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낭만 치사량 초과

by 미지

2025.09.08

대학원 첫 주에 몸살과 함께 큰 신고식을 한 뒤 맞이한 새로운 한 주는 좀 더 기대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꾼 꿈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로또를 사야겠다 싶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이건 길몽이었다. 살면서 처음 꿔본 꿈이기에 로또 당첨이 안된다면 분명 학교 일이 잘 풀리겠거니 했다.

아침에 본 카이스트 오리연못

연구실에 출근하여 이메일을 확인해 보니 피트니스센터 이용권에 당첨되었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

카이스트에는 스포츠컴플렉스라는 거대한 복합 시설 (학과 건물보다 크다) 이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저렴한 금액에 높은 퀄리티의 시설을 자랑하기에 회원제로만 운영이 된다.


매달 신규회원을 추첨하는데, 연구실 박사님은 보통 2-3번 떨어지면 된다고 했고, 아는 선배는 10번 도전했는데 떨어졌었다고 했다. 그래서 입학한 첫 주에 지원을 해두고 큰 기대를 안 하고 있던 터였다. 직원분께서는 경쟁률이 10:1 정도로 치열하기 때문에 한 번만에 당첨된 사람은 거의 없다며 나보고 운이 좋다고 하셨다.


스포츠컴플렉스 헬스장

오픈시간에 맞춰 매일 아침 7시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한국경제뉴스와 CNN을 들으며 갓생 사는 기분을 내기 딱 좋다. 헬스장 외에도 골프장이 있어, 나중에는 골프도 다시 해볼까 싶었다.


아무래도 이번 꿈은 여기에 운을 다 쓴 듯했다.


매주 화요일은 지도교수님과 저널클럽을 하기로 했다. 각자 일정이 다 다르지만, 점심시간은 모두 가능하지 않냐며 12시에 시작하기로 하셨다.


피자와 함께하는 저널클럽

교수님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피자인 듯했다. 화요일 점심마다 피자를 먹으며 각자 가져온 논문을 소개하고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 날은 노모어피자를 먹었다. 고구마피자에 치즈 크러스트까지 추가해서 먹으니 논문을 읽는 게 지루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언젠간 피자에 질릴 날도 오겠지만, 하루 점심이 해결되니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이다.


박사님들이 가져온 논문은 최신 연구 동향을 반영한 것이어서 나에게는 정말 기초적인 단어의 의미부터 응용까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바보 같겠지만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하며 계속 질문을 했다.


교수님께서는 논문 외에도 선배 연구자로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비판적으로 의심하는 것이 과학자의 자세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논문을 읽을 때도 ’이게 진짜 된다고?‘라는 식으로 봐야 한다고 하셨다. 대신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은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연구 진도가 안 나간다고 하셨다.


확신과 의심을 겸비해야 성공한 과학자다.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는데 내가 현재 있는 건물 1층에서 세미나를 하는 듯했다. 케이터링을 준비하고 있길래 잠시 지나가며 보았는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세미나에 성심당이라니!’ 대전은 보법이 다르다. 성심당 마들렌, 전병, 튀김소보루, 쿠키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학원생이 되었기에 지나가면서 잠시 세미나를 보고 마들렌과 전병을 간식으로 얻어왔다.


내가 실제로 들어야 하는 세미나(수업)는 다른 장소에 있었다. 이 날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으로 가야 했는데 국가기관이 학교 안에 있을 것이라는 건 큰 착각이었다. 학교를 통과해서 걸어가도 연구실에서 45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택시를 탈거냐는 박사님의 말씀에 ‘아뇨, 걸어가 볼게요.’라고 호기롭게 말하고 길을 떠났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KRIBB)

여기 연구실에 속한 대학원생들은 어떻게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오는지 모르겠다. 정말 너무 멀었다. 어쩌면 우리 교수님이 KRIBB에 계시지 않은 게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세미나홀로 가는 길에 2023년도 10대 바이오미래유망기술 판넬을 발견했다. 지금은 꽤 시간이 흘러 트렌드가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국가기관이니 나름 유의미한 정보일 듯해서 찍어왔다. 내가 하고 있는 연구도 저 표 중 하나에 속해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번 주말은 읽어야 할 논문이 3개였지만, 전 직장 책임님이 만나자고 연락이 오셔서 기대가 되는 주말이었다.


책임님은 성격이 모두를 엄마같이 챙겨주시는 분인데, 여행 다니는 것도 좋아하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아하셔서 어딜 가자고 하면 믿고 따라만 가면 된다.


남포방조제 러닝트랙

이 날은 오후 4시에 만나 서해 일몰 시간에 맞춰 러닝을 하자고 하셨다. 100km를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었다. 내비게이션에 ‘상화원’ (보령)이라고 검색을 하고 오면 되고, 트랙이 왕복 5km 정도 되어 러닝 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나는 오래 달리는 것을 잘 못한다. 왕년에 육상선수로 잠시 뛰긴 했지만 그것도 단거리 100m 선수였다. 한 번에 6’ 00 “ 페이스로 2-3km가 최선이다. 세 명이서 뛰었는데 처음에 내가 선두로 계속 달려갔지만 결국 나는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나중에는 반환점에서 걸으며 왔다.)


처음에 열심히 뛸 때는 너무 평화로웠지만 점점 숨이 차오르니 문득 한 책이 생각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사실, 읽어본 적은 없으나 주변에서 추천을 많이 받아서 대략으로 어떤 책인지 아는 정도다.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땐, ‘달리기에 대해서 그렇게 할 말이 많나?‘ 싶었다. 그런데 뛰다 보니 달리기에서 인생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된다.
해가 지는 풍경

처음에 열심히 뛰니 해가 지는 바닷가 풍경을 눈에 담기 힘들었다. 철석이는 파도소리와 그 바다에 잠기고 있는 빨간 태양, 앞으로 길게 뻗은 길과 날아다니는 새들. 이내 속도를 줄이며 많은 것들을 눈과 마음에 담아 가려 했지만 뒤에서 탁탁탁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조바심이 생겼다. ‘뒤처지면 안 되는데..‘


그러나 나는 그들과 시작점이 달랐다.

그들은 몇 달째 꾸준히 매일 5km씩 러닝을 해오던 사람들이고, 나는 간헐적으로 일주일에 2-3번, 그것도 3-4km를 엉망진창의 페이스로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그들과 같은 속도로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일뿐더러, 분명 나중에 몸에 무리가 올 일이었다. 먼저 지나가는 그들을 보며 홀로 되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기초를 쌓아둘걸..”


달리기는 연구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세 명이 일정 간격을 두고 같은 페이스로 달릴 때는 쉽게 지치지 않았다. 흔히들 페이스메이커라고 한다. 실제 내 실력보다 좀 더 나은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말이다.

연구도 그런 긍정적 자극이 꾸준히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중국에서 나와 같은 연구 주제로 지금도 실험을 하고 있고, nature, cell을 내고 있다. 그 존재는 경쟁자가 될 수도 있지만 앞으로 나의 원동력이 되기도 할 것이다.


꾸준한 러닝을 하지 않았어도 기초 운동 체력이 있기에 초반 10분은 버틸 수 있었다. 중간쯤 가니 러닝을 안 해본 티가 났다. 꾸준한 속도로 가기도 힘들었다. 우습게도 이때 문득, 기초 논문을 소홀히 하지 말라던 박사님의 말이 떠올랐다. 내 분야에 마일스톤이 되는 연구들이 몇 개 있다. 지금 매주 그 논문들 중 몇 개를 읽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 훌륭한 연구를 할 때에 꼭 필요한 기둥이 될 것이다.


당장 앞서 있지 못하다고 해서 조급하지 말 것.

(석사 1학기엔 이게 당연한 거다)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니 주변 풍경을 보기 어려웠다. 이곳에 온 목적은 러닝이 맞지만, 단순히 달리기만 할 것이라면 집 앞 공원에서 뛰어도 되었을 터였다. 1시간 30분을 운전해서, 일몰 시간에 맞춰 온 이유는 이 장소가 주는 특별함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걸 즐겨야 한다.

연구를 할 때도 생각에 환기를 시켜주는 일을 종종 해야 하는 것 같다. 한 분야에만 빠지는 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는 가장 빠른 방법일 수는 있지만, 그다지 건강한 삶을 살긴 어려울 것 같다. 다른 분야를 접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때론 평소 쓰지 않는 뇌를 써줄 필요가 있다.


수산시장 대하

그렇게 뛰고, 걸으며 연구 아이디어와 앞으로 살아갈 연구자로서의 삶에 대한 생각 정리를 한 후 나를 기다리고 있던 회사분들과 조우했다.


여기에 온 또 다른 목적은 제철인 대하구이를 먹기 위해서 기도 했다. 제철 음식은 대방어 말고 챙겨 먹어본 적이 없었다. 역시 맛잘알을 따라가면 8할은 기본 성공이다.

가을 대하는 정말 달았다. 생새우로도 먹고 머리버터구이도 먹었다. 함께 먹은 우럭회와 매운탕도 끝내줬다. 땀 흘리고 먹으니 더 꿀맛이었다. 술은 한잔도 안 했는데 낭만에 취한 건지 웃음에 계속 나왔다.


옛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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