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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스키와 요가, 무엇을 택할까?

스키, 요가, 그리고 아버지

by 요기남호

오늘 나의 아쉬탕가요가 중급시리즈 루틴을 하였다. 요가 니드라사나 까지다. 대략 중급시리즈의 반절 정도다. 2주 만이다. 감기몸살로 2주 동안 중급시리즈는 하지 못했다. 역시 몸의 숙달이 필요한 것들은 쉬면 실력이 떨어진다. 카포타사나를 하는데, 발가락 밖에 잡지 못했다. 허리가 뒤로 꺾일때, 예전처럼 꺾이지 않는다는 게다. 원래 카포타사나를 3번하는데, 오늘은 첫날이라, 두번만 하였다. 트럼펫도 2주간 소홀히 한 탓에, 음색이 후퇴했다. 그러나, 몸이 이미 숙달한 것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3-4일 다시 하면, 원래 진도대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희망해본다.


까페에 앉아있다. 난 까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몸살감기와 여행을 다녀온 탓에, 2주만에 처음이다.


이번 해의 마지막 주다. 방학이라 보통때보다는 한산하다. 이렇게 또 한해가 가고 있다. 한살을 더 먹었다. 만으로 58세. 2년 후엔, 60이 된다. 진갑.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때, 아버님의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와 같으셨다. 그때 난 철이 없어서, 부모님의 건강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부모님 곁을 떠나 타지에서 다닌 탓에, 부모님을 주말에만 찾아 뵌 탓일까. 그것도 3학년때는 주말에도 항상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저 항상 건강하신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은 잔병이 꽤 있으신 편이었다. 지금의 나처럼. 부모님으로부터 몇 프로씩의 유전자를 내가 물려받았나를 추측해보면, 아버님으로부터 55%, 어머님으로부터 45% 정도 아닐까한다. 평평하고 약간 삐뚤어진 코는 아버님으로부터, 약간 나온 광대뼈와 약간 앞으로 나온 입은 어머님으로부터. 그러니까, 두분으로부터 못생기는 부분들이 조합된 얼굴이 내 얼굴이다. ㅋㅋ 성격 또한 아버님을 좀 더 닮은 듯하다. 당신과 같은 삐뚤어진 코 때문이었을까. 어린 시절, 아버님이 가장 예뻐한 자식이 나라고 항상 여겨왔다.. ㅋ 40이 되셨을때 보신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얼굴을 보기만 해도, 당신을 가장 많이 닮은 녀석이었으니… 오죽하셨겠나..라고 추측해본다. 아주 엄하셨던 분이셨다. 그래도 자식들 중에선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적, 어버지는 복덕방을 하셨다. 70년대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유동인구가 많은 때다. 그래서, 집 매매가 활발했었던 때다. 정식학교라고는 소학교 1학년이 전부였던 아버지는 독학으로 한자를 배우셨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에 친할아버지는 돌아가셔서 기억이 전혀 없지만, 어머님의 말씀으로는 동네 서당을 하시며 어린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로부터 최소한 천자문은 배우셨으리라. 그 이후에는, 모르는 한자와 언문을 보면, 동네에 대학을 다닌 몇살 위의 선배에게 찾아가 뜻을 배우며 독학으로 문자를 깨우치셨다고 나에게 말해주셨었다. 그러면서, 약간의 굴욕감도 느끼셨다며..


그렇게 독학으로 깨우치신 한자로 인해, 아버지는 복덕방을 꾸려가실 수가 있으셨다. 그당시 매매서류에는 한자를 기입해야했으니까.


잔병치레이야기를 시작하다가, 옆으로 샜다. 내가 중학교때 어느 밤이 생각이 나서다. 그날 밤, 한밤중에 깼다. 아버지의 신음소리때문이었다. 끙끙 앓고 계셨다. 낮에 복덩방 일로 손님들을 이곳 저곳의 집에 데리고 다니시느라, 다리와 허리가 아프셨다. 게다가 관절이 약하셨던 아버지는 밤에 아파오는 관절과 허리에 잠을 잘 못 이루신 듯 하다. 그날 밤은 더 심해서, 끙끙 앓고 계셨다. 그 신음소리에 난 잠을 깼다. 어디 아프세요라고 여쭈니, 무릎 관절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래서, 일어나, 아버지의 무릎을 주물러 드렸다. 한참을 주물러 드리자, 이제 됐다. 고맙다, 그만 자라. 하셨다. 그 이후에도 가끔, 아버지가 업드려 누우시고, 내가 허리 위로 올라가 아버지의 허리를 조심조심 밣아드린 기억이 떠오른다.


왜 아버지의 무릎관절이 생각났을까. 아마, 지난 주에 갔었던 스키장 때문이리라.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제법 했었던 (혹은 하고 있는) 운동은 축구, 스키, 수영 그리고 요가다. 축구는 초등학교 5-6학년때부터 제법했었다. 그때는 매일 학교가 파하면, 학교에서 가까웠던 집에 와, 대문에 들어오지도 않고, 책가방을 마루에 휙하니 던지고, 쏜살같이 다시 학교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하며 놀았었다. 해가 거의 질 때까지.. 그당시 어머니는 내가 커서 축구선수가 될 줄 알았다고 언젠가 말씀하셨다. ㅋㅋ 가끔, 축구를 하고 집에 오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공부에 전념하기를 요구(!)하셨던 아버지. 그래도, 그런때에는 화를 내시지는 않으셨다. 성적이 그런대로 괜찮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귀여운 막내녀석이여서가 아니었을까. 아뭏든 축구는 좀 했다. 대학원 시절까지 학교 대표는 아니지만 교내체육대회때마다 반대표 축구팀에는 항상 뛰었다. 내가 좋아했던 포지션은 미드필더. 유학생활때도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가끔 공을 찼다. 미국 표준연구소 시절에도. 그러는 동안에 오른쪽 무릎이 조금 상했다. 그후 이 대학에 온 40대 초반에 축구는 더이상 할 수가 없었다. 무릎도 무릎이지만, 운동부족으로 인해 체력이 바닥이었으니까.


다시, 스키로 돌아오자. 스키는 내가 만으로 32살이 되던 겨울에 배우기 시작했다. 벌써 26년 전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매릴랜드 주에 소재한 미국 표준연구소에서 포스트 닥터로 근무를 하고 있던 첫 겨울이었다.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막 끝내고 캘리포니아로 곧 이사를 가게된 대학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매릴랜드 주와 펜실베니아 주의 경계에 있는 스키장에서 보자고. 그래서 만났다. 그리고 겁도 없이 생전에 한번도 타보지 않았던 스키를 빌려 눈이 덮힌 평평한 초급스키 슬로프의 출발점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의 어린 아들도 있었다. 난, 그 친구가 나에게 스키 타는 법을 가르쳐 주겠지 기대를 했었다. 웬걸, ‘앞으로 가려면 스키를 일자로 하고, 속도를 줄이려면 팔자로 하면 돼’라고 말을 해주고는, 자신과 아들녀석은 초급은 너무 재미가 없어서 중고급 슬로프에 가겠다며, 바로 떠나버렸다. ㅋㅋ 그래서 슬로프를 기어가듯이 내려갔었다. 내려가면서, 우당탕 넘어지기를 서너번 했었다. 그때 어깨를 다쳤다. 병원도 가질 않아서 어깨에 잔금이 생긴 때가 그때다. 요가로 치유를 하기 전까지 가끔 통증이 와 나를 괴롭혔던 그 잔금들.


아뭏든, 그때 이후에 스키를 배웠다. 표준연구소에서 차로 한 시간 이내에 갈 수 있었던 스키장이 두개 쯤 있었다. 그 이후에 겨울마다 주말에 시간이 나면, 가끔 저녁에 가서 스키를 탔다. 무엇이던지 처음 배울때는 선생에게 정식으로 강습을 받아 배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난 돈이 아까워, 그냥 혼자서 배웠다. 그래서 스키를 무릎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게 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지난 26년 동안 그런대로 스키를 즐겼다. 가끔 관절이 아파오면, 잠시 쉬기도 했지만, 스키 타는 재미에 취해, 또 스키장에 가곤 했었다. 그후, 스키 실력은 늘었다. 탔던 가장 고난도의 슬로프는 콜로라도 주, 아스펜(Aspen)에 위치한 아스펜 스키장의 중급(blue level)슬로프다. 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조금 지나면 확 트인 넓고 긴 슬로프에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던 그 슬로프. 벌써 7-8년 전이다.


지난 주는 집에서 차로 3시간 가량 걸리는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스키장에 갔었다. 스키장에 나간지 이틀째에 관절에 악간의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예전같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키를 계속 탔겠지만, 이번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대신, 아, 이제 스키는 더이상 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었다. 무릎이 다치면, 요가를 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겐 이제 요가가 더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일상은 단순해져야 한다. 여행을 가기보다는, 사는 곳을 떠나지 않고 단순한 일상을 영위하며 지내는 것이 건강에 최선이지 않을까. 새벽에 일어나 요가를 하고, 까페에 나와 커피를 마시고, 초저녁에는 트럼펫을 부는 단순한 일상이면, 난 족하다. 내일 모레에 60이 되어가는 한 중년(?) 아니 노년의 넋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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