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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가선생 존 벌트만

by 요기남호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요가에 이끌릴까? 침착한 사람? 열정이 넘치는 사람? 요가를 같이 하는 친구들과 이 질문을 나눈 적이 있다. 좀더 요긴한 질문은, 요가를 장시간 수행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무엇일까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에 나의 요가선생 존 벌트만의 요가여정을 살펴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존 벌트만은 백인이다. 미국 남부에 위치한 테네시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은 은퇴하였지만, 개신교의 한 분파인 루터교회의 목사였다. 남부에서 목사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니, 보수적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지않다. 그의 아버지는 1970년 초에 마틴 루터 킹의 삶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목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 영향인지, 존은 지금도 마틴 루터 킹 기념일에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다시 듣는 걸로 일과를 시작한다.


존은 개신교 목사집안에서 자랐는데 왜 요가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어렸을때부터 우연하게 어떤 씨앗같은 것이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삶에 들어왔던 것 같다고 했다. 한 예로, 7살때 그는 인도의 고전인 <바거바드 기타 (Bhagavad Gita)>를 우연한 기회에 갖게 되었다. 가족과 같이 여행을 가느라, 공항에 갔었는데, 그때 머리에 흰두건을 두른 사람들이 그 책을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었다. 어린 아들이 그런 책을 읽게 내버려 둔 그의 아버지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 열린 목사였다. 그 책을 통해 존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정신적 사상을 처음 접했다.


뭔가를 측정하고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에 끌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테네시주립대에 들어가 지질학을 전공하여,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1여년이 지난 후, 테네시주의 동쪽에 인접한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애쉬빌 (Asheville)이라는 소도시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그 여자친구는 아쉬탕가 요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요가를 자꾸 권했고, 그는 마지못해 비정기적으로 그녀를 따라 요가원에 갔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리 재미도 없었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에겐 어려서부터 즐겨 타던 스케이트보드가 더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요가를 권유할때마다 핑계를 대고 피하려고 했다. 가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려 따라가주었지만, 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요가원를 아주 가끔 마지못해 다니기를 거의 1년 정도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에게 교통사고가 났다. 애쉬빌에 인접한 아팔래치안산맥의 능선을 따라 차를 몰고 가는데, 구불한 길에 서있던 차와 접촉사고가 났다. 그리 심한 충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차에 타고 있던 여자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심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도 같이 욕설로 대응했을텐데, 그날은 야릇한 유체이탈같은 걸 느꼈다.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그 광경을 감정없이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한 욕설을 퍼붓는 그 여자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서 있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 경찰이 왔고, 여자는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수습이 된 후에, 다시 운전을 하며, 문득 자신이 그날 아침 요가를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예전과 달리 그날 보인 평정심이 그날 요가를 했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깨달음이 왔다. 요가가 뭔가 특별한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동안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한동안 해보고, 별게 없으면, 그만두면 되겠지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는 요가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가 2006년 늦은 가을이었다.


매일 요가를 하기 시작한 후, 그전까지 해 왔던 운동들은 몸을 비대칭적 형태로 습관화시켜왔음을 깨달았다. 그가 오랫동안 즐긴 스케이트보드의 경우는, 항상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타기 때문에, 비대칭적이다. 요가는 그러한 운동과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요가는 온 몸을 대칭적으로 교정해주고 강화시켜주었다. 요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몸 어느부분이 비대칭적이었는지가 드러났고, 그 부분이 조금씩 대칭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무언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던 자신이 반응하기 전에 잠시 생각을 추스리는 변화를 보았다. 매일 요가매트에 서서 요가를 하면,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없어지고 침착해지는 걸 느꼈다.


정기적으로 요가수행을 한 후 요가에 매료되어, 존은 애쉬빌이 아닌 미국내 다른 도시에 있는 유명한 요가선생들의 워크숍모임에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2007년 여름방학에는 아쉬탕가요가의 근원지인 인도의 마이솔에 가서 2개월간 체류하였다. 그곳에서 쉬라쓰 조이스(Sharath Jois)를 만나 그에게 요가를 배웠다. 인도여행 전에 초급시리즈를 다 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모든걸 다 안다고 생각하고, 쉬라쓰가 새로운 아나사를 가르쳐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쉬라쓰는 중급시리즈는 전혀 가르쳐주지않고, 2개월 동안 초급시리즈만 계속하게 했다. 새로운 아사나를 배우러 인도에 갔는데, 2개월 내내 초급시리즈만 하라고 하니, 조금 낙담했다. 물론, 정기적으로 매일 요가를 한지 겨우 8개월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니, 초급시리즈의 모든 아사나를 흉내는 낼 수 있었겠지만, 쉬라쓰가 보기에는 그때 존은 중급시리즈를 배울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2개월이 다 지나, 미국으로 돌아올때 쯤에서야, 쉬라쓰는 중급시리즈의 첫 아사나인 파사사나 (Pasasana)를 가르쳐주었다. 이 첫 인도여행은 그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존은 인도에서 돌아와 다시 지질학을 가르쳤다.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 요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애쉬빌 교외에 있던 한 요가원에서 아쉬탕가요가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해와서 그때부터 요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존이 인도에 가서 아쉬탕가요가를 창시한 사람의 손자인 쉬라쓰에게 2달동안 직접 수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요가원에서 높이 사주었던 듯하다. 학교강의에도 바쁘긴 하였으나, 1년 동안 일주일에 한번 오후에 그곳에 가서 아쉬탕가요가를 가르쳤다.


그후, 3년 동안 학교강의와 요가수련을 일상으로 삼고 지냈다. 종종 미국내 다른지역에 있는 요가선생들을 찾아가 배우기도 하였다. 아쉬탕가요가를 잘하기도 하지만 요가철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작은 도시인 애쉬빌에는 그런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도시, 심지어는 하와이까지 유명하다는 선생들을 찾아갔었다. 그중에 대도시인 뉴욕이 가장 매력적이어 자주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여러 선생들에게서 1-2주 씩 배웠는데, 그리 흡족하지는 못했다. 그러던중, 어느날 뉴욕거리를 걷다가, 요가수업 선전벽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 와서 존 캠벌과 요가를 배우시라. 존 캠벌은 공인된 요가선생이며, 세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불교 전공인 종교학 교수이다.’ 그동안 찾아 헤매었던 선생이었다. 존 캠벌은 매우 부드럽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서로 마음이 통했고, 친구가 되었다. 그때가 2009년, 뉴욕에 있던 퓨어요가(Pure Yoga)라는 요가원이었다.


2010년 겨울방학때, 다시 인도에 가서 한달정도를 지냈다. 그때 존의 요가실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이 두번째 방문때 쉬라쓰는 존에게 중급시리즈의 모든 아사나들을 가르쳤다. 그 겨울에 존은 중급시리즈를 마스터하고 고급시리즈를 배우기 시작했다. 2011년 여름방학 3개월을 뉴욕에서 지냈다. 그전에도 그렇게 오래 머문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오직 요가훈련만이 목적이었다. 존은 집세가 싼 브룩클린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브룩클린은 맨하탄 맨 아래에서 다리를 건너 롱아이랜드에 있는 케네디공항 근처에 위치한 지역이다. 퓨어요가의 위치는 콜롬비아대학에 가까운 맨하탄의 중간지점에 있는 업퍼웨스트사이드 지역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숙소를 나서 지하철을 1시간 반을 타고 그 요가원에 가서, 존 캠벌의 아쉬탕가 마이소어 수업을 도와주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그 경험은 요가를 가르치는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하루는, 캠벌이 존을 요가실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며. 그날의 대화가 존의 일생에 큰 전환점이 된다.


그날 그 두사람간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하려면, 한 억만장자부부의 이야기를 잠깐 해야한다. 이 부부의 이름은 폴 존스 (Paul Tudor Jones)와 소니아 존스 (Sonia Jones)다. 폴은 버지니아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970년대 중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맨하탄의 증권가에서 일을 시작하여 나중에 자신의 헤지펀드회사를 운영하며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후, 그는 모교인 버지니아대학에 지속적으로 많은 후원금을 기부하여왔다. 소니아는 오스트렐리아 출신으로 전직 모델이다. 그녀는 1999년부터 아쉬탕가요가를 수련해왔는데, 그녀의 요가스승이 바로 쉬라쓰 조이스다. 이 부부와 존 캠벌은 뉴욕 요가사회에서 만나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은 미국대학에 요가프로그램이 생겨서, 대학생들이 요가를 배울 수 있게 해주자는데 의견이 투합되었다. 그래서 소니아는 버지니아대학에 연락을 하여 그 대학에 요가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센터를 세우는데 필요한 기부를 약속하여 허락을 받았다. 소니아는 캠벌에게 그 사실을 전하며, 그 센터장이 되어주길 부탁했다. 그 부탁을 받은 캠벌은 존 벌트만에게 이야기할게 있다며, 요가실 밖으로 같이 걸어 나왔다. 햇살이 따가웠던 날이었다.


캠벌은 존에게 같이 버지니아대학에 가서 요가프로그램을 이끌자고 제안했다. 존에겐 좀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자신은 애쉬빌에 있는 작은 대학에서 지질학을 가르치는 안정된 직업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교수직을 그만두고, 남은 평생을 요가를 가르치라고? 처음 몇년은 월급도 자신의 교수월급보다도 훨씬 작을텐데? 그래서, 바로 관심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그 이후에 캠벌은 여러번 존에게 설득하려 하였다. 존은 고민에 휩싸였다. 애쉬빌에 돌아와 한 학기를 더 강의 한후, 2012년 초에 존은 대학에 사퇴서를 제출하고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인도에서 5개월을 지냈다. 첫 한달 반은 인도북부지방에서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남은 석달 반은 인도 남부 마이솔에 가 그의 스승인 쉬라쓰와 요가수련을 하며 지냈다. 어느날, 존이 쉬라쓰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모르겠어. 나의 다르마 (Dharma, 법 혹은 올바른 삶의 방식)가 무엇인지 모르겠어.’ 쉬라쓰가 말했다, ‘다르마는 선택하는게 아니야.’ 체류 마지막 달인 8월 어느날, 쉬라쓰가 존에게 자신의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갔더니, 쉬라쓰가 존에게 아쉬탕가요가선생 공인증을 주었다. (전세계에서 이 공인증을 가진 사람은 30여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쉬라쓰는 존에게 버지니아대학에 가서 아쉬탕가요가프로그램을 존 캠벌과 같이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존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던 버지니아주 샬롯스빌이라는 소도시에 소재한 버지니아대학. 그곳에서 아쉬탕가요가 마이소어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게 그의 다르마가 되었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돌아올때, 바로 샬롯스빌로 향했다.




존의 요가여정에 커다란 위기상황이 한번 있었다. 오토바이사고였다. 그때가 2016년 초였다. 2010년 이후, 존은 매년 틈날때마다 인도 마이솔에 가서 1-3개월씩 묵으며 쉬라쓰에게 요가수련을 받곤 했다. 2016년에도 인도 마이솔에 가서 몇개월을 묵으며 쉬라쓰와 요가수련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가까운 도시에 불교승려 달라이 라마가 방문을 하였다고 하여 그를 만나러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고 있던 중이었다. 차 한대가 자기 바로 앞으로 불쑥 끼어 들었다. 그때, 그는 그 차의 뒷바퀴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았고, 피하려고 브레이크를 급히 밟았다. 모터사이클과 그는 공중으로 붕 치솟았고, 허공에서 회전을 몇번하고는 도로에 쿵 떨어졌다. 눈을 다시 떴을때, 그는 자신이 도로바닥에 누워있음을 깨달았다. 아쉬탕가요가 고급시리즈를 수행하고 있던 그에게 든 첫 생각은, 다쳤어도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였다. 그래서 몸을 움직이려했다. 그러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자신이 매우 심한 부상을 입었음을 깨달았다. 신음이 나왔다, ’제기랄!’ 다리와 손, 온몸에 격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었고, 의사는 존에게 나쁜 소식을 전했다. 왼쪽 대퇴골 상부가 부러졌고, 왼손에는 세군데 뼈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아, 나의 요가는 끝이구나. 병원의 한 병실에서 여러개의 주사바늘을 꽂고 누워있었다. 양옆 침대에도 교통사고로 들어온 환자들이 누워있었다. 그중 한사람도 오토바이사고로 들어온 환자였는데, 며칠 후에 시체가 되어 나갔다. 다른쪽 옆 침대의 환자도 상황이 심각해 수혈을 여러번 받고 있었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아, 이 요가를 그리고 요가선생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다 무위로 돌아가는구나란 절망감이 들었다. 그때, 그의 학생 하나가 병실에 들어왔다. 서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다, 둘이서 같이 눈물을 터뜨렸다.


대퇴골에 금속막대기 두개를 박아넣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후에, 여러 요가친구와 제자들이 와서 격려를 해 주었다. 하루는, 쉬라쓰가 왔다. 절망감에 휩싸여 침대에 누워있는 존에게 쉬라쓰는 ‘너는 회복되야해. 넌 넓은 마음을 가졌어. 우리 모두는 네가 회복되기를 원해.’ 그 다음날, 존은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이 부상이 자신을 좌절시키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병상에서 긴 숨을 들이쉬며 양팔을 올렸다. 숨을 내쉬며 몸을 굽혔다. 허리가 잘 굽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졌다. 그후 매일 호흡을 하며 기본적인 아사나를 시도했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곧, 병상이 아닌 휠체어에서 하게 되었고, 그 다음엔, 바닥에 앉아서 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너무 쉬웠던 기본적인 아사나도 힘이 들었다. 한 예로 요가를 시작한지 한달만에 할 수 있었던 결과부좌를 이젠 할 수가 없었다. 한 손이 망가졌고, 한 다리에는 금속막대기가 박혀 있어, 허리를 굽히거나 두손을 바닥에 대고 몸을 들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블럭이나 끈같은 간단한 도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심한 부상을 당했을때, 부상당한 부분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나서 하던 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존은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다.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요가를 회복과정으로 택했다. 아픈 부분을 우회하며 아사나를 할 수 있는데까지 하였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몸의 구석구석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몸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알아내기 시작했다. 모든 아사나들을 다시 배워야했다. 할 수 있는 아사나들의 갯수는 조금씩 늘어났고, 조금씩 더 깊게 할 수 있었다. 그 요가회복과정을 통해 그의 몸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1년 뒤, 존은 예전으로 돌아왔다. 고급시리즈의 아사나들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존의 오토바이사고와 회복과정은 아쉬탕가요가사회에서는 꽤 유명하다. 그의 회복과정은 다큐멘터리로 기록이 되어 유투브에서 볼 수가 있다. 심한 부상을 당했을때, 존은 좌절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예전의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서 하루 하루 매진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더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과거의 크고 작은 부상으로 인해 요가를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도 깊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oVsu3ROR9No


지금도 존의 몸안에는 금속막대기 두개가 박혀있다. 그는 오늘도 새벽 4시경에 일어나, 자신의 요가를 한다. 요가 후, 그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인터넷을 연결한다.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2020년 3월부터 학교의 체육관이 문을 닫았다. 체육관에서 열리던 존의 요가수업도 닫아야 했다. 그후 1-2주 내에, 존은 멤버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줌을 이용한 비대면 요가수업을 공지했다. 체육관에서 요가수업이 있을 때는, 수업료를 존이 소속해 있는 센터에 냈어야 했다. 그런데, 온라인 수업은 무료다. 존이 수업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5일을 매일 새벽에 일어나 2시간 온라인 수업을 무료로 베풀고 있다. 벌써 일년이 훌쩍 넘었다.


그에게 주어졌고, 그가 받아들인 다르마다. 오늘도 존은 자신에게 주어진 다르마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나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도 매일 새벽, 요가 매트에 선다. 선생 존에게, 그리고 존의 요가여정을 도운 모든 이에게, 나와 같이 요가수행을 하는 학형들께, 어느곳에선가 요가수행을 하는 모든 이에게, 이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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