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파티 때문에 당시 화랑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범행추정시간대에 이들의 행방을 일일이 확인하는 건 꽤나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고 강훈도 아직 파악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경찰은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을 일단 용의선상에 제외하고 있었다. 이는 강도훈의 시신이 서관 1층 비상계단 입구 안쪽에서 발견됐고,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관 1층 연회장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화랑관 동관 1층에서 서관 1층까지 이동하는 방법은 몇 가지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중앙관 로비를 가로질러 통과하는 방법. 두 번째는 동관 2층으로 올라간 다음 중앙관 2층을 가로질러 서관 2층으로 이동한 후, 서관 1층으로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통해 내려오는 방법. 마지막 하나는 굳이 동관 3층까지 올라가 브릿지를 통과해 서관 3층으로 이동한 다음, 내려가는 방법이다.
사실 한가지 방법이 더 있긴 했다. 바로 옥상으로 이동하는 방법이다. 화랑관의 옥상은 서관, 중앙관, 동관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이어져있으니 말이다. 화랑관의 옥상은 동관 5층이나 서관 5층에서 비상계단을 통해 접근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평소에는 일반 관람객 뿐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개방돼 있지 않아 상시 입구가 잠겨있었다.
옥상이라는 선택지를 제외하면 나머지 이동가능 경로에는 전부 CCTV가 설치돼 있었다. 그렇지만 도훈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대에는 파티 참석자들이 이미 전시회 관람을 끝낸지 오래였기에 대다수의 인원이 동관 1층에 집중돼있었다. 화랑관의 직원들이나 케이터링 업체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동관 1층을 벗어나 움직인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들의 행적은 CCTV에 그대로 기록됐다.
자연스럽게 경찰의 관심은 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쏠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단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몰린 것은 수민이었다. 도훈의 사망추정 시간대에 서관 2층에서 서관 1층으로 이동한 행적이 CCTV에 찍힌 사람은 수민이 유일했던 것이다.
강훈의 말에 의하면 수민은 8시 30분쯤, 동관 1층의 라운지를 떠나 동관 2층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파티가 끝나기 전, 마지막으로 전시장을 둘러보려고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수민은 서관 2층에서 하윤과 마주치기도 했다. 하지만 수민은 하윤과 짧게 이야기만 나누고 바로 헤어졌다고 한다. 직후, 수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관 1층으로 이동했다고 진술했다. 서관 1층의 전시장까지 다 둘러본 다음에야 수민은 다시 동관 1층의 라운지로 가 주환과 합류했는데 그때 시간이 오후 8시 53분이었다.
수민이 서관 2층의 전시장을 나서는 모습, 그리고 서관 1층의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모습 모두 CCTV에 분명히 기록돼 있었다. 그리고 수민이 서관 2층의 CCTV에 찍힌 시간과 서관 1층의 CCTV에 찍힌 시간의 차이는 고작 2분 정도에 불과했다. 여자인 수민이 고작 2분 안에 도훈을 교살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훈은 수민을 유력한 용의자 후보로 올려놓을 수박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수민은 도훈이 살해당한 장소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이었으니 경찰 입장에서는 수민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 유력 용의자로 뽑힌 것은 부관장인 우현이었다. 우현은 도훈이 도서관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따라 나갔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도서관내 CCTV에서 우현이 도서관을 떠나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혔다. 시간은 오후 7시 50분. 도훈이 떠나고 고작 3분 후였다.
도서관을 나온 우현은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동관 5층으로 갔다고 한다. 동관 5층은 층 전체가 화랑관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우현은 처리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사무실로 돌아갔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관 3층까지 이동한 다음, 브릿지를 통과해 동관 3층으로 건너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동관 5층까지 갔다고 한다. 이때 우현이 브릿지를 통과해 동관으로 가는 모습이 브릿지에 설치된 CCTV에도 찍혔다. 이때 시간이 7시 54분 정도였다.
우현은 8시가 되기 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고 진술했다. 아쉽게도 동관 5층에는 사무실 내외에 따로 설치된 CCTV가 없었다. 이때문에 우현의 진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즉, 어젯밤 우현이 동관 5층으로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아니면 동관 5층은 갔지만 단순히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경찰이 우현을 의심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관에서 서관으로 이동하는 방법 중 하나가 옥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옥상에는 CCTV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유일한 문제는 옥상 입구가 상시 닫혀 있으며 화랑관의 일반 직원들도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관장인 우현은 가능했다.
옥상문을 여는 열쇠는 동관입구 열쇠와 서관입구 열쇠, 각각 하나씩 있다고 한다. 이 두 개의 열쇠는 평소에는 중앙관 1층 안내데스크에 위치한 열쇠보관함에 보관돼 있다. 이 두 개 외에도 옥상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화랑관 마스터키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 마스터키의 보관을 맡은 사람이 다름 아닌 부관장 우현이었다.
물론 우현은 평소 이 마스터키를 들고다니지 않았다. 평소에는 자신의 사무실 안에서 보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젯밤은 휴대하고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훈을 죽이기 위해. 옥상이라는 CCTV 사각지대를 이용해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추측에도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우현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예상외의 증인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우현의 아내와 5살밖에 안 된 우현의의 딸이었다. 어젯밤 집에 있던 두 사람은 오후 8시 10분쯤에 우현과 화상통화를 했다. 무려 20분 동안이나. 가족과의 화상통화 후에 우현은 사무실을 나서 다시 동관 1층으로 돌아왔고, 이는 동관 1층 CCTV에도 기록돼 있었다. 강훈은 화상통화에 관해서는 일단 확인 중이고 추가로 정보가 들어오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다른 문제는 옥상이었다. 평소 전혀 사용되지 않는 화랑관의 옥상은 청소가 돼있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들이 조사를 위해 문을 열었을 땐 바닥에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만약 사람이 이 먼지 위를 지나다녔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런 흔적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강훈은 조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였지만, 일단 범인이 옥상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했다. 사실상 유일한 CCTV 사각지대의 이동통로가 제외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더욱더 동관에만 머물렀던던 사람들은 범행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경찰은 결국 수사의 초점을 사망추정 시간 동안 서관에 접근했던 사람들에게 맞출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다. 천재화가 이하윤 역시 이런 이유로 용의선상에 올랐다. 8시 40분쯤에 동관 1층 라운지로 내려오기 전까지 하윤은 계속 2층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하윤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2층의 전시회장을 계속 돌며 주환의 작품들을 감상했다고 한다. 동관, 중앙관, 서관 2층에 설치된 많은 CCTV들도 하윤의 주장을 뒷받침해줬다. 하윤은 동관 1층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2층 전시회장을 계속 돌아다니기만 할 뿐 2층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도훈의 시신은 서관 1층에서 발견됐으니 하윤 또한 범행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평소 도훈과 하윤의 사이가 좋지 못했고, 심지어 어젯밤 도훈이 하윤을 찾아와 시비까지 걸었던 만큼 동기적 측면에서 하윤은 꽤 강한 동기가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다음 유력 용의자는 꽤나 엉뚱한 사람들이었다. 어젯밤 라운지에서 멋진 연주를 선보였던 피아니스트 서연과 그녀의 곁을 지키던 덩치 큰 남자 (김우섭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가 용의선상에 오른 것이다. 두 사람은 주환의 친구로 주환을 축하해주기 위해 어젯밤 파티에 참석했다고 한다. 도훈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로 도훈 뿐 아니라 미술과 아예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두 사람이 오후 8시 8분에 브릿지를 건너 동관 3층에서 서관 3층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CCTV에 찍혔기 때문이다. 우섭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예전에 화랑관에 온 적이 있어서 브릿지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서연은 처음이라 브릿지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서연에게 화랑관의 명물인 브릿지를 보여주고 싶어 홀에서의 식사를 마친 후, 잠깐 걸을 겸 동관 3층으로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브릿지를 건넌 후, 서관 3층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다 다시 브릿지를 건너 동관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그들이 다시 브릿지를 건너서 동관으로 돌아오는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시간은 8시 14분. 고작 6분이었다. 설사 이 둘이 공범이라고 해도 6분 안에 모든 범행을 해치울 수 있을까? 심지어 그들은 당시에 도훈이 화랑관에 있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아예 도훈이라는 인간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강훈의 표정은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망추정 시간 내에 동관에서 서관으로 이동한 것도 사실이니 일단 용의선상에 포함시킨 듯했다.
같은 이유로 수진과 그녀의 비서 박준수가 용의자 목록에 올랐다. 수진은 김준호 관장과 의논할 일이 있어 8시 20분쯤에 동관 3층의 브릿지를 건너 서관 3층으로 이동한 후, 5층의 도서관으로 향했다고 한다. 비서인 준수가 그녀와 동행했다. 강훈에 의하면 도서관 내 CCTV에 두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이 찍혔다고 했다. 그 시간이 8시 25분. 마찬가지로 고작 5분에 불과한 공백이었다. 수진과 준수가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도훈을 교살한 후, 사건현장을 정리하고 도서관까지 이동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재벌가의 일원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수진이 도훈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CCTV에 의하면 사망추정시간 내에 사건현장 근처라도 접근했거나 접근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이 일곱명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외에도 그나마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김준호 관장과 정훈이었다. 이 둘은 7시 이후로 계속 서관 5층의 도서관에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망추정시간 동안 이 도서관을 벗어나지 않았다. 수진과 준수는 9시 10분에 도서관을 나왔고 이후 운전기사를 호출해 바로 화랑관을 떠났다. 반면 김준호 관장과 정훈은 10시 30분에나 도서관을 나왔다. 화랑관의 직원들이 뒷정리까지 다 마무리하고 퇴근한 시점이 오후 10시였다. 두 사람이 도서관을 나왔을 땐 화랑관은 이미 닫힌지 오래였고 직원들도 모두 퇴근한 후였다. 1층 중앙관에는 야간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관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관 1층까지 내려온 다음 중앙관 1층으로 가 잠시 경비와 대화를 나눈 후 화랑관을 나왔다고 한다. 둘은 김준호 관장의 차를 타고 함께 떠났다. 이때가 대략 10시 40분쯤이었다고 강훈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