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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고 Apr 29. 2024

부모나 자식을 버리고 전토를 버린 자마다

2023년 8월 8일

모종의 사건을 겪어낸 뒤로 신천지에서 맺었던 관계의 대부분이 끊어졌다. 특히 업무상으로 연을 이어왔던 이들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지독하게 내향적인 성격이라 자꾸만 영역을 침범하는 사람들이게 업무적으로만 대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재수 없는 인간이었을지도.

그런데 갑자기 P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10개월 전, 코로나 19가 아직 한창이었을 무렵 스치듯 P를 만난 적이 있었다. 무리하게 강행한 10만 수료식이 있던 날이었다. 신천지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총회의 주장에 억지로 수를 채우기 위해 전국의 모든 신도가 동원되었다. 수료생이 앉아야 할 자리에는 신도들로 채워졌다. 도무지 참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자리했었다. 그때 행사장에서 만난 P와 하루종일 함께 있으면서 그에게서 내 심경과 비슷한 어떤 무언가를 느꼈다. 어딘가 모르게 신천지 사명자라면 응당 감춰야만 하는 비판적이고 염세적인 태도를 온몸에서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얼굴을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가급적 신천지와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P의 제안에 수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곧바로 달력을 확인하고 적당한 날짜로 저녁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회포도 풀고 싶었고, 자세한 근황도 묻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날에 느꼈던 것들을 조심스럽게 풀어놓고 싶었다.


P와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을 한 달 만에 자퇴한 뒤 소위 '올인'이라고 불렸던 전일활동을 하던 때였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전도 교육에 참석하고 이어서 전도활동에 나섰다. 점심은 김밥이나 토스트, 컵라면 같은 것들로 때우고, 저녁 8시 귀소모임 전까지 전도를 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하던 것들도 익숙해지고 곧 숙달되었다.

신천지의 포교 방식은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했다. 처음에는 계시록집회를 열기 위해 전단배포를 했고, 신학원을 개설한 뒤로는 전단지, 강의 녹음테이프 등을 배포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성과는 미비했으나 교세는 조금씩 불어나고 있었다.

광주 지역 대학가 전도에 엄청난 부흥이 있었고 성과를 냈던 광주 지역 청년 사명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특수전도대(약칭 특전대)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총회에서도 이를 의식해 총회특전대를 조직해 군소지역에 파견해 부흥을 유도했다. 전일활동자였던 나도 그곳에 배치되어 활동을 하게 되었다. P는 그 무렵 전도된 친구였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오지 않은 또래를 본 건 P가 처음이었다.

신천지에서 내가 기대해야 하는 것들은 막연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확신에 차서 신천지의 미래를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점술가의 유리구슬로 미래를 점치는 듯했다. 그때 또래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위로가 되었다. 실제로 P와 많은 교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서가 달라 함께 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따금 얼굴을 보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일부러 시간을 맞춰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고충을 나누기도 했다. 스무 살에 만난 우리는 각자 다른 영역에서 입지를 다졌고, 나이가 들어서는 고위 직책자로서 서로의 존재 자체에 위로를 받았다.


생각해 보니 P와는 술 한 잔 같이 기울인 적이 없었다. 신천지는 공식적으로 음주를 금지하고 있으나 다들 음지에 숨어 술잔을 기울였다. 애당초 성경에는 취하지 말라고 했지 음주를 금하라는 말이 없었다며 관련 지침을 두지 않았다. 과거에는 수료식을 마친 뒤에 총회장이 지파 사명자들을 모아 술을 따라주기도 했다. 장년회는 단합회를 열어 술자리를 갖기도 하고 신학사명자들 중에도 수강생들에게 술상을 대접받는 일들이 더러 있었다. 어떤 지파에서는 사명자들끼리 친분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유로 술자리를 종용하기도 했다. 타지파와 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일부러라도 지역의 특색이 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술상을 봐주는 걸 미덕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음주로 인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총회장으로부터 금주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던 P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부모님께는 아직도 말씀 못 드린 거야?"

"모르시지."

P는 신천지에 투신하면서 학업을 뒤로했다. 결국 여러 번의 학사경고로 제적 처리되고 부모님께는 위조한 성적표와 졸업증을 보여드렸다. 끝이 없는 행시 도전, 그것이 P의 유일한 핑계였다. P 말고도 이런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이 즐비했다. 이런 경우 대체로 전일활동자로 시작했다가 신학사명자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았다. 수입이 전혀 없는 상태로 교회에서 주는 소액의 교통비로만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교회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는 있었지만 열악했다. 솔직히 오지에서의 군생활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 부모에게 건넬 핑곗거리가 떨어져 신학사명자의 길을 포기하거나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청년회의 중간관리자 정도의 직책을 맡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일이 많았다. 여자들의 경우에는 결혼을 하고 나서 부녀회에서 같은 패턴으로 살아가기도 했지만, 남자들의 경우는 달랐다. 사회적 경험을 쌓지 못한 남자들은 완전히 뒤처졌고, 취직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나와 P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간다. 진짜 거지 같이 살았는데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것 같다."

"그때는 왜 그랬나 몰라…."

"직장 다니면 죄짓는 것처럼 만들었잖아."

"사회생활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다가 직장 구하려니까 진짜 어렵더라."

"그래도 직장 잘 구했네 뭐."

"운이 좋았지."

"옛날에는 한 달 교통비 30만원으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했을 텐데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어. 말이 신앙이지 그냥 거지 생활이었어."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안 했을 거야."

"나도."

이제 더 이상 신을 향한 감사는 없었다. P의 삶은 고통스럽고 치열했다. 부모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던 내가 P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옆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났다. 한 번은 개척 지역에 파견된 P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P는 꽤 오랜 기간 그곳에서 개척을 위한 팀을 이끌었다.

도시 외곽의 작은 상가 건물에 아주 작은 공간에서 P는 신천지 교리를 가르쳤다. 한 번에 이십 명 남짓 모일 수 있는 작은 방과 옆에 달린 주방, 그리고 P가 기거하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P는 시멘트 바닥에 열선을 깔고 장판을 덮은 곳에 비키니옷장 하나와 솜이불 하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그의 청춘이 사라졌다.

술잔을 비우다 보니 얼마 전 만났던 10만 수료식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왔다. 그날 우리가 가졌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10만 수료 같은 소리 하네. 성도들 죄다 동원해서 숫자만 채우면 다냐고. 온라인 강의 얼마나 처참한 줄 알아? 줌 틀어놓고 혼자서 강의하는 거 그거 보통 일이 아니야. 그 와중에 화면 켜놓고 자는 사람, 자리 비우는 사람, 밥 하는 사람, 별별 사람들이 다 있어. 그걸 보면서 강의해야 하는 거야. 근데 더 놀라운 건 뭔 줄 알아? 그런 사람들도 전부 10만 수료식 수료생으로 카운팅 됐다는 거야."

"그래도 한 때는 복음방이니 뭐니 하면서 공부해서 성경 가르쳤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씀 없다고 무시했던 기성교회랑 다를 게 없어. 사정하고 인정에 호소하고 난리도 아니다, 진짜."

"수강생이 더 이상 강의 안 듣겠다고 하고 출석도 안 하는데 탈락 처리를 안 해. 왜? 숫자가 줄어드니까."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예전에도 요행이 곳곳에 숨어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신학과정을 모두 마쳐야 했고, 외워서라도 보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을 모아 수료식을 치렀다. 나는 한 해에 20명 남짓한 수료생을 배출할 때부터(그때는 전국에서 수료생을 모아 한 번에 수료했다) 한 번에 수천 명에 달하는 수료식까지 보았다. 연합수료식을 할 때면 수만 명이 모였고, 코로나 19 직전에는 정말 10만 명에 가까운 수료생(겉으로는 10만이라고 했지만 이때도 실은 수를 부풀렸다)을 모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 19 이후로 완전히 무너져 버린 신천지는 더 이상 그럴 만한 힘이 없게 되었다.

P와 나는 처음에는 무너져 버린 신천지의 행태를 아쉬워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점차 농도가 짙어져 예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이야기도 꺼내기 시작했다. 식어버린 신앙 정도가 아닌 신앙에서 완전히 돌아서버린 서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각 지파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악행과 비리들, 그리고 신천지 교리와 실상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 이미 완전히 신천지에서 마음이 떠난 우리는 지난 청춘을 안타까워하면서 술잔을 비웠다.

2차를 가자고 결정한 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P는 술자리의 모든 비용을 계산해 버렸다. 식당을 나서면서 계산서를 내미는 내게 종업원이 계산이 끝났다고 말했다.

"너 결혼식, 못 가서 미안했다."

P는 몇 년 전에 있었던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을 만나지 못하다가 10만 수료식에서 만났던 것이다. P는 아마도 그날 사과의 말을 입술 언저리에 걸어두고 내뱉지를 못했으리라. 오래 마음에 두고 있다가 기어코 그날의 회한을 털어낸 것이었다.

"미안해, 내가 돈이 너무 없었잖아. 축의금 10만 원도 못하는 게 너무 민망하고 원통해서 그랬다. 오늘 술값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어."

P의 고백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실은 나도 P와 다르지는 않았다. 내 경우에는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돈을 타서 부조를 해 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경조사 불참으로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는 스무 살부터 때마다 아들 지인의 경조사비를 대신 마련했던 아버지가 옆에 있었다. P와 같은 입장의 신천지 청년들이 나를 보며 박탈감을 느껴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P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외롭게 버텨왔던 걸까. 그리고 그 모멸의 순간들은 고작 몇 개월의 사회생활을 통해 해결되어가고 있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리고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신천지 신도들은 이 구절을 들어 자신의 길에 위안을 삼고 믿음을 이어간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신천지에 투신한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는 가족들에게 강권하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가 그러하다. 어쩌다가 신천지의 신학과정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믿음을 키워가기는 했지만 그 시작에 분명 강요와 종용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가족들의 신천지 생활로 어려움이 없었다. 많은 신도들이 어머니에게 '더 나은 가족신앙'을 위한 상담을 요청해 왔다. 어머니는 자신의 강압적인 전도에 이끌려온 가족들의 믿음을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어머니 당신께서는 자신의 전도에 강압적 태도가 없었다고 자신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이다.

가족들 모두가 그곳에서 신천지 교리를 삶의 잣대로 삼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당사자들은 쉬이 생각하지 못한다. 이삼십 대에 세상을 등졌던 탓에 신천지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세상에 나와 취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신천지 전일자에게 돈을 대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도 혼자서 경제활동을 이어갔다. 이제 와서 아버지가 짊어졌던 커다란 짐의 무게를 떠올려 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신천지를 완전히 받아들인 적이 없으면서도 어머니의 바람 대로 신천지에서 믿음을 가진 척 살아왔다. 가족끼리 불화를 갖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행복한 것만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아버지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어머니도 P처럼 모든 것을 뒤로하고 혼자서 신천지에 투신했을지도 모른다.

수십 년 신천지에서 머물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나 생각한다. 신천지는 계시록을 이루었고 이루어간다고 주장한다. 어느 날에는 계시록의 거의 전부를 이루었다고 했다가 어느 날에는 아직 이루어야 할 것이 남았다고 말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이 성경의 한 구절을 이룬 것이라 말하면서 신도들의 믿음을 고취시킨다. 가끔은 정도가 심해 신천지 교리의 결론에 가까운 사건이 이루어졌다고 공표했다가 철회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조용히 자료를 삭제하고 사명자들의 무지로 와전되었으니 재정립을 하겠다며 다른 말을 한다. 변명은 한계가 있고, 한계를 넘어서면 수습할 수 없게 된다. 신천지의 변명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천지 사명자들과 신천지 미래에 대해서 토론하면 열이면 열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최후의 변명으로 "그래도 선생님(신천지 총회장)은 맞으니까."이렇게 말한다. 약간은 울적한 얼굴이지만 실은 울분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많은 신천지 신도들이 자신의 변심을 숨기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의 성화를 못 이겨 숨기는 걸 수도 있고, 세월이 아까워서 스스로를 속이는 걸 수도 있다. 단언컨대 신천지의 성공을 100% 확신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신천지의 총회장은 계시록이 이루어진 실상이 나타났다고 가르쳤으나 그 실상은 모두 조작되었다(이 내용은 회차를 거듭해 후술 하려고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영생의 소망을 가졌던 우리들은 한낱 조작된 거짓말에 품었던 헛된 꿈을 꾼 것뿐이다.

신천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에도 그곳에서의 삶을 이따금 떠올린다. 치열하고 고통스러웠으나 신천지에서 제시한 비전으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한 멍청한 모습이지만 그때의 나는 필사적으로 그 일에 매달렸고 청춘을 신천지에서 허비했다. 신천지는 완벽하게 기복신앙을 전제로 한 교리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조건부 축복이라는 말을 당연스럽게도 했고, 거기에 감화되어 세상을 등진 자들이다. 이따금 그들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건 그들이 내가 목표로 했던 신앙과는 다른 형태의 신앙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신을 믿지 않았다가 신천지가 주장하는 선과 악의 개념에 마음을 빼앗겼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요한복음의 구절이 성경의 하나님이 인격신의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닌 진리, 일종의 질서의 개념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을 성경이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일 만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격신은 당시의 시대상에 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좋은 형태였을지도 모른다며 당위성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초창기 신천지에서는 다소 이성적인 형태의 신앙관을 추구했고, 한국 기독교 특유의 미신적인 행태를 비판하고 말씀을 깨닫는 것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내 눈은 가려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신천지는 변모했다. 신도들을 단합하고 교세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다. 총회장은 점점 더 신비로운 간증을 쏟아냈고, 성경의 결론이 바로 우리의 눈앞에 있다고 증거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한낮의 꿈처럼 사라졌다. 이루어졌다던 실상은 다시 이루어야 할 과제가 되었고, 신도들을 착복하는 고위 지도층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꽤 발전한 모습을 보였던 신천지는 완전히 퇴보하여 허덕이고 있다. 이따금 총회장의 이름을 팔아 이득을 취한 자들을 징벌한다는 총회장의 특별지시사항을 하달한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사건으로 희생된 피해자들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택한 목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는 사명을 한다는 신천지의 총회장은 거의 완벽하게 직무를 유기하는 중이다. 신천지에서 마음이 떠나 이탈하는 신도들의 대다수는 총회장과 지도층(지파장과 교회담임, 그리고 교역자)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신천지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져도 책임지는 사람이나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 총회장은 그럴 때마다 모세나 예수의 심정을 들먹이면서 자신의 길이 외롭다며 칭얼거린다.

여전히 그곳에 소속되어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한탄스럽다.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훗날의 내게 부끄럽지 않기 위함이다. 신천지가 완전히 몰락하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때, 변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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