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호 관장이 흠칫했다. 노아의 질문이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던 모양이다. 정민은 조금 긴장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호의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노아의 요청을 계기로 김준호 관장이 더 이상 말하기를 거부하진 않을까 걱정됐다.
다행히 김준호 관장은 금새 평온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정민은 김준호 관장이 조금 전보다 더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노아를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 얘기도 경찰에게 이미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준호 관장이 천천히 운을 뗐다.
“도훈 작가님의 요청이 있었지요. 저희 화랑관과 전시회를 하고 싶다구요. 다만 몇 가지 사정이 있어서 일정과 조건을 조율 중에 있었습니다. 그때문에 만났던 거구요.”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능글맞은 웃음을 날리며 노아가 대답했다.
“전 그저 디테일이 조금 궁금한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피해자는 언제 전시회를 하기를 원했습니까?”
“......7월 중이었지요.”
“7월이면 마주환 작가님의 전시회 바로 그 다음이겠군요?”
노아가 다시 물었다. 김준호 관장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은 문득 어젯밤 파티 후 받았던 화랑관 팜플렛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올해 화랑관에서 계획 중인 전시회들에 대한 대략적인 예고가 있었는데 7월에 있을 전시회 관련 언급도 있었다. 분명 여름 특별 전시회라고 했는데 전시회의 이름도, 관련 정보도, 참여 작가도 전부 미정이라고 나와있었다. 지현이 참가할 예정인 가을 단체전시회는 10월 말에 열릴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련 정보가 상세하게 나와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7월 전시라면 분명 여름 특별 전시회였지요?”
노아는 어제 팜플렛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모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정민은 짐짓 아는 척을 하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연스럽게 노아를 돕기 위함이었다.
“어제 팜플렛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전시회 이름이 아직 미정인 것 같더라구요? 참여하는 작가분들도 아직 미정인 것 같고.”
“아하.”
노아는 정민의 어시스트를 바로 받았다.
“피해자는 이 전시회에 참여하길 원했던 건가요, 관장님.”
“......그렇죠.”
“그런데 이 전시회에 관해서는 아직 정해진 게 없구요?”
“......노아 기자님.”
김준호 관장은 곤란해보였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설명을 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7월 전시회는 말그대로 특별 전시회입니다. 특별 이벤트인만큼 전시회 관련 세부사항 조율이 늦어지는 건 종종 있는 일입니다. 물론 이상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7월까지는 충분히…….”
“관장님. 혹시…….”
노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하윤 작가란 분이 이 특별전시회에 참여하실 예정이신가요?”
“......!”
김준호 관장은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민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노아가 던진 질문은 정민은 상상조차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김준호 관장이 보인 반응으로 정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윤은 7월의 특별 전시회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도훈은 하윤이 참여하는 전시회에 동참하기를 원했다는 건가?
그런데 화랑관은 왜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녔는가?
노아는 김준호 관장의 반응이 사뭇 만족스러운 듯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다음 질문으로 김준호 관장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혹시 7월 전시회는 이하윤 작가의 단독전시회였나요?”
정민은 김준호 관장이 오른손으로 앉아있던 소파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스스로를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정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야 정민도 조금 이해가 됐다.
“원래 7월 전시회는 미정이 아니었군요.”
김준호 관장을 보고 정민이 또박또박 말했다.
“원래 하윤 작가님의 단독 전시회였는데, 도훈 작가님이 무리하게 끼어들려고 하면서 화랑관에서도 본래 계획대로 홍보를 할 수 없게 된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팜플렛에도 관련 정보를 공개할 수 없었던 거구요.”
“맞아요. 순전히 피해자 때문에 마주환 작가님의 다음 전시회로 예정돼 있던, 고작 한달 반 정도 남은 특별 전시회가 갑자기 미정이 돼버린 거죠. 화랑관 입장에선 매우 중요한 이벤트였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노아가 맞장구를 쳤다. 정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7월의 특별 전시회는 화랑관이 분명 공들여 준비한 이벤트가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어젯밤 팜플렛을 보기 전까지는 정민도 화랑관에서 7월에 특별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화랑관 같은 대형 미술전시관은 전시 일정을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계획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통 한해의 전시 계획을 미리 준비해놓는다. 그런데 7월 특별 전시회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꽁꽁 숨겨놓고 있다가 한달 반 정도 남은 지금에야 공표했다. 심지어 일반 대중도 아니고 어젯밤의 프라이빗 파티에 참석한 미술계의 관계자들과 귀빈들에게만.
게다가 이 특별 전시회의 작가는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신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하윤.
종종 예정에 없던 전시회가 뜬금 없이 잡혀 갑자기 일정이 공개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전시회는 그런 갑자기 잡힌 이벤트가 아니다. 이 7월의 전시회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공개를 미룬 것도 서프라이즈를 통해 사람들의 기대감과 흥미를 더욱 조성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전시회에 도훈이라는 불청객이 난입해버린 것이다.
정민은 김준호 관장을 새삼 바라보았다. 얼마나 짜증나고 화가났을까? 동시에 정민의 의문도 깊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 전시회가 그렇게 중요한 전시회였다면, 김준호 관장은 왜 도훈의 무리한 요구를 뿌리치지 못했던 걸까?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묻겠습니다, 노아 기자님.”
한숨과 함께 김준호 관장이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전시회에 관해 정훈 교수님에게 들은 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노아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작은 아버지는 화랑관에서의 조사가 끝난 후 만날 예정입니다. 물어볼 게 많으니까요. 작은 아버지도 어제 미팅에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다.”
“그래요. 있었지요.”
“전 미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입니다만,”
노아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화랑관 관계자가 아닌 작은 아버지가 이 전시회 관련 미팅에 참석했다는 게 아마 일반적인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
“경찰에게는 외부전문가로서 참여했다고 하셨다고 들었는데…… 관장님도 아마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경찰도 이미 이상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어젯밤의 미팅에 대해 관장님께 다시 연락을 해올 겁니다.”
“그러니 경찰에게 추궁당하고 털어놓기 전, 노아 기자님에게 미리 다 얘기하라는 겁니까?”
김준호 관장은 거의 빈정대는 투로 대답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부분만 골라 쿡쿡 찔러오는 노아에게 짜증이 치솟은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이성을 찾았는지 목소리 톤을 낮추고 말을 계속했다.
“죄송하지만 어젯밤의 미팅이나 전시회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외부자인 기자님에게 다 말씀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 이해합니다.”
의외로 노아가 더는 따지지 않고 화답했다. 드디어 김준호 관장이 대답을 거부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김준호 관장은 여유로워 보이는 노아를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제가 답변을 거부할 거라고 예상을 하셨던 것 같군요.”
“예, 그렇습니다.”
노아가 시원스레 대꾸했다.
“당연히 답변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곤란하실 거구요. 그리고 경찰이 아닌 저를 믿는 게 좋을지 어떨지 고민도 되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
“다만 제가 관장님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이 특별전시회의 내막이 이 사건의 키를 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관장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전 저대로 조사를 계속해나갈 겁니다. 경찰도 집요하게 파고들겠죠.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경찰이든 저에게든 전 관장님이 나중에라도 진실을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요.”
“기자님은 정훈 교사님과 말투가 똑같군요. 감탄했습니다.”
김준호 관장이 중얼거렸다.
“어떤 말을 해도 정중하고 듣기 좋게 포장해서 하시는군요. 정훈 교수님과 달리 그렇게 잘 포장된 말로 사람을 압박하는 법도 잘 아시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만약 제 말이 너무 공격적으로 들렸다면, 용서해주십시오.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살인사건을 조사 중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결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노아가 사과했다. 아마 마음에도 없는 사과겠지만 김준호 관장 말마따나 어떤 말을 뱉든 일단 포장하고보는 버릇 덕에 아주 신실한 사과처럼 들렸다. 김준호 관장은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준호 관장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노아는 정민에게 슬며시 눈빛을 보냈다. 그만 일어나자는 신호였다. 이렇게 끝인가? 아직 김준호 관장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것을 직감한 정민은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아는 별 미련이 없어보였기에 하는 수 없이 일어날 준비를 해야했다. 그때였다.
“7월 특별전시회에 맞춰,”
김준호 관장이 느닷없이 내뱉었다.
“ 제 은퇴를 발표할 계획이었습니다.”
일어나려고 했던 정민은 허를 찔려 다시 소파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노아는 애초에 일어날 생각조차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김준호 관장을 바라보았다. 김준호 관장이 느릿느릿 말을 계속했다.
“새 관장으로는 우현이, 저희 부관장을 공표하려고 했구요. 이하윤 작가를 단독 섭외했던 것도 그때문입니다. 실력파인 젊은 관장과 천재라 불리는 젊은 화가 두 사람을 함께 두면 여러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멋진 그림이 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올해 은퇴를 계획하고 있다는 건 대단한 비밀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전시회는 극비로 준비하고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피해자가 이 전시회에 대해 알게 됐는지는 관장님도 모르신다는 거죠?”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잽싸게 달려드는 노아를 제지하듯 김준호 관장이 선을 그었다.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인지 대화 중 여러번 감정을 내비쳤던 그는 꽤 초연해보였다. 김준호 관장이 말을 이었다.
“이 전시회와 관련해 더 듣고 싶으신 게 있다면 세민이, 우리 기획팀장에게 듣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약 더 얘기해야 할 것이 생각나면…….”
김준호 관장이 뜸을 들였다. 아마 지금 본인이 하고 있는 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결국 그는 남은 말을 마저 입에 담았다.
“......제가 다시 기자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되겠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관장님.”
노아는 일어나 김준호 관장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김준호 관장은 몹시 피곤한 얼굴로 그런 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아는 관장실을 나서기 전, 김준호 관장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준호 관장은 쓴웃음과 함께 명함을 받았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라고 정민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