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실라 Oct 07. 2024

보이지 않는 살인자 (1)

정민이 형사를 만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양해를 구하고 일찍 퇴근한 정민은 회사 근처 카페로 갔다. 형사는 그곳에서 정민을 이미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중키에 강인한 인상을 가진 40대 초반의 남자로 이름은 이강훈이라고 했다. 고양경찰서 강력1팀의 팀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는데 강훈의 직위를 들은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팀장급 위치의 강력계 형사가 정민을 만나기 위해 고양에서 서울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불안한 예감이 든 것이다. 어젯밤 화랑관에서 일어난 사건과 자신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살인사건. 


이 단어가 하루 종일 정민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통화 중 강훈은 정확히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오후에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고 통보했을 뿐이었다. 충격을 받은 정민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급하게 지현에게 연락했다. 화랑관에서 지내고 있는 지현이라면 뭐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 것이다. 그러나 지현은 전화를 받지 못했다. 대신 짧게 메시지가 왔다. 상황이 좀 정리되면 자신이 다시 연락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마 지현도 경찰에게 조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는 것일 것이다. 화랑관에서 거주 중인 지현이니 모르긴 몰라도 더 큰 곤혹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정민도 알겠다고 답신을 보내고 더 이상 지현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이후 정민은 인터넷을 검색해 기사를 찾아보았다. 오후 3시쯤에 화랑관에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한 급보가 뜨긴 했다. 하지만 피해자나 범인 등 사건 관련 주요 정보는 전혀 나와있지 않았다. 결국 정민은 간밤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강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민이 긴장한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인지 강훈이 부드러운 투로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기자님을 만나자고 했습니다. 취조 같은 게 아니니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정민이 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강훈은 간단한 질문들로 시작했다. 어제 왜 화랑관에 갔는지, 몇 시에 도착했는지, 주환과는 어떤 관계인지 등등이었다. 정민은 최대한 간략하게 모든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강훈이 던지는 질문들 중 민감하다고 할 만한 질문은 없었기 때문에 대답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강훈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으며 정민의 생각도 조금씩 정리가 돼갔다. 그러자 긴장도 풀렸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와는 무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왜 강력팀 팀장이 정민을 만나러 온 것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어젯밤 화랑관의 파티에서 살인사건의 징후 비슷한 것조차 본 기억이 없었다. 적어도 정민의 생각엔 어제 그녀가 보고 겪은 일 중 살인사건과 관련될 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바로 그때, 강훈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강도훈이란 분을 아십니까?”


“강도훈 작가님이요?”


정민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예. 잘 알죠. 아니,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명한 분이에요. 유명한 화가시죠…….”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강훈이 대답했다. 순간 정민은 강훈의 눈빛이 조금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어제 기자님이 강도훈 씨를 만나셨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까?”


 “예, 맞아요.”


“어디서 보셨나요?”


“화랑관…… 2층에서요. 중앙관 2층에서였는데…….”


“그때가 몇시쯤이었죠?”


“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정민이 말을 더듬었다. 


“원래 일행과 같이 식사중이었어요. 밥을 다 먹고 잡담을 나누다가 기사 주제로 뭔가 생각나서…… 다시 2층으로 갔어요. 마주환 작가님 작품들을 몇 개 다시 보고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사실 노아가 불편해서 자리를 피했던 거지만, 그 사실을 굳이 경찰에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정민이 말을 계속했다. 


“그때 휴대폰을 보고 시간을 확인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7시가 넘었던 것 같아요. 동관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중앙관으로 갔으니까…… 아마 7시 20분쯤이지 않았을까요?”


“얼추 맞는군요.”


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그곳에서 강도훈 씨만 보셨나요?”


“아뇨.”


정민은 그제야 강훈이 다른 사람의 진술과 자신의 진술을 크로스체크 중임을 깨달았다. 


“중앙관에 이하윤 작가님이 먼저 와계셨어요. 아실지 모르지만 이하윤 작가님도 유명한 화가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훈 작가님이 오셨구요. 가벼운 실랑이가 있을 뻔 했는데…….”


“실랑이요?”


“이하윤 작가님과 강도훈 작가님은 라이벌이세요. 경쟁관계다 보니 마주칠 때마다 마찰이 좀 있죠.”


정민이 얼른 설명했다. 


“보통 강도훈 작가님이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이하윤 작가님은 그냥 받아넘기는 편이에요. 어제도 그랬죠.”


“그럼 시비가 크게 일어나지는 않았나요?”


“네. 강도훈 작가님이 이하윤 작가님쪽으로 다가와서 잠시 걱정했는데, 화랑관의 기획팀장님이 오셨어요.”


“아. 이세민 기획팀장님.”


강훈도 아는 척을 했다. 


“그분은 어느 쪽에서 나타나셨나요?”


“예? 어느 쪽이라뇨?”


“기자님은 동관 쪽에서 오셨다고 했죠? 이세민 씨는 어느 쪽에서 왔었나요?”


“아…… 기획팀장님도 동관 쪽에서 왔어요.”


질문을 이해한 정민이 대답했다. 


“급하게 뛰어오셨죠. 제 생각에는 강도훈 작가님의 도착 소식을 듣고 온 게 아닌가 싶어요. 강도훈 작가님에게 화랑관 관장님이 찾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거든요.”


“그렇군요.”


강훈이 흥미롭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찾는지는 들으셨나요?”


“아뇨. 그렇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그저 도서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고만…….”


“서관 5층에 있는 도서관에서요. 알겠습니다.”


강훈이 정민의 말을 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강도훈 씨는 그대로 도서관으로 갔나요?”


“아마 그럴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서관 쪽으로 갔거든요. 그 이후는 못봤지만…….”


“강도훈 씨가 사라지고 이하윤 씨는 뭘 했나요?”


“그냥…… 중앙관에 남았어요. 전시된 작품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세민 씨는요?”


“동관쪽으로 갔어요. 연회장으로 다시 간 걸 거예요. 아마 그분이 어제 파티를 전체적으로 총괄하고 있었을 테니까…….”


“기자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전…….”


정민이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필요한 것도 다 본 것 같고 해서……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어요. 저와 같이 있던 사람들이 아직 홀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다시 테이블에 합류했죠.”


“그분들 성함을 제게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정민은 지현과 재훈, 노아의 이름을 댔다. 정민이 노아의 이름을 입에 담자 강훈의 두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강훈은 딱히 내색하지 않았지만, 정민은 강훈이 노아에 대해 알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민의 짐작은 옳았다. 강훈은 노아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고 바로 드러냈다. 


“서노아 기자님과 동석하셨군요?”


“예. 맞아요.”


“혹시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대학 동문이에요. 제 후배였죠…….”


“그럼 평소에도 자주 연락하시던 사이였나요?”


“아뇨.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어요.”


정민이 설명했다. 


“오랜만에 만났더니 너무 반갑다며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그러자고 했구요.”


“그렇군요. 혹시 이후에도 두 분이 계속 같이 계셨나요?”


이미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 정민은 짧게 대답했다. 예. 


“화랑관을 떠날 때도 같이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정민은 다시 한 번 짧게 대답했다. 강훈이 갑자기 노아에 대해 캐물어서 마음 한편이 다시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민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어젯밤 화랑관에서 그녀의 행적을 확인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람 중 하나가 노아였다. 마찬가지로 노아의 행적을 확인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람은 바로 정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알리바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인이었던 것이다. 


강훈의 질문이 멈췄다. 그는 정민의 대답을 곱씹으며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듯했다. 한숨 돌린 정민은 문득 자신이 아직 사건의 피해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형사님.”


“예, 기자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정민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강훈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마든지 물어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안심한 정민이 말을 이었다. 


“피해자는…… 누구인가요?”


“아.”


정민이 조심스러워한 이유를 알겠다는 듯 강훈이 짧게 감탄사를 토했다. 그러고는 이름을 하나 입에 올렸다. 그 이름을 들은 정민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강도훈 씨입니다.”


“예?”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정민은 당황했다. 도훈이? 화랑관에서? 왜? 정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미술계에서 도훈에게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사실 굉장히 많았다. 그는 비호감의 극치를 달리는, 파탄난 성격의 소유자였으니까. 적어도 정민이 아는 모든 관계자들은 도훈을 싫어했고 그와 일하기도 싫어했다. 


그렇지만 죽일 정도로 도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당장은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정민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어제 화랑관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하윤. 도훈을 제치고 1인자의 자리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도훈이 쏟아내는 모든 증오와 비난의 대상이 돼버린 하윤이었다. 도훈이 하윤을 미워하는 것 이상으로 하윤이 도훈을 미워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하윤은 전혀 도훈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기자님이 생각하시기엔 강도훈 씨 주변에 그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었나요?”


정민이 동요하는 틈을 파고들어 강훈이 예리한 질문을 날렸다. 


“그, 글쎄요.”


정민은 급히 하윤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고 대답했다. 


“강도훈 작가님을 개인적으로 잘 알진 못해서요. 하지만…….”


“하지만?”


“굉장히 예민하신 성격을 가지신 분이라…….”


예전 도훈의 전시회에 취재차 갔다가 봉변을 당했던 것을 떠올리며 정민이 중얼거렸다. 그때 도훈은 정민이 예전 기사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코멘트를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그녀에게 비아냥거리며 모욕을 주었다. 이후 정민은 가급적이면 도훈을 피해다니게 됐다. 


“그렇지만 역시 개인적으로 잘 알진 못해서…… 다른 분들과의 관계는 잘 모르겠네요.”


정민이 얼버무렸다. 강훈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묻지 않고 넘어갔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도훈의 인간관계에 대해 비슷한 진술로 일관한 걸지도 몰랐다. 


강훈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정민은 최대한 조용히 주문한 커피를 마셨다. 언제까지 이 자리를 지켜야 할까? 다 끝났으면 이만 일어나도 괜찮을지 정민은 강훈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도훈이 죽었다면 용의자는 누구일까? 왜 도훈을 죽였을까? 어떻게 죽였을까? 언제 죽였을까? 적어도 어젯밤의 파티가 끝날 때까지 살인사건이 일어난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파티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훈이 어젯밤 화랑관에 나타난 사실조차 모르지 않나? 도훈은 사람들 앞에서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강훈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구나. 정민은 겨우 깨달았다. 그녀는 화랑관에서 도훈의 모습을 본 몇 안 되는 목격자인 것이다. 


동시에 정민은 또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사건은 사실 굉장히 간단한 사건 아닌가? 


이전 10화 화랑관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