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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실라 Oct 28. 2024

보이지 않는 살인자 (4)

그리고 정민은 한가지 사실을 더 눈치챘다. 


노아를 대할 때 달라졌던 강훈의 태도. 사건에 관해 질문하면 은근히 엿보였던 곤란함. 거기에 더해 뜬금없이 노아의 추리력까지 띄어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어젯밤 화랑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무언가 단단히 꼬여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경찰은 벌써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정민 기자님?”


난데 없이 헛기침을 하며 강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노아 기자님과 긴히 할 말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전…….”


“혹시 제게 이번 사건에 관한 협조를 구하시고 싶은 거라면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형사님.”


정민이 뭐라 대답하기 전, 노아가 끼어들었다. 


“정민 선배는 예전에 저와 함께 사건을 조사한 경험이 있거든요. 어제 저와 함께 현장에 있기도 했구요. 안 그래도 이번 사건을 정민 선배와 함께 조사해볼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


노아의 말에 정민은 엉거주춤 자리에 머물렀다. 노아가 직접 예전의 사건을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번 사건에 끼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노아가 눈치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억지를 써가며 노아의 참고인 조사에 동석하는 것을 보고 알아챘을 것이다. 지금 노아는 그저 정민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도우려는 것뿐이다. 


그래. 한 번 확인해보자. 


깊게 숨을 내쉬며 정민이 결심을 굳혔다. 


노아에 대한 내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해보자. 이번 사건을 통해 지금까지 피해만 왔던 진실을 마침내 마주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강훈은 의외로 별 말 없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민이 노아의 참고인 조사에 동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부터 이미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을지 몰랐다. 강훈이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하자 노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형사님. 그렇다면 앞으로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필요한 정보들을 경찰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 제가 단독으로 조사해 알아내는 정보들도 모두 형사님과 공유하겠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돌연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신 두 분 모두 철저히 기밀을 유지해주셔야 합니다. 특히 수사진행과정이 함부로 기사화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사건이 종결되기 전까지, 전 이번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쓰지 않겠습니다.”


노아가 대답했다. 맹세라도 할 기세였다. 정민도 기밀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애초에 그녀는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다만 그녀는 노아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접근하고 풀어가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좋습니다.”


한시름 덜었다는 듯 강훈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두 분께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질문했습니다. 이제 두 분 차례입니다. 사건과 관련하여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몇 가지 있습니다.”


노아가 바로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조금 신이 나 보인다고 정민은 생각했다. 


“사실 조금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화랑관의 CCTV 중 하나에 범인의 모습이 찍혔습니까, 형사님?”


“......찍히지 않았습니다.”


끙. 강훈이 신음성을 토했다. 이제껏 표정관리를 잘해오던 강훈이었지만, 답변을 토해낸 지금은 갑자기 몹시 피곤해보였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그 많은 CCTV 중 어디에도, 어디에도 범인의 모습이 찍히지 않았습니다.” 




노아와 정민이 강훈과 헤어진 것은 거의 저녁 8시가 다 됐을 즘이었다. 사건에 관해 강훈에게 이것저것 묻고 얘기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리고 만 것이다. 강훈과 헤어진 두 사람은 간단하게라도 저녁을 때우기 위해 근처 분식집에 들어갔다. 마침 손님이 없어 한적하기 짝이 없는 가게였기에 비밀스러운 토의를 하기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노아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건 정민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민은 강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 때문에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훈의 시신은 오늘 오전 10시경에 발견됐다. 발견된 장소는 서관 1층 비상계단 입구 안쪽이었다. 최초발견자는 다름 아닌 주환과 수민이었다. 두 사람은 전시회 오픈 준비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화랑관을 찾았다고 한다. 서관 1층의 작품들을 둘러보며 이것저것 얘기하다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원래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운동겸 그냥 걸어올라 가자고 주환이 제의했고 수민이 이에 응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옆의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가 그만 싸늘하게 식은 도훈의 주검을 발견한 것이다. 


“저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강도훈 씨가 화랑관에 도착한 것은 어젯밤 오후 7시 15분 쯤입니다.”


강훈이 설명했다. 


“택시를 타고 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화랑관에 도착하자마자 1층 중앙관 로비의 안내데스크 직원들에게 갔다고 하더군요. 안내데스크 직원들은 이세민 씨에게 이미 언질을 받아 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세민 씨에게 강도훈 씨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렸다고 합니다.”


강훈의 말에 따르면 도훈은 어젯밤의 파티에 초청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화랑관 방문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김준호 관장과의 미팅이 약속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훈은 돌발행동을 했다고 한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들에게 물어 하윤이 화랑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도훈은 세민이 로비로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멋대로 2층으로 올라가 하윤에게 시비를 건 것이다. 이때문에 잠시 소란이 벌어졌지만, 다행히 세민이 바로 2층으로 따라 올라와 중재를 했기에 더 큰 소동으로 번지진 않았다. 정민의 기억대로 이때가 약 7시 20분에서 25분 사이라고 했다. 


“강도훈 씨가 혼자서 서관 5층으로 가서 김준호 관장과 만난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단, 독대는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서관 5층의 도서관에는 김준호 관장 뿐 아니라 정훈과 우현도 있었다고 한다. 


부관장인 우현은 그렇다쳐도 화랑관 관계자가 아닌 정훈이 왜 거기 있었을까?


“미팅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파악 중에 있습니다. 김준호 씨는 강도훈 씨가 화랑관에서 본인 전시회를 열길 원했고, 이에 관한 미팅을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정우현 씨는 부관장이다 보니 미팅에 같이 참여했고, 서정훈 씨는 외부 전문가로서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일이 있었다고 했구요. 이세민 씨도 이와 관련해 강도훈 씨의 연락 담당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화랑관에서는 이세민 씨가 강도훈 씨를 전담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서관 5층의 도서관은 입구 안쪽에 CCTV가 하나 있었다. 이 CCTV를 확인한 결과, 도훈이 미팅을 위해 도서관에 들어온 시간은 정확히 오후 7시 28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팅이 끝나고 도훈이 도서관을 떠난 시간은 오후 7시 47분이었다. 20분도 안 되는 짧은 미팅이었던 셈이다. 


“김준호 씨의 말에 의하면 당장 결정할 수 없는 사안들이 있어서 나중에 다시 얘기하는 것으로 일단 미뤘다고 하더군요. 반면 이세민 씨의 말은 좀 달랐습니다. 강도훈 씨는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이세민 씨에게 전화를 했고 짧게 통화를 했습니다.”


세민의 증언에 따르면 도훈은 이야기가 잘 됐고 자신이 화랑관에 전시회를 여는 것이 거의 확실시됐으니 구체적인 논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세민은 동관 1층에서 파티가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감독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 다시 의논하자고 했다고 한다. 도훈은 의외로 쉽게 수락했다. 실제로 세민은 오늘 아침 도훈의 전시회와 관련해 김준호 관장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 도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도훈이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짧게 메시지만 남기고 말았다. 그렇게 세민은 생전 도훈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됐다다. 


“7시 47분. 강도훈 씨가 도서관을 나온 시간입니다. 이후 강도훈 씨의 행적이 묘연합니다. 말 그대로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서관 1층 비상계단에서 시체로 발견된 겁니다.”


도훈의 시신은 현재 국과수에서 부검 중이라고 했다. 빠르면 내일 정도면 사망 추정 시간을 확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대략적인 추정 시간은 이미 나와있었다. 대략 7시 47분에서 오후 10시 사이. 사인은 교살. 끈 같은 것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저항의 흔적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기습을 당했을 뿐 아니라 완력으로 완전히 제압된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힘이 센 건장한 성인 남성이 범인일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여자가 범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강훈이 덧붙였다. 


“피해자가 키가 크긴 했지만 굉장히 마른 체격이었거든요. 몸무게도 50kg을 겨우 넘기는 정도고 근육도 별로 없었구요. 처음에는 너무 말라서 병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웬만한 성인 여성이라면 제압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강훈이 이런 정보를 알려준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직후, 강훈은 노아와 정민에게 경찰이 현재 주시하고 있는 몇 사람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참고인에 불과했던 노아나 정민과는 달리 이들은 현재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다만 이들 중 유력한 용의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이유로 도훈을 죽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기묘한 사건이네요.”


노아와 정민은 떡볶이와 순대를 1인분씩 시켰다. 배가 고팠던 정민은 조금씩 덜어 먹었다. 맛은 그냥 그랬다. 반면 노아는 음식에는 손도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얼굴이 싱글벙글이었다. 화랑관에서 벌어진 사건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CCTV가 도처에 깔린 건물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그런데 어디에서도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찍히지 않은 상황. 대체 누가 어떻게 한 걸까요?”


“특별히 의심가는 사람은 없어?”


정민이 물었다. 


“형사님이 일단 용의선상에 올려놓은 사람들은 알려주셨잖아?”


“전혀요.”


노아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혀 모르겠네요. 전 직관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 당장은 감도 오지 않네요.”


정민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강훈의 설명만 듣자면 이건 불가능한 범죄였다. 


일단 경찰은 외부인의 소행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화랑관은 관내로 들어오는 입구부터 CCTV가 있을 뿐 아니라 화랑관 건물 외벽 앞뒤에도 CCTV가 두 개씩 설치돼 있어 화랑관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화랑관에 특별히 수상한 사람이 침입한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젯밤 화랑관의 유일한 출입구는 중앙관 1층의 회전문 뿐이었고 회전문을 통과하면 안내데스크 직원 둘과 로비의 CCTV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직원은 입을 모아 신원불명의 수상한 외부인 따위는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CCTV 역시 두 직원의 증언을 뒷받침해줬다. 


그렇다면 내부인의 소행이란 뜻이다. 파티 참석자, 혹은 화랑관 직원, 혹은 케이터링 업체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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