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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고 May 13. 20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언저리였다(정확한 시기를 기록해 특정되고 싶지 않다). 교회를 옮겨야 한다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어린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자꾸만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확신에 찼고 세 가지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했다. 선생님, 십사만 사천, 영생.


건물이 다섯 개나 되는 대형 교회에 있다가 낡은 빌딩의 한 개 층을 쓰는 작은 교회로 옮겼다. 또래가 수백에 달했는데 옮겨 온 교회에는 서너 명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교회를 같이 옮긴 가족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 아들이 내 또래였다는 것이다. 작은 교회에서는 학생들을 따로 분류해 예배를 드릴 만한 공간이 없었다. 예배당 뒤쪽에 주방이 달린 식당이 있었는데 예배가 시작되면 그곳에서 보조교사 한 명과 함께 방치되어 있었다. 식당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시멘트 바닥에 열선을 깔고 장판을 깔아 둔 정도였고, 보조교사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은 일종의 감시자에 불과했다.

식당으로 연결된 스피커로 지파장의 설교가 흘러나왔는데 그의 입에서도 반복적으로 선생님, 십사만 사천, 영생이 언급되었다. 이전 교회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었다.


옮긴 교회가 이전 교회와 다른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천지의 예배 광경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식당에서만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파장의 명령이 있었다며 남녀노소 모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했던 날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그날 총회장이 지파를 방문했던 거 같다.

신천지의 예배당은 장의자가 없이 마룻바닥이었다. 신도들은 모두 신발을 벗고 입장했다. 예배를 드릴 때는 단상을 바라보고 줄을 맞춰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질서 정연한 모습과 기계적인 모습은 분명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마치 명령어가 입력된 기계 같았다.  예배를 마치면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났고 설교자의 구령에 맞춰 다 함께 아멘을 크게 외치면서 두 팔을 하늘 위로 올렸다. 나는 그때 이교도의 밀회 현장을 본 것처럼 몸이 굳어버리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공포와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처음 보면 대번에 '광기'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될 만한 장면이다.

충격은 나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함께 교회를 옮긴 친구의 눈에도 보통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로부터 공공의 적을 만들어 처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의사는 언제나 묵살되었다. 내 어머니도 그렇지만 친구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은 고압적인 사람이었다. 사랑을 핑계 삼아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데 익숙했는데, 자식의 마음과 미래까지 자신들이 결정해야 했다.


신도 수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교회도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유년회, 학생회의 경계가 명확해졌고, 신학원으로 사용하는 장소에서 학생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유년회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였고 학생회는 중고등학생을 모아둔 곳이었다. 신천지도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담당 교사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하고 지도했다. 다만 담당 교사에 대한 교육이 체계적이지 않았고, 학생들에 대한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수준이 떨어지는 교육은 설득력이 부족했고 신천지의 교리를 이해하는 학생들은 매우 적었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모에게 강압적으로 끌려 나왔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사실상 교리에 대한 설명 없이 교리가 말하는 최종적 믿음을 강요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선생님, 십사만 사천, 영생이 반복적으로 언급되었고, 믿지 않는 자들은 요한복음 3장을 들어 사단의 영을 가진 자로 분류되었다.


신천지는 유월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신도를 모았다. 모세 때 열 가지 재앙의 마지막이었던 장자의 죽음을 피하는 과정, 사망을 피해 생명을 얻었다는 유월의 개념을 현세에 적용시켰다. 이는 요한복음 5장 19-29절의 예수님의 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로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생명인 하나님과 예수님이 떠난 땅에 사단, 곧 사망이 관영해 있고 이런 사망에서 벗어나 신천지로 가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알지 못한 채 죽을 운명에 있던 자들이 알게 되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개념이 얼마나 달콤했을까. 그리고 이는 계시록이 이루어지는 때에 십사만사천 명이 받을 복이라고 가르쳤으며 이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자가 예수님의 대언자 신천지의 총회장(선생님)이라는 말을 했다(더 많은 내용들을 들어 신천지가 예수님의 예언대로 나타난 곳이라고 가르치지만 더 자세한 내용은 후술 하겠다). 다만 이것은 성경을 믿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신천지 학생들의 대부분은 신앙심이 없이 신천지에 왔고 성경을 믿기 전에 성경대로 나타났다는 총회장을 눈으로 봐야 했다. 비상식적이고 황당한 논리를 펼치는 신천지의 부모들을 상대하는 것은 허공에 삽질을 하는 것처럼 허망하고 고된 일이었다.


대부분의 신천지 학생들은 성인이 되어 부모의 손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부모와 완전히 연을 끊을 수 없는 이들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격정적이고 맹렬한 투쟁인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주관이 뚜렷하지 않고 순응하는 데 익숙한 경우에는 이 중요한 시기에 꿈을 접고 신천지에서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심한 경우에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해 부모의 전일활동에 경제적 지원을 종용받는 일도 있었다.

이런 처참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신천지의 신학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들어보기로 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어머니의 강권으로 신학원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으나 수업 태도를 생각하면 거의 듣지 않았다고 할 만큼이었다. 어차피 똑같은 말이나 하겠지, 라는 생각이 작용했던 것이다. 끝까지 들어보고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 말라는 엄포를 건넸다. 엄마는 자신만만하게 모든 과정을 듣고 나면 다 이해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마침 전국에서 강의 잘하기로 소문난 강사의 개강반에 수강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신천지의 강의는 두괄식을 기본으로 한다. 서두에 답을 내고 두어 시간의 강의를 통해 설득을 한다. 처음에는 엉터리 같은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했으나 끝내 결론을 도출하는 강의를 여러 번 듣다 보니 조금씩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신천지에서는 이를 두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말씀이 스며드는 거라고 말한다. 신명기 32장 2절의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를 인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단한 땅을 갈아 씨가 심길 만한 땅이 되어가는 거라고 했다. 이는 마태복음 13장 1-9절의 씨 뿌리는 비유와 사람이 하나님의 밭이라는 고린도전서 3장 9절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세뇌에 가까운 교육 방식은 성경의 구절로 포장되어 거룩하게 변모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성경을 보다 더 거룩하고 존귀한 존재로 만들고, 성경의 구절들은 더 확실하고도 명쾌한 답이 되었다. 신천지 교리의 탁월성은 성경의 내용을 풀기 위해 성경을 들어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신을 믿지 않았던 내가 성경과 신천지 교리를 통해 확인한 것은 지난날의 예언이 훗날에 이루어져 실체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에는 반신반의했으나, 예수님의 실존까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구약을 이룬 예수님과 신약을 이룬 이긴 자의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신학 과정의 초등 단계는 '비유를 풀어 감추인 것을 보인다'는 공식으로 성경 곳곳에 있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을 풀었다. 그 비유는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목자, 하나님의 백성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3개월에서 4개월 동안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두어 시간을 교육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 결과는 대충 어떨지 예상이 될 것이다. 나는 애석하게도 신천지 교리를 인정하고 신천지 총회장을 이긴 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완벽하게 비교하고 파헤쳐서 신천지에서 벗어나겠다던 내가 신천지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 나는 어머니의 간증거리가 되었다. 일종의 교보재처럼 되어 자꾸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사람들의 격려와 칭찬은 나를 더욱 옭아매었다. 그것으로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고, 결국 미래를 신천지에 걸기로 했다.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교리 교육은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아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점을 세웠다. 신천지식 사고가 습관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만일 신천지가 반사회적이며 비이성적인 행동을 일삼는 집단이었다면 세뇌는 금세 풀렸을 것이다. 신천지가 부흥했던 것과 청년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신천지가 진리로 세상을 이겼다는 교리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전국의 대학가에서 많은 청년들이 신천지로 유입되었다. 특히 전남지역의 모 대학이 두각을 나타냈다. 총회에서 구성된 특전대와 전남지역에서 차출된 사명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각 지역의 신도들과 팀을 이루고 전도에 매진했다. 이때부터 신천지의 포교 특징 중에 하나인 일명 '모략전도'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설교나 강의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마음이 동한 사람들을 신학원으로 끌어들였다면 이제는 직접 대상을 물색해 원하는 형태의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 전도 대상자 한 명에게 붙는 신천지인은 보통 세 명, 더러는 네다섯 명도 될 수 있었으며 대규모 전도 프로젝트에서는 수십 명이 붙기도 했다. 먼저 전도를 하려는 사람을 인도자라고 칭하고, 전도 대상자의 친구가 되어줄 관리자가 한 명 붙게 된다. 그리고 전도 과정의 핵심 단계인 선교방 교사가 붙게 된다. 선교방 역시 전남 지역에서 시작된 성경 공부 과정인데 신학 과정의 초반 3과 정도를 잘게 쪼개서 가르칠 수 있는 교재였다. 이는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가고 총회 차원에서 복음방이라는 이름으로 개정하여 공식화되었다. 그 무렵 보다 더 공격적인 전도가 시작되었고 신학원의 명칭을 선교센터로 변경했다. 신천지 청년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는 자가 되고 가르치면서 반복적으로 자기 세뇌를 하게 된다. 이것이 신천지 총회장이 의도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상황과 맞물려 서로를 결속하는 주요한 장치가 되었다.

전도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뻔뻔하고 타인의 감정 변화에 둔감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상담을 잘하거나 심리파악에 능한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실제로 가장 실적이 좋은 사람들은 그러했다. 사람을 고르고 난 뒤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해 정보를 나열하고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마음을 샀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윤리 경시 현상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신천지 신도들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변모하거나, 아예 위장단체를 만들고 무언가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이때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방법은 애니어그램이라는 상담심리도구였다. 사람을 9가지 성향으로 나누고(세분화하면 18가지) 그의 삶을 재단한 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성경 공부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불투명한 미래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여린 청년들이 이에 홀려 상당히 많은 수가 신천지로 유입되었다.

성향별로 달라지는 상담 기법, 직업별로 달라지는 상담 기법, 지역별로 달라지는 상담 기법 등 지속적인 연구가 있었다. 때마다 모여서 워크숍을 하고 성공사례를 취합해 전국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사기 행각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사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강렬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거짓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지경에 이른다. 선행을 위해 악행을 저지른 뒤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이 신천지의 커다란 행적에서 보이는 거짓말에도 적용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신천지의 이상행보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총회장의 불륜이나 여타 고위직 사명자들의 악행 역시 각자의 사상을 기준 삼아 신천지의 행보를 이해했다. 이때 더 좋은 이해법은 추천되어 사람들에게 교육되었다.

일반 교회도 그렇지만 신천지 교회도 간증에 목을 맸다. 누군가의 행적을 듣고 따라가려고 하는 것은 믿음에 이를 만한 논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해가지 않는 것들, 납득이 어려운 것들, 거북한 것들까지도 확신을 가진 타자의 행보에 취해 뒤따르게 된다. 이것이 선동이 아니면 무엇일까. 신천지는 크고 작은 스피커가 존재한다. 총회장과 총회 중진, 열두 지파장과 지파 중진, 교회 담임과 교회 중진, 그리고 각 회마다 존재하는 중간 관리자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공표된 1차 메시지를 각자의 필터를 거친 2차 메시지로 확장하고 사람마다 다른 형태의 상담법으로 주입시킨다. 여기서 발생하는 메시지의 변질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다른 말인데도 메시지의 출처가 총회장이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진리에 가까운 파괴력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총회장의 말로 사람들을 정죄하기를 반복한다. 해석된 총회장의 메시지들이 넘쳐나는 중에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2차 메시지가 신천지 전체를 쥐고 흔든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는데도 신도들이 하나같이 신천지의 행보가 예수님의 대언자인 총회장의 말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큰 줄기 안에서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적당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충성은 최대한 과하게, 이견은 최대한 없도록 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총회장은 길을 달리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적그리스도라는 개념을 들어서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자들을 제명처리했다. 신천지 신도 입장에서는 제명처리 되는 것이 생명 가운데 왔다가 쫓겨나는 것이니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로 치부된 자들 대다수는 신천지에서 나간 후 정말로 반신천지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도들에게는 마태복음 12장 45절의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한다는 말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 후로 반복적으로 회자되고 서로를 결속하는 장치가 된다. 신천지 모든 신도들은 총회장의 일대기와 이루어졌다는 계시록의 실상을 성역으로 여기고 결코 침범하지 않았다.


내가 신천지에서 보낸 20여 년은 의심과 찝찝한 해소의 연속이었다. 해소는 사실 되지 않았으나 총회장을 향한 절대적 믿음으로 의문들을 눌러버린 것이다. 사실상 절대적 믿음은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고 신천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은 신천지 신도 개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둔 믿음의 잣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에 이른 그 순간을 너무도 사랑해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신천지의 교리와 행보는 사실 허접하다. 빈틈 투성이에 논리도 빈약하다. 하지만 반복된 세뇌와 자신이 세상을 이겼다는 착각 속에서 시야가 좁아진 상태다. 자신이 보는 것, 보았던 것만이 진리라고 여기면서 자꾸만 신천지의 행보에 의미를 부여한다. 참으로 안타깝다. 그 와중에도 신천지 신도 중에 의심하면서 신천지의 행보를 지켜본 자들이 많다. 이들 중 대부분은 최근 비껴간 계시록의 실상을 보고 이탈했다. 그리고 지난 세월을 안타까워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힘을 내어 살아간다. 생명의 탈을 쓴 사망에서 벗어난 것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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