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2025.08.12 - 2025.08.31 [2주 반의 백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살았다고 한들 뒤돌아보면 후회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
학부생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은 대학생답게 놀지 못한 것이다.
물론 입학과 동시에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수업과 모임규제 등으로 인해 고등학교 4-5학년의 시기를 보내야 한 것도 한몫했다.
덕분에 나는 학업적 성취를 많이 얻을 수 있던 시기이긴 했다. 수업이 동영상이다 보니, 그 시간에 연구실 인턴을 하고 실험을 하며 포스터 발표와 논문 게재까지 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하자 많은 사람들이 조언해 준 말은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페이스를 유지해라”였다.
지금 나는 그 말을 이미 알고 실천하고 있는 상황인데, 학부 때는 잘 몰랐던 것 같긴 하다.
급할 필요가 없는데, 왜인지 학부생 때는 4년 안에 내가 뭔가 대단한 연구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더 어린 시기에 더 빨리 성취를 내는 것이 연구자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학부시절에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연구실에 있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휴학 없이 칼졸 갈취를 했기에 (물론 회사는 학교에 비해 쉬어가는 느낌이 들긴 했다.) 퇴사 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2주 반 동안 백수로 살면서 특별한 계획 하나 없었다. 다만, 이제 자주 오지 못할 서울, 그리고 자주 만나지 못할 친구들을 많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워 J인 나에게 아무 계획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이란 다소 두렵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 무계획은 계획을 하는 것보다 더 풍성한 추억을 안겨주었다.
퇴사 후 하루는 꼬박 밀린 잠을 몰아 잤고, 그다음 날 만난 연수원 동기들은 퇴근 후 강남까지 와서 퇴사를 축하해 주었다. (퇴근 후 강남이라니..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때 본 한강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한국장학재단 복권기금 꿈사다리 페스티벌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인터뷰 영상 촬영 요청이 왔고, 백수의 신분으로 중고등학생 200명과 생명공학 연구원에 대한 소개 및 질의응답을 했다.
그리고 엄마와 더현대서울 에서 데이트도 했다. 평일 점심에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대학 때 쓰던 향수는 전부 버리고 대학원에서 쓸 새로운 향수도 샀다. 아쿠아 디 파르마 피코 디 아말피를 샀다.
오랜만에 대학시절 자주 가던 연남동에 놀러 가기도 했다. 졸업하고 1년이 훨씬 지나 이 동네에 가니 익숙한 풍경이 반갑고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날이 너무 후덥지근해서 눈앞에 보이는 아무 카페나 들어갔는데 완전 성공이었다.
언제 또 이렇게 오겠어?
이번 2주 반의 기간 동안 계속 떠올린 생각이었다. 앞으로 정말 언제 이렇게 여유롭게 평일 낮에 서울에서 돌아다니겠나 싶어, 고민하지 않고 “Go!”를 외쳤다.
사진에 보이는 메뉴도 하나는 일반적인 말차라테, 하나는 신메뉴였던 클라우드코코 말차였다. 코코넛워터를 평소에 선호하지 않지만, 또 언제 먹어보겠나 싶어 주문하였다. 그리고 내가 말차는 정말 많이 먹어봤지만 단언컨대 최고의 맛이었다. (연남동 발트)
그 다음주에는 어릴 적 함께 자주 시간을 보냈던 이모들과 사촌언니가 오랜만에 함께 모여 밀양에서 1박 2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백수 기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갈 계획은 없었으나, 모든 선배들이 대학원에 들어오면 여행을 갈 수 없으니 제발 어디 좀 다녀오라고 하여 급하게 결제를 했다.
대학원 입학 전 부모님과 함께 하는 추억을 꼭 가져가고 싶었는데 결혼기념일이시기도 했고 겸사겸사 쉬러 다녀왔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호텔과 음식에 투자를 많이 하였는데, 임직원 할인으로 포도호텔과 포도뮤지엄을 다녀왔다. 국내외 여행을 남부럽지 않게 다녀봤지만, 가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임직원은 웰컴 와인까지 준다)
흑돼지구이, 고기국수, 흑돼지 버거, 포도조찬, 올레길산책, 오설록 티 뮤지엄, 디아넥스 온천, 우무, 아베베 베이커리, 돌고래 찾기 등. 꽉 채운 이틀간 너무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
이 여행 또한 고민만 하다 안 갈 뻔했는데, 역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앞으로, 고민을 좀 줄여야겠다.
이제 대전에 내려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부득이하게 하루에 2건의 일정을 잡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날 점심엔 사촌언니와 평일 데이트를 했다.
언니도 우연히 나와 비슷한 시기에 퇴사를 하여 둘 다 평일 점심에 연희동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나 행운인가! 함께 바늘이야기를 가서 실을 구경하고 단추빵을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엔 학교 동기를 만나 가고 싶었던 카페와 석촌호수, 그리고 드디어 줄을 서지 않고 처음으로 런던베이글을 샀다. (매번 캐치테이블 웨이팅을 걸면 3시간이 걸려 이미 집에 도착한 뒤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서울에서 마음껏 하고 싶었던 것 중 또 하나, 전시회가 기였다. 원래도 물리학을 좋아했고, 최근엔 우주의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이 생긴 터라 NASA에 관한 전시라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DDP는 서울의 랜드마크라는데, 나는 살면서 처음 가본 것 같다. 오프일을 흔쾌히 나에게 써주신 한의사 지인분과 전시를 보고 침도 맞고 교보문고에서 책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날이었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 파는 크레페를 먹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 날은 일정이 다소 타이트했다. 점심에 동대문에서 저녁은 판교역으로 가야 했다. 판교에 있는 연수원 동기 6명과 오랜만에 만나 회사 이야기도 하고 양꼬치에 고맥(연태+칭따오)을 먹고 2차로 배스킨라빈스를 먹었다.
다들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모두가 나를 부러워했다.
퇴사한 사람이 승자다.
29일부터 31일까지 성당 교사로서 마지막 주일학교 여름캠프를 진행해야 했기에 정말 며칠 남지 않은 하루를 빼서 기숙사를 다녀왔다.
부모님과 함께 길 건너는 오리도 보고, 태평소국밥에서국밥과 갈비찜을 먹었다.
시작이 좋다.
가평으로 다녀온 여름캠프 기간 동안 거의 2-3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중학생이 된 것 마냥 신나게 물놀이하며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뒤풀이로 교사들과 방앗간처럼 가던 육회집에서 배불리 먹고 간신히 대전행 기차를 탔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 창세기 28장 15절
이번 여름캠프의 주제 성구였다. 정신없이 놀 때는 크게 의미를 곱씹지 않았지만, 기차에서 계속 이 성경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금 덜 걱정이 되었달까.
앞으로 5년간 타지로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학위과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을 것이고 만나는 사람들로 인해 지치기도 할 것이다.
솔직히 겁이 나요
사실이 그래요
앞길은 한 치 앞도 모르니
이적의 ‘그대랑’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내색은 안 해도 두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2주 반의 시간 동안 삶에 남아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살아낸 별다르지 않은 일상, 차곡차곡 담은 따뜻하고 꽉 찬 기억들을 순간순간 꺼내보며 힘을 얻을 것 같다.
수없는 이야기, 끝없는 모험만이, 그대와 함께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