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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도시샤대학

by 요기남호

*표지사진: 시인 윤동주


윤동주와 정지용 시비 앞에 서울 한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서있다.

어제 오후, 숙소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다, 문득 시인 윤동주의 시비가 그가 다니던 교토 소재 대학에 세워져 있다는 걸 어디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났다. 구글을 해보니, 그 대학은 도시샤대학. 내가 요가를 하러 가로질러 가던 교토정원의 지척에 있는 대학이었다. 교토에 다섯번 정도 왔었는데.. 아직까지 윤동주 시인의 시비에 가보지 않았다니.. 미안한 마음에 다시 길을 나섰다.


교토대 숙소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꺽으면 바로 큰길이 나온다. 그 길에서 오른쪽으로 꺽어 조금 걸으면 물이 흐르는 강을 만난다. 다리를 건너, 다시 한참을 걸으면 왼편에 교토정원이 보인다.

교토정원 북(?)문


정원에 들어가지 않고 같은 길을 계속 걸어 교토정원 북(?)문에 다달으면, 그 문에서 길 건너편에 도시샤대학 정문이 보인다.


도시샤대학 정문


정문에서 대학캠퍼스 지도를 받았는데, 그 지도에는 윤동주 시비의 위치가 써있지 않았다. 구글을 해보니, 교회건물 옆이라 했는데.. 교회건물이 어떤 건물인지도 지도에선 찾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캠퍼스가 크지 않아 걷다보면 찾을 수 있겠지 하며 교회건물처럼 보이는 건물로 걸어 그 주위를 삥 돌았는데.. 시비는 없었다.


명덕관


다시 교정을 걷다가 명덕관 건물이 혹시 그곳인가해서 그 건물 옆과 뒤로 돌아보았으나, 시비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나오다, 경비원아저씨가 보여 물었다.

나: Do you know where the tombstone of the Korean poet is located?

경: ah, Yoon Dong-ju. Follow me.


이 일본 경비원 아저씨는 매우 분명하게 윤동주의 이름을 정확한 한글발음으로 말을 하였다. 그리곤 열발짝 쯤 나를 인도하더니, 손으로 가르켰다. 저기라고. 명덕관 바로 맞은 편. 일군의 학생들이 서있었다. 아, 그곳이 윤동주와 정지용 시비가 있는 곳이구나..


윤동주 시비 (왼쪽)와 정지용 시비 (오른쪽)



이 두 시인의 시비를 세운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아마, 도시샤대학출신들이리라. 그 일본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윤동주 정지용 시비는 이 과학관 (Science Hall) 옆에 있다


윤동주는 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다. 송몽규가 주도했던 민족주의 그룹에 참여를 하였고 일제 경찰에 정치범으로 붙잡혀 규수지역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년 7개월간의 수감생활 동안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사망한다. 그때는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6개월 겨우 남은 시일. 시인의 나이는 27세. 너무 젊은 나이였다.


윤동주는 평소에 매우 건강했었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비롯한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일본 감옥에서의 요절은 그당시 일제가 벌이고 있었던 생화학무기개발을 위한 생체실험때문이라는 정황이 다분하다. 그당시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는 일제군인들에게 필요한 피를 사람피가 아닌 바닷물로 대체가능한지를 실험하는 대학 연구실들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후쿠오카 형무소가 위치한 규슈지역의 대표적 대학인 규슈대학이었다. 감옥생활 당시, 수감된 사람들에게 강제로 주사를 놓았다는 증언이 있다. 윤동주의 요절의 진상은 다시 꼭 밝혀져야한다.


두 시인의 시비 옆에 있는 작은 연못. 잉어들이 부유하고 있다.


식민지 조국을 떠나 이곳 교토에 유학을 왔던 윤동주 그리고 정지용. 그들은 어떤 상념에 젖어 이 교정을, 이 도시를 걸었을까. 식민지 조국의 참담한 현실. 그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야하는가. 그러한 무거운 질문들에 청춘을 즐기지도 못했을 시인. 그 상념들 중의 하나는, H교수, 케이고, 그리고 윤동주의 한글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이 경비원아저씨, 이 시비를 세워준 일본인들과 같은 사람들과의 연대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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