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키보드

좋아함을 넘어서 취향으로

by 하빈

대학에 입학하면 다들 노트북을 샀다.

그 시절, 나도 졸업을 축하한다고 받은 세뱃돈을 모아서 마트 꼭대기층에 있던 전자제품 통합매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신중하게, DSLR 카메라를 골랐다. 함께 간 아빠는 몇 번이나 되물었다."정말, 이거 살 거야? 노트북 안 사도 돼?" 하지만, 지독한 홍대병에 걸린 나는 단호했다. 그때로 돌아가면 나 녀석의 등짝을 후려쳐줘야지. 그렇게 4년 간의 노트북 셋방살이가 시작되었다.

"친구야, 나 노트북 하루만 빌려주라ㅠㅠ"

팀플이 있는 날에는 친구들에게 노트북을 빌리러 다녔고, 언제부턴가 내 에코백 안에 늘 USB 4개와 키보드가 들어 있었다.

... 응? 키보드?

맞다. 그 크고 길쭉한, USB 타입으로 노트북에 꽂아서 쓰는 유선 멤브레인 키보드. 난 노트북의 납작한 펜타그래프 키보드가 정말 싫었다. 챱챱 거리는 소리도 싫고, 눌렀는지 안 눌렀는지 와닿지 않는 그 촉감도 싫었다. 그게 내가 노트북을 사러 매장까지 가서 노트북이 아닌 DSLR을 사서 나온 제일 큰 이유였다. 그 대신 키보드를 유난히 좋아했다.


첫사랑은 타자기였다

쑤욱쑤욱 눌리는 깊은 키감과 철커덕 거리는 소리. 손톱과 플라스틱 키판이 부딪힐 때 나는 소리. 무엇보다 그 비주얼. 타자기 디자인을 본뜬 키보드들을 찾아다니며 눌러보는 걸 좋아하게 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갑에 여유가 생기자, 나는 기계식 키보드에 눈을 떴다. 축마다 다른 소리와 감각, 키캡의 굴곡과 디자인에 따라도 달라지는 타건감. 천국이었다. 왜 이 세계를 이제야 알았을까? 하지만, 천국은 굉장히 비쌌다. 주머니에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일반 멤브레인 키보드의 10배나 되는 가격의 키보드를 덜컥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컴퓨터 액세서리 매장을 기웃거리며 만져보거나, 인터넷 세상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첫 번째 키보드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커피타임 중 기계식 키보드가 대화 주제로 떠올랐다. 생각보다 키보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도 흥분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빨콩*이 없으면 안 되더라"

"헉, 빨콩 키보드 써보셨어요? 어때요? 저 너무 궁금해요!"

*빨콩 = Thinkpad에서 키패드 중앙에 부착된 빨간색 포인팅 스틱


빨콩 키보드를 좋아한다는 과장님이 다정하게 물으셨다.

"내가 다음에 가져올게! 키보드 좋아하는구나? 어떤 키보드 써?"

나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만의 기계식 키보드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게 괜히 부끄러웠다. 그 대화가 끝나고, 나는 용기 내어 중고로 첫 키보드를 사게 되었다. 용기를 주신 과장님 감사합니다.

내 첫사랑

이 키보드를 사기 전에 미리 쳐보고 싶어서 타건 해볼 수 있는 키보드 샵을 여러 곳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드림 키보드도 만났다(구할 수 없어서 아직도 갖지는 못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늘 이 키보드를 늘 끼고 다녔다. 회사에서 사용하다가, 장기 힐링 여행을 떠날 땐 함께 챙겨 가기도 했다. 회사용으로 무소음 적축 키보드를 구매해서 타닥타닥 소리는 아쉬웠지만, 누르는 키압과 예쁜 키캡, 무엇보다 '내 첫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상 행복했다.


뭐든지 시작이 어렵다고 했는가.

나는 첫 키보드 이후 더 많은 키보드를 갖게 되었다. 리얼포트(토프레) R2 무접점 키보드도 써보고, 20만 원짜리 GMK 키캡도 써보고, 최근에는 조약돌 굴러가는 소리를 자랑하는 독거미 경해축 키보드도 손에 넣었다. (아~ 행복해)


"(펄쩍펄쩍) 엄마, 엄마, 키보드 왔어?"

"아 그게 키보드였어? 키보드를 왜 또 사!"

"이건 다른 거야~"

"키보드가 뭐가 좋니?"

그러게 난 키보드가 뭐가 좋을까?


키보드 덕후분들 키보드가 왜 좋으세요?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의사소통 기호를 전기 신호로 변환해 주는 이 도구가!

한 유기적 생명체의 사고를 장기 기록물로 전환해 주는 이 발명품이!

대체 뭐가 그렇게 좋냔 말이야!


좋아하는 것에 너무 심오하고 고상한 이유를 붙인 거 아냐?

오늘 다른 것에 대해 대화하다가 들은 말이다. 이 말대로 때로는 그냥 좋아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키보드는 그냥 좋은 것이다. 그냥 뜨거운 여름에 계곡에 발을 담그고 찰방대는 순간이 좋은 것처럼. 나는 이 도각도각 거리는 느낌이, 축마다 다른 소리와 촉감을 주는 것이 하염없이 좋다.


좋아함, 그리고 취향

근데, 내가 키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좋아하는 것과 많이 다른 점이 있다. 좋아하는 스펙트럼이 아주 좁다는 것. 이건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키보드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인데,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포인트에서 취향이 갈린다. 스페이스 바에서 느껴지는 스프링 소리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고, 축이 내는 마찰음이 뭐가 그렇게 다르냐 이 말이야. 그런데 덕후 세상에서는 세상을 갈라놓는 큰 차이처럼 느껴진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 좋아한다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 취향이 생기는 단계에 와 있구나. 좋아하는 것과 취향은 다른 거구나. 무언가를 좋아하다 보면, 취향이 생기고, 그게 시간이 지나면 구체적인 선호가 생기는 것도 있구나.

내가 좋아하는 웹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 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의 결을 하나하나 구분해 내는 거예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서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 가담항설, 홍화

우리는 표현하는 만큼 사고할 수 있다고 한다. 존댓말이 없는 나라에서 그로 인한 감정을 상상할 수 없듯이, 우리는 더 많은 단어를 이해할수록, 더 해상도 높게 표현하고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나아가 그 좋아하는 것에 대해 취향이 세밀해지는 그 과정도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나 자신에 대해 더 높은 해상도를 갖고 나를 더 분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과정. 내가 좋아하는 걸 찾고, 취향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보다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시간들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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