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과일

딸기는 금방이야

by 하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면, 외할아버지네 과수원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그렇게 시작되는 아동노동착취의 현장!! 나무를 타는 게 좋은 어린이들과 수확철을 놓칠 수 없는 과수원 주인의 니즈, 육아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는 부모의 니즈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그 시기가 오면 온 가족이 주말마다 과수원으로 향했다. 사실 그 시절은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평소라면 위험하다고 못 타게 했을 사다리에 척척 올라가서 나무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널따란 과수원의 풍경, 빨갛게 익은 사과의 엉덩이를 잡고 위로 꺾어 올렸을 때 똑하고 떨어지는 꼭지, 그 손맛. 사촌들과 누가 누가 더 많이 따나 경쟁하고, 바닥에 사과 빛 많이 받으라고 깔아 둔 은박지를 밟고 뛰어다니다가 꾸지람을 듣던 추억. 우리가 마구잡이로 따다가 흠집을 낸 수많은 사과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입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사과철이면 우리 집에는 냉장고 신선칸 가득 꿀사과가 넘쳐났다.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사과야


엄마는 항상 "의무적으로!"를 외치며, 인당 1~2개의 사과를 아침마다 할당했고, 나는 그에 자연스레 길들여졌다. 아침마다 게걸스럽게 수많은 사과를 먹어치우던 우리 가족은 그렇게 모든 계절에 아침에 과일을 먹지 않으면 입이 심심해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게 다 혈당 스파이크인데


엄마가 꺼내주던 과일을 넙죽넙죽 받아먹던 나도, 독립하고 틈만 나면 시장의 과일 가판대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퇴근길에 동네 작은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때, 과일 시세가 동물의 숲 배추 시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엊그제는 참외 8개에 만원이었는데, 오늘은 13개에 만원?!! 지금이 저점이다 싶어 양손 주렁주렁 참외와 복숭아를 가득 사서 돌아오면, 십중팔구 맛이 좋다. 제철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제철 과일과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그런가, 시장에서 제철인 과일들은 유난히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는 체리를 특히 좋아한다. 이 무더운 여름이 체리가 제철이다. 체리를 저점에 들어가려고 몇 번이나 매일 시장을 들락날락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체리가 난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웃거려도 체리의 가격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 과일 가판대에서 작은 바구니에 체리를 7천 원에 파는 곳을 발견했다. 고급 과일 체리에 7천 원이면 용기 낼 수 있지! 설레는 마음에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체리를 흔들어 재끼며 집에 도착했다. 룰루~ 체리 먹어야지~ 체리를 씻기 위해 그릇에 우르르 검은 봉지를 뒤집어 쏟아 냈는데, 내가 사 오지 않은 것들도 가득 담겨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많은 초파리들. 너희도 체리를 좋아하는구나. 나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기 때문에 너른 마음으로 너희들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나눠줄 수는 없단다. 미안. 세차게 체리들을 물에 헹구며, 급한 마음에 하나를 골라 입에 집어넣었다. 물컹. 내가 사 온 체리들에는 물러지고 상한 것들이 섞여있었다. 초파리, 너희가 나한테 나눠주는 거였니. 과일 가판대 할아버지의 어색한 미소가 이런 뜻이었구나. 바구니 위에만 멀쩡한 걸로 올려놓으셨을 할아버지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못 먹을만한 것들을 골라내고 나니 작은 컵에 담길 만큼의 양 밖에 남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지만, 그 중에 단단한 것을 골라 입에 넣자 풍기는 은은한 달달함에 또 금방 마음이 풀려버렸다. 그깟 3천 원이 뭐라고 만 원짜리 체리를 사지 않았을까 몰려오는 서러움에 눈은 울고, 입은 달달함에 취해있는 순간이란. 나는 왜 하필 체리를 좋아해서.


매번 과일가게 사장님의 호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에 과일을 사모으다 보면, 내가 먹는 속도가 작은 냉장고에 과일이 쌓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럼 남은 과일들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 버리기도 하면서 알게 된 사실. 생각보다 매일매일 과일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심지어 어떤 과일이 어느 때가 철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니 시기마다 제철인 과일을 먹는 재미가 얼마나 큰데!

우리 딸기철이 되면, 딸기 파티를 하자.

우리 학교는 딸기철에는 딸기파티를 했어. 제철에 환장하는 나는 H의 그 말이 너무나 멋졌다. 푸르른 잔디에 가득한 돗자리, 그리고 돗자리마다 놓여있을 딸기팩들이라니. 그 해 겨울은 이상하게 유난히 길었고, 나는 그 겨울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딸기철이 오긴 올까? 당연하지! 겨울바람이 유난히 매서울 때마다, 나는 딸기파티를 상상했다. 있잖아, 우리 딸기파티할 때 나는 우유 생크림 케이크를 살래. 거기에 딸기를 가득 올려먹고 싶어. 있잖아, 우리 딸기파티를 할 때 딸기 초콜릿도 사자. 아주 뽀얗고 달달한, 어린이 감기약 향이 나는 초콜릿. H의 말이 맞았다. 겨울은 끝나고 봄이 오기 시작했다. 해는 길어졌고, 세상은 조금씩 푸른빛이 도는데 나는 여전히 안전한 이불속에서 나갈 수 없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봄이었는데, 막상 봄이 되자 나는 더 무거워졌다. 봄이 오면 나도 나풀나풀 날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딸기파티도 다 귀찮아졌다. 이런 나를 H는 밖으로 끌어냈다. 같이 딸기 한팩을 사자. 그리고 네가 말하던 생크림 케이크를 사자.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아이 귀찮아. 나는 터덜터덜 마트로 들어가서 딸기 한 팩과 마트의 제빵 코너에서 생크림 롤케이크 조각을 골라 담았다. 아무 데나 앉아서 먹자. 딸기를 공원 화장실에서 대충 휘리릭 헹궈낸 다음,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플라스틱에 담긴 롤케이크를 꺼내고, 그 위에 딸기를 훌훌 털어 올렸다. 어, 맛있다. 달달하고 산뜻한 딸기향에 우유크림의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번졌다. H 한 입, 나 한 입, H 한 입, 나 두 입. 그렇게 작은 롤케이크에 딸기 반 팩을 곁들여 먹어치웠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플라스틱 벽에 뭍은 생크림을 젓가락으로 훑었다.

있잖아, H야. 우리 딸기파티 내년에 또 하자. 그 때도 우리 생크림 케이크를 사자. 그리고, 딸기맛 간식을 잔뜩 사자. 그리고 한 입 먹을 때마다 제철 딸기를 올려 먹자. 너 한 입, 나 두 입. 이렇게.

그 뒤로 난 한 해의 시작의 기준을 딸기로 잡는다. 딸기 철이 되면 '아 벌써 한 해가 시작됐구나' 느낀다. 제목으로 사람을 홀리는 수많은 책 중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이 있다. 오늘 떡볶이를 먹어야 하니까 하루는 살아야 하잖아. 나에겐 딸기가 그렇다. 힘들어도 살아야지. 내년 딸기파티도 놓칠 수 없잖아. 설향은 못 참지. 아직 새하얀 딸기는 비싸서 못 먹어봤어. 그건 먹어 봐야지. 딸기가 너무 한참 남은 뜨거운 여름이라면, 수박을 먹으며 버티자. 그다음엔 체리, 그다음엔 복숭아, 조금 선선해지면 사과를 먹고, 석류를 알알이 까먹다 보면 귤이 오겠지. 그럼 딸기는 금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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