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양말

이렇게 맞춰 신으면 기분이 조크든여

by 하빈

지지리도 돈이 없었다

그래도 이제 갓 교복을 벗은 시기, 유행하는 옷은 다 예뻐 보이고 옷 하나에 마음이 산들거리기 마련이다. 나는 괜스레 시내에 가게 되는 날이면 조금 일찍 가서 지하상가 옷가게들을 기웃거렸다.


(바스락바스락)

"뭐 샀어?"

"응, 양말!"


은행 어플로 계좌만 몇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 한 결과, 늘 내 손에 들리는 것은 1500원짜리 양말 한 켤레였다. 횡재하는 날에는 양말 한 켤레에 900원짜리 가게를 만나기도 했다. 귀여운 동물 양말부터 쨍한 색감의 목양말, 지하상가 양말가게에는 온갖 양말들이 가득하다. 나는 누구보다 신중하게 내가 가진 옷들과 잘 어울리면서 포인트가 될 만한 양말을 고른다. 두 개 사? 아냐 하나만 사자. 곰돌이? 겨울이니까 역시 꽈배기인가? 그럼 나는 새 옷을 산 것만 같은 뿌듯함을 가득 안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풋내 나던 시절, 저렴한 가격에 내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고 어디서 꿀리지 않게 해 준(물론, 꿀렸을 수도 있음) 양말을 지금도 좋아한다. 지금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옷장을 열고 양말 칸을 먼저 본다. 그리고 오늘 신을 양말을 먼저 고르거나 아니면 오늘 입기로 마음먹은 옷에 어울릴만한 양말이 뭘까 고민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나는 누구보다 진중하다. 기본적인 룰은 아주 간단하다.


(1) 무채색 옷에는 포인트를 주는 쨍하거나 화려한 프린팅

(2) 상의 색감과 양말 색감을 맞출 것


양말의 큰 매력 중 하나는 저 (1) 번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누구보다 화려해질 수 있다. 물론 가끔 주의력 좋은 사람에게 들통나기도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의 기쁨이다.


"우와, 이런 양말 신은 사람 노홍철 이후로 처음 봐요"

"희희 이쁘죠" ← 이 멘트가 중요하다. 선수 쳐서 상대방의 기세를 눌러 내 양말에 대해 이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겉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고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다. 어쩌다 휴양지로의 휴가를 맞아 조금 튀는 옷을 입은 날이면, 몇 년이 지나도 그날을 기억하고 되짚어 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입을 용기가 없으면서 그런 옷을 종종 사고 마음을 주는 것을 보면 나는 그런 것도 좋아한다. 나는 쨍하게 눈부신 빨간색 티셔츠도 좋아하고, 회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즘 유행하는 옷들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게 입고 회사에 가면 눈치 보느라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나에게 발목 아래 신발 속 양말은 나만의 은밀한 요새이다. 난 양말을 고를 때만큼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온전히 나의 취향에 집중한다. 난 이 보들보들한 양말이 참 좋다.


여전히, 내 최애 양말 쇼핑처는 지하상가나 복작복작한 시가지 한 편의 양말가게지만, 구달 작가의 『아무튼, 양말』을 읽고 양말 전문 브랜드에도 눈을 떴다. 왜 그동안의 나는 양말 편집숍이나 인터넷에서 양말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을까? 세상이 3배는 넓어졌다. 아, 그리고 양말의 가격도 3배는 비싸졌다. 가벼운 지갑 사정이 양말 사랑의 계기였어서일까, 나는 쇼핑몰만 들락날락하고 장바구니에만 가득 담아둘 뿐 쉽사리 구매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러다, 친구의 선물을 핑계로 (배송료 아껴야 되니까~) 내 것도 담기 시작하면서 양말 브랜드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내 최애는 그린블리스라는 브랜드인데, 양말이 정말 아기자기 오밀조밀 귀엽다. 다들 심장 부여잡아! 무엇보다 사이즈가 남녀공용이라서 선물하기에 부담이 없다. 남자 양말들은 디자인이 단조로운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조금 사이즈가 여유롭게 나와서 발이 큰 사람도 이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이브날, 집에 다이소에서 구한 커다란 양말을 문에 걸었다. 산타(나의 물주)가 양말 안에 무슨 선물을 채워 넣을까? 설레는 마음에 흐물거리는 양말을 몇 번이나 다시 펴주었다. 이렇듯 나에게 양말은 설렘이다. 내가 아끼는 스웨터와 명도와 채도가 딱 맞는 색감의 양말을 찾았을 때, 색다른 길이감에 유난히 다리가 길어 보이는 룩을 만들었을 때, 그동안 만나보지 못한 재질의 양말을 발견했을 때, 나는 현관 앞에서 거울에 내 양말을 비춰보며 남몰래 뿌듯한 미소를 띤다. 이 은밀한 기쁨을 남녀노소 모두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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