비(侘寂) 미학의 표본이며 일본 다도 문화와 나란히 발전하게 되었다는데..


  “And she sent me these to give you guys as well.”

  (그리고 너희 주라고 이것도 보내주셨어.)


  셋이 작은 쇼핑백을 받았다. 생파 놀러 가서 구디백을 받은 적은 처음이다. 무슨 애도 아니고..


  “They’re nori snacks filled with Hokkaido uni.”

  (홋카이도산 우니로 채운 김 스낵이야.)


  리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Reiko, my favourite! Oishii!”

  (레이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이시이!)


  리사가 일본 여행 추억의 스낵이라고 넌지기 이야기했을 뿐인데 레이코는 이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 쇼핑백 종이상자 안에는 원형 스뎅 통 세 개가 있었고 껌모양의 빠삭한 김 두 겹사이로 마른 성게알이 샌드위치처럼 압축되어 있었다. 시식을 해보려고 포장지를 뜯자마자 거실 쪽에서 생일축하 노래가 들려왔다. 영어 발음을 들어봐서는 분명히 일본 남자 연수생이 들다. 수업시간 내내 쳐자는 그들 말이다.


  레이코가 제일 먼저 도착한 리사에게 물었다.


  “Did someone bring a cake?”

  (누군가가 케이크 갖고 왔냐?)


  “I don’t know. Indra and I were in the kitchen the entire time.”

  (몰라. 나랑 인드라는 내내 부엌에 있었어.)


  “Well I guess I’d better go out and blow out the candles then.”

  (그럼 밖에 나가 촛불 불어야겠네.)


  다들 그녀를 쫓아 거실로 나갔다. 이미 조명은 어둡게 조광 되어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질 광경은 과연 쇼킹했다. 다들 어떻게 반응할 줄 몰랐다. 구석에 등 돌린 채 서있는 서너 명의 일본 남자 연수생들이 영어로 해피버스데이를 부르며 중앙에 포위하고 있던 센터를 서서히 공개했다. 이름도 모를 그는 바지와 빤스가 발목에 벗겨진 채 라이터로 자신의 음모를 태우고 있었다. 이런 이색적인 생일 촛불 처음이다. 아니, 어감이 상스럽지만 생긴 그대로 좆불인가? 일본 사회가 워낙 경직되고 사람을 억눌러버려서 이런 애들은 나리타 공항을 이륙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사가 풀려버리는 건지. 불알친구 관계가 아닌 엊그제 만난 초엘리트 연수생들임에고 불구하고 지들끼리 저렇게 해맑게 낄낄거리며 좋아하는 걸 봐서 평소에도 저런 식으로 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격한 사회 속에서 자아의 섹슈얼리티를 극도로 세련되고 도회적으로 풀어내는 일본 시티 여성들에 비해 동급 남성들의 성 세계관은 갈라가포스에 표류된 채 모던 사회 진화적응에 참패한 듯하다.


  인드라가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Oh my god. I’ve never seen a dick that small.”

  (세상에. 저렇게 작은 꼬추는 처음 봐.)


  좀 의외의 첫 반응. 빡친 레이코도 이 말을 듣고서 폭소했다.


  “Indra, you have an eye for detail..”

  (인드라, 섬세함을 감상할 줄 아네..)


  피가 거꾸로 쏟아져도 시크한 유머코드 내팽기치지않는 레이코. 하지만 이 웃긴 말조각 한마디 한마디 더 듣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었다.


  “Guys, I’d love to stick around for cake but I gotta dash. I have a date with Wells across the Thames at OXO Tower. Enjoy dinner in Soho. Let’s grab a nightcap if you’re still up.”

  (야, 케이크 먹기 위해 버티고 싶지만 난 날라야 해. 템스강 건너 OXO 타워에서 웰즈랑 데이트가 있거든. 소호에서 저녁식사 즐겁게 보내. 나 돌아올 때 아직도 깨어있으면 마지막 한 잔 하자.)


  “Oh, I forgot that’s tonight. Traffic was horrible getting here this evening. Take the Millennium Bridge. Good luck!”

  (아, 테이트가 오늘밤이었지. 여기 오는데 길이 엄청 메였어. 밀레니엄 브릿지를 이용해. 굿 럭!)


  우리 넷 중 유일한 런던 토박이인 인드라의 야무진 센스.


  레이코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다시 한번 인사하고 성급히 나왔다. 웰즈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8시인데 벌써 7시 반이다. 저녁 장소는 OXO Tower 레스토랑이다. King’s Wardrobe으로부터 거리상으로 멀지 않아 택시보다 걸어가는 게 수월하다. 5분 정도 걸어 나가면 세인트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잇는 보행자 전용 다리인 밀레니엄 브릿지가 나오고 빠른 물살의 좁은 템스강을 후다닥 건너면 런던 강남에 안착한다. OXO Tower는 빠른 걸음걸이로 한 20분 정도 활보하면 도착하겠지. 쾌적한 산보 코스다.



  작은 골목길들을 뚫고 지나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더니 알루미늄으로 설게 된 밀레니엄 브릿지와 흙탕물의 템스강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강너머 오른편에 세로로 O, X, O 알파벳이 빨강 빈티지 네온사인으로 쓰인 OXO Tower 건축물의 적벽돌 굴뚝이 보였다. OXO는 영국의 치킨맛 스톡큐브 (stock cube; 담백함을 더하기 위해 수프나 스츄에 녹이는 고형 조미료) 국민 브랜드이다. 서양인들이 아시아 매식의 필수 재료인 MSG 백색가루를 그토록 디스 하면서 막상 MSG 응축 덩어리인 스톡큐브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하지만 먹고 난 뒤 필러 맞은 듯 두툼하게 느껴지는 입술과 갑작스럽게 멍하게 밀려오는 두통증세- 미원이나 스톡큐브나 별반 다른 게 없다. 글로벌 일식 열풍의 영향으로 우마미 (umami; 담백미)가 다섯 번째 미각으로 찬양받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미국 최고 권위의 의학 학술지인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은 1968년에 ‘Chinese reataurant syndrome (중국 음식 레스토랑 증후군)’이란 말도 안 되는 인종차별적 명칭이 쓰인 기사를 거리낌 없이 출간했었다. 그리고 이 용어는 미국 제일의 영어 사전인 웹스터 (Webster)에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멀쩡히 출판되고 있다. 물론 최근에 들어서 모욕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 있다는 주석이 달리게 되었지만. 어쨌든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OXO 스톡큐브 생산 공장을 리모델링해 현재는 상업 및 문화복합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맨 꼭대기층은 템스강 북단 강변의 야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 개조됐다. 강한 바람에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며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기 전에 웰즈는 시간을 두고 둘의 관계를 지켜보자고 말했다. 그 뒤로 두 달 동안 그 마음속에 어떠한 큰 변화의 물결이라도 일렀을까? 난 또한 런던이란 새로운 가능성의 도시를 내팽개치고 왜 굳이 대서양너머, 하물며 뉴욕도 아닌 신대륙 맨 끝단에서 태평양의 서늘한 바람을 쐬고 사는 웰즈에 집착하는 건지. 이성적으로 내 어리석은 의도가 납득되지 않았다.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자신에게 되묻고 되묻는 와중 벌써 OXO Tower에 도착해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을 눌렀다. 윌리 웡카 초콜릿 공장에서 등장하는 유리 엘리베이터에 탄 느낌이었다. 이미 깜깜해진 런던 상공을 향해 힘껏 올랐다. 부지기수로 많은 붉은 항공 장애물 조명이 서로 번갈아가며 밤하늘을 깜박깜박 밝히고 있었다. 런던이란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밀도 있게 휘감고 있는 장식 조명 같았다. 문이 다시 열리고 나는 리셉션 데스크로 걸어갔다. 차분했던 가슴이 떨리기 시작하고 손바닥이 어느새 축축해져 있었다.


  “Good evening. May I ask if you have a reservation with us tonight?”

  (안녕하세요. 오늘 밤 예약이 있으신지 묻겠습니다.)


  “I think the table’s under Wells Pearson at 8.”

  (8시 웰즈 피어슨으로 아마 테이블이 예약되어 있을 거예요.)


  “Excellent. Please follow me this way, sir.”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저 따라와 주십시오.)


  잔잔한 보사노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진짜 초들의 춤추는 불빛이 사방 통유리창에 반사되었다. 그리고 강 건너 보이는 세인트폴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이 분위기를 한층 격상시켰다. 식당 중앙 창가 쪽 테이블에 웰즈가 웃으며 얌전히 앉아있었다. 식당 직원이 내 의자를 빼주며 앉기를 기다렸다.


  웰즈가 위로 쳐다봤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처음으로 나를 우러러본 것 같다. 여태껏 반대였는데. 넉살 좋게 먼저 말을 내뱉었다.  


  “So we meet again.”

  (그리하여 또 만났군.)


  “Indeed.”

  (그러게.)


  앉았다. 그리고 허벅지 위에 냅킨을 올렸다. 직원이 눈웃음치며 우리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Would you gentlemen wish to have an apéritif?”

  (식전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웰즈가 내게 먼저 고르라는 손짓을 했다.


  “A gin and tonic please. Tanqueray.”  

  (진토닉으로 주세요. 탱커레이로요.)


  둘이 캘리포니아 여행하면서 진토닉을 꽤나 축냈다.


  “Make that two. A double for both.”

  (저도요. 둘 다 더블 샷으로요.)


  그리고 직원은 잽싸게 사라졌다.


  “So how have you been? Much happen over the past couple of weeks since I left California?”

  (그래서 잘 지냈어? 내가 캘리포니아 떠난 후 지난 몇 주 동안 별일 없었어?)


  “Well..”

  (그게 말이지..)


  .. 하더니 일 이야기만 산더미처럼 늘어놓았다. 심지어 칵테일이 오고 음식을 시킨 이후에도 계속 출장, 보스, 스톡옵션, 올해 승진기회 포착등 내가 별로 관심 없는 이야기를 주구장창 이어나갔다. 시차 때문에 연인끼리의 데이트가 아닌 회사 동료 회식으로 착각하는 건가?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크 관심을 보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내 심정을 읽었는지 스테이크를 썰던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와인잔을 들었다. 그리고 건배를 청했다.


  “And this is to your new, single London adventures!”

  (그리고 너의 새로운 런던 싱글 어드벤처를 위하여!)


  싱글? 어드벤처? 갑자기 이런 말들이 왜 나오지?


  그가 팔을 내뻗더니 “Cheers!”라고 크게 소리치고 들고 있던 내 와인잔을 퍽하고 좀 세게 부딪쳤다. 제네바에 있는 부모님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정착한 지 얼마 안돼 초대받은 디너파티 때 옆자리 스위스인 지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는데.. 스위스 스노브 (snob)들은 남의 집에 저녁 초대받았을 때 일부로 와인잔을 세게 부딪힌다고. 왜냐하면 유리에 납이 함유된 진정한 고급 크리스탈이면 충격에 깨지지 않고 청명한 ‘쨍’ 소리를 내니까. 디너파티 호스트의 재력과 취향을 이딴 비열한 장난으로 은근슬쩍 간을 본단다. 게다가 남자 손님들은 쿠바산 코히바 (Cohiba) 시가 물고 천박한 이태리 슈퍼카 자랑 따위 늘어놓지 않고 레망 호수 위에 고작 일 년 중 서너 개월이나 띄울까 말까 하는 보트의 겁나 비싼 왁싱비용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고..


  진동하는 유리잔과 함께 머리까지 같이 띵했다. 웰즈가 말을 이었다.


  “So are you seeing anyone?”

  (누가 만나고 있어?)


  “No.”

  (아니.)


  이런 질문을 하면 십중팔구 되물어주기를 바라는 거다.


  “Are you?”

  (너는?)


  “Actually..”

  (사실은..)


  머뭇거리더니 말구술을 꿰어갔다. 그리고 내 마음은 템스강 강바닥 암반층 밑으로 깊숙이 꺼져버렸다. 먹고 있던 아구 스테이크가 식도를 다시 거슬러 올라올 것만 같았다. 꾹 참았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엄청 힘들었다. 마음속은 전쟁이었다.


  “.. This  late summer I met someone in Singapore. And coincidently he’s relocating to San Francisco for his job. We only met last month but it’s been quite serious from the start and I think he finally might be the one. He’s closer.. I mean close to my age and we had this immediate bond. Like, that epiphany of ‘where have you been all my life?’ You know what I mean?”

  (.. 이번 늦여름에 싱가포르에서 누구를 만났어. 우연치 않게도 그가 일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비록 저번달에 만났지만 애초부터 관계가 꾀나 진지했고 내 배필을 드디어 만난 것 같아. 그가 너보다 가깝게 느껴져.. 나이로 말이지. 그리고 만나자마자 즉흥적인 교감이 있었어. ‘내 인생 여태껏 어디에 있었어?’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이 컸다고 깨달았어. 뭔지 알겠어? )


  “Well, I’m happy for you. Really, I am.”

  (그래, 네가 행복해서 기쁘다. 진심이야.)


  마음속 대지진은 지각을 넘어 맨틀, 이제 외핵을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Thanks. You know, the distance between us, our age gap, where we currently are in life, it all-”

  (고마워. 알잖아, 우리 사이의 거리, 나이 차이, 인생 곡선, 다-)


  말을 잘랐다. 그냥 핑계처럼 들렸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Wells, it’s fine. I completely understand. We should be practical.”

  (웰즈, 괜찮아. 정말 이해해. 우리 현실적이어야지.)


  나도 나 자신의 냉정함에 놀랐다. 웰즈는 물론이고. 불과 몇 초 전까지 물러터진 모습만 보여줬으니.


  “Anyhow, would you like some dessert?”

  (어쨌든, 디저트 먹을래?)


  “I’m not making this up.. but a good friend of mine is having her birthday party as we speak. I think I should better get going before the party ends.”

  (지어내는 이야기 아닌데.. 친한 친구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와중 생파를 하고 있어. 파티 끝나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아.)


  “Oh, I’m so sorry for holding you up. We wouldn’t want you to miss that. Let me get the bill”.

  (아, 붙잡고 있어서 정말 미안해. 파티 놓치면 안 되지. 계산서 달라고 할게.)


  웰즈는 계산을 하러 웨이터를 부르고 나는 잠깐 회장실 갔다 오겠다고 실례를 청했다. 칸막이 문을 닫고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는 야구 방망이로 맞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왼쪽 호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고 레이코에게 문자를 보냈다.


  “SOS. I need to talk. ETA your place 11pm.”

  (SOS. 대화가 필요해. 너희 집 11시 도착 예정.)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Thank you for dinner. Again.”

  (저녁 고마워. 이번에도.)


  “Absolutely my pleasure. How do you get back?”

  (정말 별말을. 어떻게 돌아가?)


  “I’m just across Millennium Bridge. It’s a brisk walk.”

  (밀레니엄 브릿지 바로 건너편이야. 금방 걸어가.)


  “Well let me walk you to the bridge.”

  (그럼 다리까지 같이 가줄게.)


  우리 둘은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미원타워를 나오자 이른 저녁까지만 해도 붐볐던 강변은 고요해져 있었다. 템스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웰즈가 내 오른손을 잡았다. 머릿속은 현기증에, 마음속은 요동치고 있어 감흥이 없었다. 그냥 유연한 마네킹 손을 잡는 느낌이었다. 그전 같았으면 설레고 심장 박동수가 올라갔을 텐데 말이다. 왜 내 손을 잡는지 의문 품지도 않았다. 다 소용없는 세밀 분석이다. 어느새 밀레니엄 브릿지 끝단에 다다랐다. 웰즈를 정면을 마주 보고 그동안 좋은 시간 보낼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발꿈치를 들고 입을 맞추고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Safe travels, Wells.”

  (웰즈, 여행 조심히 해.)


  “Saejin, you take care.”

  (세진, 잘 지내고.)


  등을 돌리고 다리 위를 걷기 시작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내 마음을 들쑥날쑥 계속 들었다 놓은 웰즈. 내가 원하는 스토리 결말은 아니었지만 몇 년 뒤에 뒤 돌아봤을 때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게 내가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거다. 앞이 가물가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차가운 철바닥 위를 움직이는 구두만을 내려다보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는데 중간지점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Hey Saejin, is that you?”

  (야 세진, 너야?)


  레이코였다. 눈을 닦으니 리사와 인드라도 함께 있었다. 입에 손 모아 리사가 소리쳤다.


  “Saejin, is everything okay?”

  (세진, 괜찮아?)


  셋이 다리 위에서 나를 기다렸나 보다. 가까이 가니 그들은 엉망인 내 상태를 봤다. 그리고 따듯한 가슴으로 나를 꼭 감싸줬다. 내가 웰즈와의 재회를 얼마나 학수고대하고 기다렸는지, 기대했는지, 소설을 그렸는지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Well maybe this will cheer you up.”

  (이게 네 마음의 위로가 될지도.)


  레이코가 토트 가방을 끄적끄적이더니 내가 선물해 준 루이나르 샴페인병과 티슈페이퍼에 꼼꼼히 싸인 샴페인잔 뭉치를 꺼냈다. 한잔씩 나누어줬다. 금박지를 까고 코크를 터뜨린 후 네 잔을 이빠이 채워줬다. 그리고 가방 다른 구석에 있던 아이포드와 휴대용 스피커를 꺼내 다리 손잡이 위에 올려놓았다. 버튼을 만지작거리더니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황제’ 영화 타이틀곡이 흘러나왔다. 단출하고 우울한 피아노 선율이 선선하고 적막한 오늘밤과 어울렸다. 늦은 시간이라 다리 위를 지나가는 행인들은 거의 없어서인지 밀레니엄 브릿지를 통째로 대절한 기분이 들었다.


  피아노 울림과 함께 머릿속의 먹구름이 한둘씩 가시기 시작했다.


  훤한 대낮에는 숙소와 연수장을 바삐 오고 가느라 그 웅장한 존재를 잠깐 잊은 세인트폴 대성당. 하지만 지금은 새까만 남색 하늘아래 업라이트를 받으며 으리으리한 자태를 정면으로 뽐내고 있었다. 내 뒤로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과 런던 아이 관람차, 왼편은 뾰족한 연필처럼 우뚝 솟은 빅벤, 그리고 오른편은 푸른색 페인트로 칠해진 타워 브릿지와 저 멀리 희미하게 반짝이는 금융 신시가지 카나리 워프 (Canary Wharf)의 초고층빌딩숲. 마치 런던이란 거대한 영화 세트장 한가운데 서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내가 이 위치까지 오기 위해 뛰어넘은 수많은 허들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칼 융의 ‘사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의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말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Guys, let’s look back one day and think how crazy and ambitious we were. Let’s not forget what brought us here. This is for us. Cheers!”

  (다들, 우리가 얼마나 미치고 거대한 야망을 품었는지 어느 날 되돌이켜보자고. 우리가 왜 여기와 있는 건지 잊지 말자고. 우리를 위하여. 건배!)


  넷이 짠하고 잔을 부딪혔다. 레이코의 말이 가슴 정곡을 찔렀다. 내가 런던에 와있는 동안 잠시 목적의식을 잃었던 같다. 밀레니엄 브릿지 밑으로 흐르는 템스강의 빠른 물살처럼. 이제 나와 웰즈의 관계도 이미 떠내려가 버린 물줄기마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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