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는 허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요즘의 나는 어떻게 하면 회사를 다니지 않을 수 있을까에 바삐 짱구를 굴리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사실 나는 일을 꽤 좋아한다. '지금 하는 일이 좋다' 이런 것은 아니고 그냥 보고서나 분석 자료, 제안서 등을 만들고 보다 나은 개선안을 고민하고 찾아내는 일련의 과정이 즐겁다. 그리고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들.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수많은 다른 곁가지들을 제거하고 남는 그 본질적인 일,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하는 행위를 나는 꽤나 좋아한다. 지금은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큰 편이라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만족도가 가장 높을지를 늘 고민하고 써내려 간다.
나는 왜 일에 집착할까? 행복은 회사 밖에 있다는데...
회사에 입사하면, 동기들은 보통 두 분류로 나뉜다. 내 삶은 퇴근 후에 시작된다! 회사는 돈을 버는 곳! vs. 회사는 자아실현의 공간! 열심히 해서 회사에서 내 커리어를 착실히 쌓아가야지! 나는 (안타깝게도) 후자였다. 연봉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무슨 일을 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하루에 자는 것만큼 많은 시간을 회사에 쏟으니까, 그 시간들이 나에게 월급 그 이상의 의미를 주기를 기대했다. 이제와 월급이 그냥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 때문에 저년 차일 때 누구보다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회사일에 쏟았다. 그래서 오히려 누구보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놓친 것들도 많지만, 사실은 얻은 것도 많다. 힘들게 얻은 몇 가지 조각들 때문에 8년 차가 된 지금도 일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골몰하는 것일지 모른다. 오늘은 내가 찾은 이 조각들을 맞춰보려고 한다.
일은 나에게 큰 성취감을 준다.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은 사실 회사의 본질적인 목표와는 거리가 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뒤로 미루고, 당장 발생한 문제를 어떻게 빠르게 덮을 수 있을지 고민하거나, 옆 부서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겉보기에 매력적인 해결책에 매달릴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누군가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것이 옆 부서에서 꼭 필요한 자료가 되기도 하고, 우리 부서와 부서장의 생존이 걸린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나면, 필요한 결과물을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고, 나는 그 순간 타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기분. 그 순간이 주는 성취감을 나는 정말 크게 느낀다. 지난 회사 생활을 돌아봤을 때, 기억에 남는 강한 기억들은 대부분 그 순간들이다. 내가 결국 해냈을 때, 그리고 내가 한 일이 도움이 되었다는 답변을 받았을 때이다.
OO님, 제안해 주신 대로 했더니 좋은 결과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어머나 세상에, 별말씀을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주신 덕분에 저는 오늘 날아갈 듯 기쁘답니다. 이런 피드백은 마치 제게는 인별 좋아요와 맛집 리뷰와 같아서 저는 해주신 말씀을 머릿속에 저장해 놓고 테이프 늘어질 때까지 반복재생할 거예요. 마음 같아선 리뷰이벤트라도 하고 싶네요!
그리고, 일은 나에게 사람을 준다. 최근 나는 부서를 옮겼다. 전에 있던 부서는 Staff와 같은 일을 주로 했는데, 지금은 개발/기획과 같은 일을 한다. 그래서 전보다 리뷰를 남겨주는 고객님들이 훨씬 줄었달까... 전보다 성취감을 느끼는 일이 줄어서 일을 대충 하려고 하면서도 또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팀원들 때문이다. 힘들다, 힘들다, 너무 힘들다 싶어도 옆 사람의 "OO님, 너무 힘들지 않아요? 그죠" 이 속삭임 하나에 피식 힘이 나버리고 만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사람들과 이렇게 깊은 유대감이 생겨버리다니. 지금 이 글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힘들면 노비들끼리 정분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하하. 퇴사하면 연락 안 할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다. 한 사회에 사람들과 함께 연대되어 있는 것이 좋다. 같은 상황에 놓인 함께 하는 동료들. 나와 같은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좋다. 다음 주 월요에도 우리는 눈빛을 공유하겠지.
데일리 미팅은 좀 아니지 않아요?
물론 절대 리더에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고 같은 마음을 확인하고 씩 웃고 한숨을 푹 쉴 것이다. 같이 웃기만 하면 더 좋을 테지만, 회사 생활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 또, 이 매력은 내가 돈 내고 하면서는 느끼지 못할, 돈 받는 일을 함께할 때만 나올 수 있는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회사를 떠날 궁리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회사생활은 체질이 아닌 것 같아. 그렇지만, 일에서는 떠나지 말아야지. 회사생활은 스트레스 투성이지만, 일은 꽤나 즐거우니까. 대신 지금처럼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해 일이 휘둘리고 문제해결에서 멀어지지 않는, 힘든 시간들에 대한 한숨보다는 고생 끝의 성취로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더 좋겠다. 아, 나 또 너무 이상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