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데킬라

어른이 되었다는 환상 (이미 어른 주의)

by 하빈

한 때, 자타공인 애주가로 술을 즐기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그 시절과 그때의 인연마저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술과는 거리가 생겼지만, 여전히 술자리에 오르면 참지 못하는 술이 있다면 단연 데킬라다. (다행히 술자리에서 데킬라는 거의 올라오지 않는 술이라 금주 다짐을 잘 참아내고 있는 편이긴 하다.)


데킬라와의 첫 만남은 술을 마시지 못하던 미성년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힌 여느 학생들이 그러하듯 나는 드라마에 목말라 있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서라도 공중파 3사의 드라마는 모두 섭렵한 지 오래였고, 나의 마수는 케이블 방송사로 뻗치고 있었다. (딱히 시간을 쪼개지 않은 듯하다) 그때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센세이션 한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 드라마에 푹 빠졌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도입부, 다른 15세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야릇한 전개, 애간장 타게 만드는 엔딩까지 나는 방영하는 요일을 인생의 목표인양 손꼽아 기다렸다. 나는 데킬라를 그 드라마에서 만났다. 레몬을 손등에 문지르고 소금을 뿌려 손등을 핥은 다음 데킬라를 마시는 여자. 그리고.. 급물살을 타는 남녀관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게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반복재생. 사람들 모두 각자 술에 대한 로망이 있겠지만 나는 그게 데킬라였다. 다만 조금 에로틱한.


당연하게도 손등에 레몬즙을 짜고 소금을 올린 다음 핥아 데킬라를 마실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데킬라라는 술을 접할 일이 없었다. 우리에겐 소주와 맥주, 그리고 기분을 낸다면 막걸리뿐. 바를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호세 쿠엘보가 데킬라라는 사실을 알리 없던 나는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한 술자리에서 선배가 말했다.

얘들아, 데킬라 먹을래?


네!!! 저요!!! 헉 근데 손등을 핥아도 될까요.


그렇게 시킨 데킬라가 한 잔씩 나왔고, 정말 바텐더가 소금과 레몬을 챙겨줬다. 차마 손등을 핥을 수 없어 우물쭈물하던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점잖게 소금에 레몬을 찍었다. 그리고 레몬을 한 입 먹고 데킬라를 단숨에 한 잔 들이켰다. 아- 데킬라가 꼭 손등을 핥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는 큰 깨달음을 얻고 선배를 따라 레몬을 소금에 살-짝 찍은 후 레몬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데킬라를 마셨다. 와-우. 그토록 궁금하던 데킬라는 이런 맛이구나. 보통 로망이 가득한 음식은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데킬라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마셨던 그 어떤 술보다 특별했다. 정말 맛있었다.


처음 맛본 데킬라가 정말 맛있었지만, 그 맛이 나의 대뇌피질을 때리고 해마를 간질인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면 나는 그 맛이 기억이 안 난다. 그 뒤로 몇 번이고 데킬라를 즐겼고, 돈이 생겼을 때 면세점에서 비싼 데킬라를 사서 먹어보기도 했지만 그 맛이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니, 나는 데킬라의 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내가 데킬라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내가 좋아하는 요소는 뭘까? 나는 아주 허세가 가득한 사람이다. 혼자 집에 남을 기회가 생기면, 가장 곡선이 유려한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책을 펴고 치즈와 함께 먹는 사람이다. 그 와인이 어떤 와인이었는지, 내가 편 책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와인을 골골골골 와인잔에 따르던 순간은 기억에 선하다. 데킬라도 그렇다. 데킬라를 마시며 나는 드라마에서 본 데킬라의 신선하고 섹슈얼했던 이미지를 나에게 덧입힌다. 순수해서 예뻐 보였던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 어설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성숙한 어른미. 참-나, 어른이 된 지가 언젠데. 도대체 나의 이 삐뚤어진 어른에 대한 환상이 뭐길래, 어른미를 느끼는 포인트들은 아직도 학생 때에 머물러 있는 건지. 그래, 내가 데킬라를 좋아하는 건 이 환상 때문이다. 데킬라는 어린 나에게 어른미의 상징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데킬라를 마시며 느끼는 이 고양됨을 좋아한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내가 참 우습다. 아주 웃겨.


P.S. 절대 금주 중이라 술을 마시고 싶어서 쓴 글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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