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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여우랄라 Oct 03. 2023

공모전, 아직 97번 남았다.

나는, 왜 공모전에 도전할까?


올해는 세 번의 공모전에 글을 보냈다. 두 번은 보기 좋게 떨어졌고 한 번은 아직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고백하자면, 지금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공모전은 3년째 글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떨어진 전력이 이미 두 번이 있다는 뜻이다.


공모전 도전기에서 2 혹은 3이란 숫자는 모두가 ‘에걔~~^^’하고 비웃을 정도의 미약한 숫자임을 나는 알고 있다.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늘 수많은 도전과 실패의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모전 수상 인터뷰를 보면, 많은 이들이 50번, 100번 혹은 5년, 10년이란 숫자를 언급한다. 그 정도의 노력과 정성을 들인 적 없으니 공모전에 합격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수많은 도전을 불사하는 용기와 성실함을 가진 다른 글쟁이들에겐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내게는 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다. 나 역시 그들이 말한 그만큼의 도전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모전 도전 100번.

아직 97번 공모전에 더 도전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버텨내야 할 긴 시간을 위해 ‘나는 왜 공모전에 도전하는가?’를 생각해야만 했다. 동기와 명분이 확실해야 50번이든 100번이든 도전할 힘이 생길 것이다.




읽는 사람은 쓰고 싶어 진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결혼과 출산이라는 변곡점 앞에서였다. 커다란 기쁨이고 행복이면서 동시에 ‘나’라는 이름이 줄어들고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 그때, 변화를 성장으로 바꾸어줄 도구를 찾았던 것 같다. 나는, 나를 지탱해 줄 도구로 책을 선택했고 조금 다르게 읽기 시작했다. 그 시기의 독서는 즐기기 위한 독서는 분명 아니었다. 목표가 있는 독서였다. 첫 번째 목표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가정과 육아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력단절을 피하기 위해 일과 관련된 독서였다.  ‘책은 타인의 생각과 삶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때의 독서는 목표를 향한 필사적인 독서였지만 그런 순간에도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낼 때마다 깨닫는 기쁨이 다음 책을 읽게 했다. 이때 시작된 독서는 육아와 일뿐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갔고 집에는 수많은 책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정세랑 작가는 [시선으로부터]에서 ‘애벌레처럼 책을 읽는 사람은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읽으면 읽을수록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글쓰기는 인생의 목표와 욕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책과 함께 보낸 시간만큼 아이는 성장했고 그 성장은 엄마에게 가용 시간이라는 여유를 선물했다. 그게 아마도 4년 전이었나 보다. 그때부터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3년 전부터는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글이란 신비한 축적.


글이란 것은 참 매력적이다. 생각이나 말은 순간에 떠 올랐다가 순간에 사라지는데, 글은 달랐다. 들인 시간만큼 정직하게 쌓여갔다. 삶의 많은 부분들이 지나고 나면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더듬더듬 찾아도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으나 순간순간을 붙잡아 둔 글은 축적되었고 그 덩이는 과거의 나를 입증해 주기도 하고 미래의 나를 예측하게도 해 주었다. 그 신비한 축적은 충만한 기쁨이 되어 계속 이어가게 하는 또 다른 힘이 되었다.




나를 입증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임과 동시에 성실하고 꾸준한 시간과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 작업이었다. 오롯이 혼자 해 내야 하는 작업이기에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늘 혼자 읽고 쓰고 있는 뒷모습만 보여야 했다. 그렇게 홀로 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의심하는 순간들이 그림자처럼 내 곁에 드리운다. 그런 순간에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는 작업이 어딘가에 내 글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앞에 놓인 글로 나를 입증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의 글을 평가받고 싶다.


어릴 때에는 원치 않아도 수시로 평가를 받았었다. 선생님의 첨삭을 받기도 했고 나의 글이 점수로 매겨지기도 했다. 그때는 내 감정과 생각을 누군가가 평가한다는 것이 왜 그리 싫었는지, 그분들의 평가기준이 옳은 것인지 늘 의심하고 분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내 글의 수준을 알고 싶어도 평가받을 곳이 없다. 다시 대학에 입학하거나 전문적인 글쓰기 강좌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내 글에 대한 솔직하고 객관적인 평을 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그저 늘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낼 뿐이다. 그러나 변화와 발전을 꾀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객관적으로 나를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 때로 아플지라도 나의 위치를 알아야 다른 곳으로 향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공모전은 어쩌면 내게 그런 시험대일지 모른다. 글쓰기에 관한 객관적인 평가를 유도하는 시험대 말이다. 내 글이 좋아졌다면 얼만큼인지. 그래봐야 당락만 알 수 있고 내 글이 어떤 면에서 어떻게 좋고 나쁜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당’이라면 인정할 만큼은 된다는 뜻이고 ‘락’이라면 글로써 값을 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보상이 필요했다.


나의 하루는 글로 시작해서 글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책부터 읽는데, 그러기를 10년이 넘었고 아이들 등교 후엔 본격적으로 읽고 쓰는 시간을 보낸다. 남편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차라리 다시 대학을 가라. 그 정도면 의대에 갈 수 있겠다.’는 핀잔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수시로 한다. 남편의 농담쯤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농담이 가끔 나를 찌를 때가 있다.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기나긴 시간에 대한 결괏값을 보여주고 싶다. 더불어 나를 아는 지인들에게도 성실한 시간이 주는 가치를 눈으로 보게 해 주고 싶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내게 준 변화는 분명하다. 내 안에는 보이지 않는 변화와 성장의 꿈틀댐이 있었다. 글을 읽으며 생각의 확장이 있었고 나도 모르게 깨닫는 지혜의 기쁨이 있었다. 그 변화를 글로 담을 수 있다면, 그 글이 다른 이의 확장과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값진 무언가로 표현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만족스러운 보상이 될 것이다.




완성된 글을 만들고 싶다.


내 글의 발전을 꾀하고 싶어 도전한다. 글이란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을 머리에 머물게 하느냐 아니면 종이 위에 내려 앉히느냐는 쓰는 행위에 달려 있다. 그런데 머리에서 손으로, 종이에서 글로 이어지는 글쓰기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고 더디다. 그런 이유로 쉽게 멈칫거리고 미루게 된다.

나는 공모전이라는 마감이 있는 글쓰기를 통해 나의 행위를 붙들어 둔다. 생각으로 멈추기 십상인 것을 종이 위에 적고 그 적은 내용을 수정을 반복하여 결국은 퇴고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한 편의 글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조금 더 공들여하기 위해 공모전에 참가하는 것이다.




책이 되는 밑거름이 될 지도.


그렇게 정성 들여 쓴 글들이 쌓여 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출간 인터뷰를 보면, 책 출간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공모전을 위해 썼던 글들이 많아 책을 묶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답하는 작가들이 종종 있다. 이렇듯 글은 한 번 완성해 놓으면 나의 기록이 되고 자료가 되기 때문에 완성된 글을 써 보는 공모전은 결국은 내가 최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보다 큰 걸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곧 발표될 공모전에서 미끄러진다 해도, 아직 97번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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