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제주

내 일상이 제주라면 어떨까

by 하빈

여행을 다니는 걸 선호하지는 않지만, 친구들 놀러 가는데 빠지기는 싫어서 여기저기 참 많이 다녔다.

가본 해외여행 중에 가장 멀리 갔던 곳은 스페인령의 카나리아 제도의 섬인 테네리페였다. 아프리카에 붙어있는 섬인데 우리나라에는 윤식당 촬영지로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직항이 없어서, 마드리드를 가서 거기서 테네리페 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순수 비행기 안에서 보낸 시간만 17시간이 넘었고 실제 대기 시간등을 고려하면 하루가 넘어가는 시간을 교통수단과 공항 등에서 보냈다.

힘들게 도착한 테네리페의 가라치코(Garachico). 에어비앤비에 짐을 풀고, 돗자리를 챙겨 숙소 앞의 해변을 향했다. 맥주를 사고 돗자리를 깔고 해변에 누웠다. 해변에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사람들, 따뜻한 햇살... 여기 정말 좋다.

근데, 여기 뭔가 제주도 같지 않아?


자꾸만 제주도가 생각나는 섬, 테네리페

테네리페는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섬이다. 한라산처럼 테이데(Teide)라는 화산이 섬 중앙에 있고,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다양한 검은 모래 해변이나 현무암으로 이뤄진 지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따뜻한 기후로 선인장 군락이 있는 곳도 있고, 가로수들은 종종 야자수로 심어져 있다. 사람들은 높은 빌딩 대신 낮은 높이의 건물들에 마을을 이루고 산다. 감귤 대신 바나나밭이 즐비하긴 하지만,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우리는 가라치코에서 다시없을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인생 피자집을 만나서, 머무르는 동안 3번을 가고, 바다 수영을 즐기고, 평범한 길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테네리페와 제주도가 닮았다는 이 어이없는 계기로 나는 주기적으로 나만의 작은 테네리페, 제주를 찾기 시작했다. 친구와 둘이 오기도 하고, 연인과 오기도 하고, 또 혼자 훌쩍 충동적으로 도망쳐 오기도 했다. 그런 여행들이 쌓이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지도 이제는 제주가 되었다. 이번에는 이번 브런치 글을 핑계로 또 제주를 찾았다. 여러분에게 팔딱팔딱 뛰는 나의 제주를 향한 마음을 전달해야 하니까.

부러워서 마음에 불나죠!?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 안. 조심스레 창문을 열어 팔을 소심하게 내밀어본다. 다 내밀긴 무서우니까. 손 끝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 눈앞에 광활히 펼쳐진 도로와 도로를 따라 배열된 현무암 바위들. 저 멀리 수평선을 따라 돌아가고 있는 풍차. "야, 내리자." 10년 동안 갈고닦은 운전 실력으로 친구는 드리프트 하듯 갓길에 차를 세운다. 말없이 반짝거리는 바다를, 울룩불룩 검은 돌을, 샤샤샥 퍼져 나아가는 갯강구들, 푸르르게 눈부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말해 뭐 해. 좋지 뭐.

발 안 담그고 못 참지

나는 제주의 바다와 해변의 검은 바위들, 그리고 틈틈이 해조류가 자라며 물이 빠지면 보이는 초록 바위들도 좋아하지만 섬의 중앙으로 달리다 보면 만나는 푸르름도 좋아한다. "헐, 말이다!!" 매번 올 때마다 한 번씩 보게 되는 말들이지만 왜 이렇게 늘 신기하고 반가운지. 나는 동물을 정말 좋아하는데, 혼자 왔을 때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몇 시간이고 돗자리를 깔고 앉아 목장의 말들이 뛰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지금은 사이좋지만, 5분 뒤 엄청 싸웁니다.


이게 왜 좋을까. 나는 왜 이렇게 여기가 참 좋을까.

제주에 오면 내가 왜 제주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쩌면, 제주』를 쓰기로 진즉에 정해놓고 이번 여행을 기다렸는데 와도 잘 모르겠다. 여행 경비가 동남아랑 비교했을 때 보다 저렴한 것도 아니고, 몇 번이나 와서 이제는 지도에 즐겨찾기 별이 지도 전체를 덮을 정도로 가득 찼는데.


여행을 하면 시야가 넓어진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도 사는구나. 여기는 밤 7시면 모든 가게가 닫는 곳도 있구나. 이 나라 직장인들은 다 비슷한 옷을 입네. 낮에도 와인을 즐기는구나. 모르는 사람들과 춤을 추기도 해!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습들을 보며, 삶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한지 느끼고 조금 스스로에 대해 관대해지고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이라는 말 뒤에 숨어서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사람이라, 여행을 다녀도 시야는 넓어졌지만 자유로워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뭐 여기가 마음에 들면 여기 살 거야? 너는 여기가 아니라 한국에 살잖아.'

'문화가 다른데 여기 사람들처럼 살 수 있어? 외국어도 잘 못하잖아.'

용기가 없는 나에게 넓어진 시야는 못 먹는 감이고, 여행은 한 여름밤의 꿈이다. 그래서 나는 제주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것일지 모른다. 제주는 잡힐 것 같은 이상형 같다. 나는 구글 번역기의 도움 없이도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살 수 있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때로는 깊은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여기서 일자리를 얻고 월급만큼의 내 몫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 새벽녘 아침의 제주 바다 산책이, 퇴근길의 널따란 노을이 일상까지 찾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주말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트래킹을 하고, 해변에 가서 찰방찰방 바닷물에 발을 담가야지. 고양이도 함께 하면 더 좋겠다. 겨울이면 귤나무를 구경하고, 여름에는 수국을, 가을에는 청보리밭을 가야지. 나중엔 꼭 제주에 살아야지. 제주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범위의 내 세상이다. 나는 매주 로또를 사고 토요일까지 행복한 상상을 하는 사람들처럼 제주에서 사는 미래를 그려본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다양한 카더라 연구처럼 실제 제주에서 사는 삶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복권방으로 향하는 사람들처럼, 나는 제주에 사는 내 미래를 그리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내가 제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 정말 다양할 것이다. 그래도 고민 끝에 찾은 이유 중 하나는 상상력 부족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나의 현실적이고 행복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꿈이라서 제주를 좋다니, 정말 멋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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