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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실라 Oct 14. 2024

보이지 않는 살인자 (2)

화랑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CCTV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랑관에서 말이다. 화랑관은 들어오는 입구부터 시작해서 관내까지 CCTV가 곳곳에 설치돼있었다. 사각지대가 당연히 없지 않겠지만 그 많은 CCTV를 다 피해 몰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범인의 인상착의가 CCTV에 찍혔을 것이다. 만약 범인이 복면을 써서 정체를 가리고 있었다고 해도, 특징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쉽게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정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훈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박지현 씨와도 동석을 하셨다고 했죠?”


“예? 아, 예…….”


“두 분은 원래 아는 사이셨나요?”


“예. 잘 알아요. 지현 이모는…….”


정민은 대략적으로 지현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강훈은 별 반응없이 정민의 말을 다 들은 후,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박지현 씨는 그날 파티에서 취해서 일찍 숙소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화랑관 뒤에 위치한 숙소로요. 맞습니까?”


“예. 맞아요…….”


정민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강훈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현에 대해 질문을 던지니 절로 긴장이 됐다. 혹시라도 말 실수를 해서 지현을 곤란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박지현 씨가 화랑관을 떠난 시간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8시 정도였을 거예요…… 이모랑 헤어지고 라운지로 옮겼는데 그때 8시가 좀 넘었으니까…….”


“박지현 씨가 숙소로 돌아가시는 걸 보시진 않으셨죠?”


“예…….”


정민이 자신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바로 변명하듯 덧붙였다. 


“하지만 분명 숙소로 돌아갔을 거예요. 많이 취해있었으니까요.”


“그렇군요.”


강훈이 모호하게 대답했다. 정민은 CCTV를 확인하면 이모가 숙소로 돌아간 게 확인되지 않나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정민은 강훈이 의례적으로 지현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의도를 가지고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강훈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재훈 씨는 어떻습니까?”


다행히도 강훈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엔 재훈에 관한 질문이었다. 재훈에 관해서는 정민도 좀 더 부담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재훈 씨와도 구면이었나요?”


“예. 전시회 같은 곳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인사를 한 적도 있구요. 하지만 솔직히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날 동석하신 이유가 있나요?”


“노아와 함께였어요. 노아가 제게 같이 앉자고 권했구요. 그러다보니 합석하게 된 거예요.”


“그렇군요.”


강훈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훈 씨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까?”


“예.”


전화를 받던 재훈을 떠올리며 정민이 대답했다. 


“전화가 왔어요. 어떤 전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업무상 전화였던 것 같아요. 심각하게 통화를 하더니 바로 자리를 떴어요. 그 이후에는 보지 못했구요.”


“혹시 이재훈 씨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아뇨.”


정민이 즉답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고는 덧붙였다. 


“이재훈 사장도 라운지 쪽으로 가는 걸 봤어요. 하지만 라운지에는 없었죠. 아마 위쪽에 있는 방 중 하나로 들어갔을 것 같아요. 아니면 일 때문에 저희보다 먼저 화랑관을 떠났거나요.”


“그러고 보니 묻는 걸 잊었군요.”


강훈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서노아 기자님과 정민 기자님은 몇 시에 화랑관을 떠났는지 기억하십니까?”


“8시 50분에서 9시 사이일 거예요.”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민은 저도 모르게 잠시 천장 쪽을 올려다보았다. 


“라운지에서 일어났을 때 8시 45분 정도였던 건 기억나요. 주환 작가님한테 인사를 건네고 화랑관을 나와 노아의 차를 탔죠. 못해도 5분 이상 걸렸을 거예요.”


“그렇군요.”


강훈이 건조한 어조로 대꾸했다. 사실 노아와 정민이 화랑관을 떠난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투였다. 


“그렇다면 이재훈 씨보다 일찍 출발하셨습니다. 이재훈 씨는 9시가 훨씬 넘어서 화랑관을 떠났으니까요.”


“아, 그런 가요?”


정민은 짧게 감탄사를 토했다. 그리고 강훈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강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재훈에 관해 정민에게 무언가를 더 얘기해줄 것 같아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민에게도 뭔가를 더 물어볼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훈은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카페를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순간 정민은 강훈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죄송한데요, 형사님.”


정민이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누구를 기다리고 계신가요?”


“예?”


처음으로 강훈이 동요를 보였다. 그는 실례했다는 듯 정민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기자님. 생각을 정리하느라 미처 기자님께 말씀을 못드렸네요. 예, 여기서 또 다른 분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6시에요.”


“그렇군요.”


6시. 대략 20분 후였다. 정민이 물었다. 


“누굴 만나기로 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분도 사건 관계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강훈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기자님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다름 아니라 서노아 기자님을 여기서 보기로 했거든요.”


“노아를요?”


정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노아 기자님도 사건의 참고인이니까요. 그리고…….”


피식. 강훈이 미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노아 기자님의 명성도 많이 들어서…… 여러가지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그래. 맞아. 노아가 있었지. 


정민은 갑자기 두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강훈은 ‘명성’이란 단어로 애매모호하게 표현했지만 정민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 스스로가 목격자였고 경험자였다. 노아는 단순히 범죄 사건을 좋아해서 쫓아다니는 괴짜가 아니었다. 대중에게 각인된 대로 단순 추리력이 좀 뛰어난 기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아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정민은 확신했다. 강훈의 애매모호한 표현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바쁘실텐데 오늘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민이 눈을 빛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강훈이 감사를 표했다. 


“나중에 또 질문이 있으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협조 감사합니다, 정민 기자님.”


강훈은 거의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정민이 반색하고 작별인사를 할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민은 강훈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강훈 형사님.”


강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민이 말했다. 


“혹시 노아와 만나시는 자리에 저도 같이 있어도 될까요?”


“예?”


강훈이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정민은 급히 설명했다. 


“어제 화랑관에서 저와 노아는 계속 같이 있었잖아요? 그럼 저희 둘이 함께 증언을 하면 수사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노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어젯밤 일이 더 잘 기억이 나지 않을까 해서…….”


구차한 변명이었다. 정민도 형사들이 기본적으로 참고인들과 개별적으로 면담을 진행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금 이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노아에 대한 어떤 사실을 말이다. 


“그건…….”


강훈이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잘 거절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그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강훈이 보여준 표정변화 중 가장 극적인 변화였다. 정민은 그가 방금 내심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마음을 바꾼 것을 눈치챘다. 


“......기자님이 괜찮으시다면…….”


크게 선심 쓴다는 듯 강훈이 말했다. 


“물론 서노아 기자님의 의견도 들어봐야겠지만요.”


“물론이죠.”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정민이었다. 정민이 아는 노아라면 정민과 함께 참고인 조사를 받는 것을 거부할 리 없었다.  


강훈과 정민의 대화가 다시 끊겼다. 강훈은 다시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정민은 정민대로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사실 지금 정민이 하려고 하는 일은 평소의 정민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노아는 그녀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였다. 계속해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 그녀를 찌르는 가시 같았다. 정민 입장에서는 본인을 위해서라도 노아와 거리를 두는 게 좋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것과 정 반대되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확인하고 싶다. 


그것이 억지를 써가면서까지 여기에 남은 정민의 이유였다. 


과거의 사건. 분명 그 사건이 노아와 정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여기서 정민은 노아가 사건과 관련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았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의심이 아니라 어째서인지 거의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를 지금까지 멀리해왔다. 그런데 사실 정민은 노아는 물론 그 누구에게서도 자신의 의심을 확인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번이 기회일 수도 있다. 노아에게 느끼는 이 불편함, 트라우마나 다름 없는 과거의 사건. 그 근본적인 원인을 확인하고 청산할 기회 말이다. 


딸랑. 


카페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마침 거의 6시가 다 된 참이었다. 정민과 강훈은 반사적으로 카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어리둥절한 얼굴의 노아가 서있었다. 노아 역시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았다. 


“선배?”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드러내며 노아가 정민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전 형사님과 만나러…….”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 노아는 짧게 감탄사를 통하고 이번엔 강훈 쪽을 봤다. 강훈이 바로 자신을 불러낸 형사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아에게 악수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서노아 기자님. 고양경찰서 강력1팀 팀장 이강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형사님.”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노아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강훈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듯 고개까지 숙여보였다. 


“당연히 와야죠. 저도 어젯밤 제가 있던 장소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봐주십시오. 제가 아는 한 전부 답변하겠습니다.”


노아의 엄숙한 말투에 강훈은 옅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살인사건을 대하는 노아의 진지함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두 남자는 자리에 앉았다. 앉으면서 노아는 조심스럽게 정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두 분이 아직 대화중이셨나보군요. 제가 잠시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강훈이 그럴 필요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정민 기자님과는 면담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어젯밤 두 분이 계속 함께 계셨던 걸로 압니다. 그래서 특별히 두 분의 증언을 같이 들어보려고 합니다. 노아 기자님만 괜찮으시다면요.”


“저야 물론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안심이라는듯 노아가 미소지었다. 


“형사님께서 편하신대로 하십시오. 저보다는 형사님의 의견이 중요하니까요.”


“음…….”


사뭇 만족스럽다는 듯 강훈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은 한눈에 강훈이 노아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민을 상대로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강훈이 노아와는 아직 몇 마디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꽤나 풀어져 있었다. 정민은 강훈이 무언가를 노리고 일부러 저렇게 노아에게 호감이 있는 척 하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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