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 못한 순간, 생각지 못한 사람들 덕분에
너무나도 퇴사가 하고 싶어 밤마다 채용 공고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토익 시험을 신청했다 취소했다를 반복하던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는 건 언제나 그렇듯, 모두가 그렇듯 결국 "사람"들 덕분이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지옥 같았던 첫 직장에서 2년간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나는 두 번 눈물을 훔쳤다. 웬만해선 잘 울지 않는 나인데도 눈물이 나더라.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던 상사(물론 그에겐 그만의 이유가 있었을지도.. 그런데 뭐 어쩌라고), 신입에게 말도 안 되는 업무를 주고는 나몰라라 하던 팀장과 동료들.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극악무도한 환경이었지만, 그 당시엔 사회초년생이었던지라 '원래 직장은 다 이런 건가?' 어리둥절해하며 이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내 이가 강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계속 악물다 보면 결국 다 부러져버릴 것이다. 더 이상 버티다간 정말 다 부러지겠는데 싶을 때 나를 지탱해 준 건, 같은 해에 입사했던 계약직 동기들이었다. 입사 후 6개월 정도는 일에 적응하기 바빠 퇴근 시간만 되면 기운이 쏙 빠져 집에 가서 곧바로 잠들기 바빴다. 그렇게 하염없이 출퇴근만 반복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의 하루가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그저 눈 감았다 뜨면 퇴근 시간이었으면 좋겠고, 무슨 일이라도 생겨 출근을 안 할 수만 있다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아마도 이 기간이 더 지속됐으면 우울증으로까지 번지지 않았을까. 다행히 일에 적응하고 난 후부턴 퇴근 후 사람을 만날 기운이 남아 이따금 동기들과 저녁을 먹고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각자의 부서에서 각자의 설움을 견뎌낸 후 저녁이면 그 설움을 서로에게 토해냈다. 쌓인 게 어찌나 많던지 떠들다 보면 밤 11시를 훌쩍 넘기기도 했다. 그런 날은 집에 들어가 겨우 씻고 침대로 바로 뻗었지만 어쩐지 다음날 평소보다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우울을 쌓아두지 않고 제때 흘려보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어 번, 그들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직장에서의 설움만이 아닌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취미는 뭐고, 어디서 자라왔는지,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지 등. 이직하면 끝날 인연이라 생각했던 그들과 나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지금까지도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힘들고 괴로운 순간을 나누고 위로했던 사이라 그런지 우리는 아직도 지금 직장은 괜찮은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서로에 대한 걱정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좋은 인연은 그다음 직장에서도 있었다. 당시에 계약직 생활을 전전하던 것에 이골이 나, 이번 계약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정규직으로 환승 이직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몇 차례 개인 휴가로 몰래 면접을 다녀오다 한 병원에서 최종 면접에 불러줬는데, 하필이면 그날은 다른 휴가자가 많아서 나까지 휴가 내기가 상당히 곤란한 날이었다. 전에 말했다시피, 내가 거쳐온 직장들은 전부 휴가에 상당히 쪼잔한 분위기였던지라 이런 경우 보통 막내가 휴가를 포기해야 한다. 물론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안보내줄리 없겠지만, 그 당시 나는 입사 6개월 차였다. 벌써부터 이리저리 면접을 보러 다니는 것을 고백하면 직장 동료들이 탐탁지 않아 할 게 뻔해 쉽사리 말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정규직 자리의 최종 면접이었다.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까짓 눈총, 못 견뎌낼게 뭐 있냐는 마음으로 고민 끝에 평소 나를 잘 챙겨주던 정규직 선생님께만 먼저 사정을 털어놨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휴가는 보내주더라도 욕 한 바가지 먹겠지, 싶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 일로 휴가 내는 걸 절대 눈치 보지 말라며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본인이 잘 말해주겠다고 날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그 선생님 덕분인지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면접을 다녀온 후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며 같이 걱정하고 기다려주었다.
솔직히 일은 내가 여태 다녀본 직장 중 가장 힘든 곳이었지만(입사하고 두 달 만에 5kg이 빠졌다.) 사람들 덕분에 꼭 그곳에서 정규직으로 오래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병원 티오는 누구 하나 정년 퇴직하지 않는 이상 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그 병원 출신 계약직들이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기에 내가 그 병원에서 정규직이 될 확률은 상당히 희박했다. 아쉬운 마음은 뒤로한 채 선생님들의 격려를 받아가며 열심히 면접을 다닌 결과, 나는 지금의 직장에 정규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약 5년 전의 일인데도 아직도 그때의 대화가 생생하다. 우물쭈물 면접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하는 내게, "OO선생은 일 잘하니까 어디서든 알아봐 줄 거야. 꼭 잘 풀리도록 나도 기도할게."라는 말을 듣던 그날이 지금까지도 고맙고 뭉클한 기억이다.
직장 동료뿐 아니라, 의외로 환자들에게 위로받는 순간도 있다. 보통의 경우 검사실이 아닌 환자를 대면해야 하는 채혈실에서 근무할 땐, 정말 진이 빠진다. 아픈 환자들은 예민함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다. 그런데다 혈관까지 안 좋은 분들이라면..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혈관이 안 좋은 분들은 이따금 채혈에 실패해서 두 번, 세 번 찌르게 되는데, 그때마다 따가운 눈총과 차가운 반응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채혈실의 직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입니다.'따위의 문구를 큼지막하게 출력하여 붙여 논들, 아무 소용이 없다. 죄송하지만 다시 채혈해야겠다는 말을 들으면 웃으며 인사하던 사람들도 단번에 눈이 세모꼴로 돌변하며 왜 다시 하냐고 윽박지른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나는 어쩔 수없이 이 순간 매번 을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아무리 을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폭력까지 받아줄 순 없다. 믿기지 않겠지만 채혈하다 환자한테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경우도 꽤 있다. 나는 아직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언젠간 나도 한 대 얻어맞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산다. 그러다 보니 채혈실은 내가 가장 기피하는 부서가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채혈이 매우 어려운 환자분이 오셨다. 오랜 신장 투석으로 팔에 있는 쓸만한 혈관은 전부 망가져 손등, 손가락, 발까지 혈관이란 혈관은 모조리 뒤져 겨우 겨우 채혈했었다. 진땀을 흘리며 채혈한 후 언제나처럼 죄인 모드로 "한 번에 못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라고 말하며 채혈 부위에 지혈 밴드를 붙이는데, 그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들었다.
"선생님이 더 고생하셨어요. 저 때문에. 제가 더 죄송해요."
그러면서 같이 오신 보호자분께 작게 속닥이시더니,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내게 주셨다. 매번 죄송하다며 서랍에 숨겨뒀던 과자를 넌지시 하나 꺼내드리는 건 내 몫이었다. 가끔은 이런 거 안 줘도 되니 채혈이나 한 번에 하라고까지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자발적으로 죄송하다고 허리 숙여 말하는 직업을 선택했는지 회의감이 들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런 나날이 쌓이고 쌓여 울분이 가득 찬 어느 날, 오히려 본인이 더 미안하다며 나를 걱정해 주는 환자분을 만난 것이다. 내가 잘 울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날은 집에 가서 잠자리에 든 후 살짝 마음이 뭉클해져 눈물이 조금 고였었다. 그간의 내 힘듦을 이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모든 환자가 욕설과 폭력을 동반하는 악마 같진 않다. 대부분은 채혈에 실패해도 애써 괜찮다고 말하고 또 찔릴 때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릴 뿐이다. 하지만 을의 입장에선 괜찮다는 말 한마디보단 결국 찡그린 표정만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환자의 눈치를 보며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하지만 결국엔 내 체온을 찾아간다. 손수 떠온 수세미나 자양강장제를 주고 가시는 환자분들에 대한 고마움 덕분에.
이제는 이 일에 꽤나 익숙해지면서 날카로운 반응에 하나하나 상처받지 않는 요령이 생겼다. 그리고 이따금 돌아오는 온정에는 매 순간순간 고마워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다. 여러 번 찔리는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을 찌르는 상대방을 먼저 걱정해 주는 마음이란 얼마나 위대한지, 나도 그런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게 만든다.
삶에는 반드시 균형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고통 속에는 기쁨이 숨어 있고, 행복 속에는 옅은 불안이 깃들어 있다. 요즘의 나는 전자에 가깝다. 끝없는 고통의 연속인 직장에서 나는 어떻게든 기쁨을 찾아냈다. 그 기쁨은 결국 사람이었고, 나 역시 그들에게 고통 속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