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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Jul 18. 2021

경계인에게 찾아온 요가

20대 중반에, 한국을 떴다. 관심조차 없었던 88올림픽이 끝나고 한 해가 지난 후였다. 1987년에 있었던 대통령선거는 부정선거였고 (그 당시 난, 군대 복무중이었고, 부정선거를 직접 체험했다), 내가 찍은 후보는 대통령이 될 수가 없었다. 그놈이 그놈인 놈들이 대통령을 해먹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는 것이 아쉽거나 슬프지 않았다. 황지우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나오는 문구,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을 되뇌이며, 홀가분하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떠남이 본격적인 경계인으로서의 삶의 시작이 될 줄이야.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타지에 왔다는 것은 너무 자명했다. 사람들이 생긴 것 부터 달랐으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 통성명을 하면, 유럽식 이름이 왜 그렇게 외우기가 힘들던지.. 미국에서의 객지생활에서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언어문제였다. 그 당시 영어 듣기와 말하기가 어려웠던 나는 수업시간에 교수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인문학이 아닌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자연과학의 언어인 수학에는 제법 숙달이 되어있어 유학생활을 그런대로 해낼 수가 있었지만.. 영어로 일상대화가 가능해지기는 수년이 걸렸다.


올해로, 미국에서의 생활이 33년이나 되었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긴 세월이다. 강산이 세번씩이나 변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이제 미국 소도시의 생활이 몸에 익숙해졌다. 한국을 떠날 때는 미국에서 이렇게 오래도록 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유학생활을 마치면, 아마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주위에서 보아온 사람들 중에 유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를 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코 앞에 닥친 유학생활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에, 그보다 먼 장래의 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릴적부터 인생은 짙은 새벽안개 속 같다고 여겼다. 2미터 이상은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 그래서, 먼 장래에 대한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다. 그저 매순간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을 뿐이다. 그 걸음들이 모여, 여기까지 왔다.


미국에서 내가 처음 지낸 도시는 매릴랜드 주에 소재한 발티모어 (Baltimore)다. 그곳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그때 맺어진 인연은 졸업후 수도 워싱턴 교외의 소도시 게이더스버그 (Gaithersburg)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 위치한 미국 표준연구소에서 9년 가량을 지냈다. 그리곤, 이곳 버지니아주 소도시 샬롯스빌 (Charlottesville)에 있는 버지니아대학에 교편을 잡게되어 이주를 하였다. 그때가 2005년 초 였다. 그후 십여년을 물리학연구와 수업으로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어느날 거울을 보니, 반백의 사내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오십대 초입이었다. 한국을 떠날땐 20대 중반이었는데,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반세기를 살아온 몸은 이제 여러 곳에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뻐근한 목, 결리는 어깨, 아파오는 무릎 관절, 삼층에 있는 연구실까지 층계로 오르면 헉헉거리는 숨. 그 전에 거의 운동을 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래서, 못하던 수영을 시작했다. 몇 개월간, 수영장 물을 많이 먹으면서도, 거의 매일 연습을 한 끝에, 초보자딱지를 떼고, 수영이 재미있어졌다.  주중에는, 아이들을 학교에 바래다주고, 수영장에 와서, 수영하고, 샤워하고, 그리고 연구실로 출근을 하였다. 그러한 일상이 한 일년 쯤 경과된 후부터, 가끔 수영장 탈의실에서 한 젊은이와 마주치기 시작했다. 매우 긴 머리카락을 뒤로 사무라이 상투처럼 묶은 것이 특이한 젊은이였다. 수영장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탈의실에서만 마주치곤 하였다. 외모로 볼 때, 동양인과 서양인을 부모로 둔 젊은이였다. 그리곤, 3년 정도 더 지났다. 그 사이에, 눈이 마주치면, ‘하이(Hi)’하기도 하고, ‘오늘 좋은 하루가 되길 (Have a good day)’이란 의례적인 인사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조금 더 깊은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머니가 한국인이었다했다. 자기는 수영은 못하고, 수영장 바로 앞에 위치한 요가실에서 아침마다 요가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수영장에 오며 지나칠 때마다, 그 곳에서 5-10명 정도가 무언가 심심한 몸 동작을 하는걸 보곤 했었다. 내가 워낙 사교성이 없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더 이상 깊은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19년 3월 1일, 금요일. 다시 그와 탈의실에서 마주쳤다. 그날따라, 요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내가 물어보았다. 날씨 탓이었을까. 그날따라, 아침 차가운 수영장에 들어가는 것에 약간 심드렁해져 있었나보다. 그가 요가수업 수강신청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날 부로 별 생각없이 신청을 하였다. 첫 강의는 3월 3일 일요일 아침. (그때는 일요일에도 요가수업이 있었다.) 그렇게,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의 이름은 아쉬탕가요가. 그리고 그는 며칠 후 샬롯스빌을 떠났다. 여자친구가 메사추세츠주 작은 도시에 소재한 대학에 금속공예하는 프로그램에 일자리를 얻어, 자기도 그곳에 가서 일을 찾아볼 거라며 떠났다. 그러니까, 몇 년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지내다가, 어느 해 봄이 다가오는 날 우연한 만남에서 나를 이 요가로 인도한 이 친구가 문득 떠난 것이다. 커피/차 한잔도 못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이렇게 스쳐 지나간 인연으로 시작된 아쉬탕가 요가를 꾸준히 수행한지 벌써 5년 1개월이 넘었다. 이제 요가는 나의 일상에서 떼어낼 수 없는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아니, 나의 삶은 새벽에 수행하는 요가를 중심으로 짜여있다. 아쉬탕가 요가는 다섯가지 시리즈가 있다고 한다. 초급, 중급, 고급 A, B, C, 시리즈. 요가를 시작한지 첫 일년가량은 초급시리즈의 아사나들을 배웠다. 그후엔, 초급시리즈에 더해서 중급시리즈의 아사나들을 하나씩 추가로 배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행하는 중급시리즈 아사나의 숫자가 많아졌다. 현재는 중급시리즈 전체와 고급시리즈 A에서 몇가지 아사나들을 수행하고 있다. 


요가는 나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나의 일상을, 나의 몸을, 나의 식생활을, 이 모두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앞으로 요가는 나를 얼마나 더 변하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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