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아이돌

너희가 만든 세계관에 나도 그만큼 진심이란다

by 하빈

애늙은이 시절에는 몰랐던 연예계의 맛, 30이 넘어서 나는 뒤늦게 아이돌에 빠졌다. 이 세계에 진심인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물론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동년배 중에 요즘 아이돌을 많이 아는 편에 속한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건 놀라운 일이다. 왜냐면, 학창 시절의 나는 그 시절의 부모님 세대 노래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아이돌들의 컴백일을 기다리고 굿즈를 사게 될 줄은 몰랐다.


시작은 덕통사고(덕후 + 교통사고)였다. 인스타 숏츠에 파묻혀 살던 어느 나날들. 내 알고리즘에 어울리지 않게 새로 데뷔한 아이돌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쿵!) 뭐야, 뭐야? 이 친구 누구야? 와식생활을 즐기던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 귀욤뽀짝 한 이 친구는 누구지? 누구라고? 다른 무대 영상은 없나? 이런 스타일도 있네? 아니 잠깐, 이 옆에 친구는 누구지? 이름이 뭐라고? 나는 순식간에 그 아이돌이 데뷔 이후 찍은 모든 영상을 섭렵했다. 첫인상이, 그다음엔 퍼포먼스가, 그리고 노래가 내 눈과 귀를 차지했다. 더 보고 싶은데!! 주말이 끝나고 나는 아이돌 덕후라던 우리 팀 막내 옆에 의자를 당겨 슬그머니 앉았다.

막내야.. 아이돌 덕질,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선배님 좋아하는 아이돌 생기셨어요?" 막내는 까르르르 웃으며 누구냐고 물었다.

"아, 그 그룹~ 저도 요즘 흥미 있게 보고 있어요!" (이 멘트가 너무 멋졌다. 너 우리 회사는 부캐지..)


그렇게 막내의 도움을 받아 X(구. 트위터)를 깔고, 위버스와 버블 등 아이돌과 소통할 수 있는 앱들을 깔았다. 여러 방송들과 덕질 용어를 배워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아이돌들에게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 좋은 걸, 왜 이제 알았지? 분명 서로 다른 동작 같았는데, 순간순간 박자에 딱딱 맞는 여러 명의 움직임. 가사와 딱 맞는 움직임과 표정. 느렸다가 빨라지고, 강했다가 유연해지는 안무. 예전처럼 한 번 듣기만 해도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은 분명 아니었지만,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요즘 K-pop은 퍼포먼스가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더니, 무대도, 뮤직비디오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다시 보기 버튼을 클릭했다.


Yeah, I'm all you need, I'ma be your idol


예전에는 하나의 그룹이 노래를 내는 간격이 그래도 꽤나 길었던 것 같은데, 요즘 아이돌은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다음 노래를 준비해서 컴백했다. (직장인 입장에서 하나의 컴백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이 이렇게 멋진 결과물을 냈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리고 일단 무엇보다 옆부서와의 협업이 가능한 거였어?) 그러다 보니 보는 입장에서는 정말 다양한 콘셉트의 노래와 무대를 질릴 틈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귀여운 콘셉트, 섹시한 콘셉트가 아니라 몽골 아이들 감성, 흙먼지 날리는 쇠맛 감성, 일본 성장물 애니메이션 감성, 고등학교를 막 입학한 학생 감성. 콘셉트는 정말 촘촘하면서도 다양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아이돌 세계는 정말 그랬다. 그중에서 나는 외계인(?), 우주전쟁(?) 콘셉트처럼 일상생활에서 보기 힘든 구조물과 소품 등으로 만들어진 콘셉트를 정말 좋아한다. 현대미술은 그렇게 난해하다고 생각하고,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주제를 다룬 사진전이나 내 감정을 건드리는 고전 미술 전시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아이돌 취향은 이렇게 상반되다니. 사람의 취향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글을 쓰면서, 되도록 생생한 감정을 기록하려고 주제에 대해 '하면서' 또는 '하고 난 이후'에 글을 쓴다. 「어쩌면, 와식생활」을 쓸 때는 누워서, 「어쩌면, 차」를 쓸 때는 차를 마시면서 썼다. 이번에는 아이돌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 영상들을 틀어 놓고 썼는데, 도저히 글의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글 쓴다면서 그냥 아이돌 덕질하는 사람이 돼..) 마감시간에 쫓기고 나서야 영상을 끄고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그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그런데, 단순히 내 시선을 끄는 것뿐만 아니라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그룹이 앞으로도 잘되길 응원하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에 누구보다 진심이 되도록 만드는 아이돌의 힘은 뭘까? 나는 왜 아이돌을 좋아할까? 이 답을 찾기가 어려워서 다른 글들을 읽어보았다. 완벽에 가까운 존재에 대한 동경이라던가, 팬덤에 대한 심리적 소속감이라던가. 일단 나는 아니다. 딱히, 아이돌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10대가 주를 이루는 팬덤이 이 늙은이를 끼워줄 리도 없다. 아직 해소되지 못한 10대의 고민을 대변해 주는 메시지를 전달해서? 오, 확실히 아니다. 왜냐면 난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들의 노래 가사에 대한 뜻을 정확히 모르니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멋진 이유가 아니다. 차라리 화려한 퍼포먼스에 현혹되었다고 보는 게 가장 가까운 것 같다. 아, 혹시 그냥 잘생기고 귀엽고 예뻐고 멋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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