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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실라 Sep 23. 2024

화랑관 (9)

지현과 재훈은 그러고도 한참을 떠들며 주거니 받거니를 계속했다. 노아는 곁에서 계속 웃으며 장단을 맞췄다. 반면 정민은 입을 다문채 시간이 흘러 이 자리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사실 정민은 지현과 재훈의 관심을 차지할만한 거물들이 연회장에 나타나 다시 자리를 떠날 명분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를 들면 하윤 혹은 도훈이라도. 하지만 두 사람은 홀은 물론 연회장 쪽에 그림자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도 하윤과 도훈이 지금 화랑관 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한 눈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윤이나 도훈쯤 되는 유명인사라면 직접 연회장까지 오지 않더라도 지금쯤 파티 참석자들 사이에 이야기가 퍼지는 것이 정상일 텐데 말이다. 누군가가 두 사람이 화랑관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만 했다면 분명. 


“이런. 실례합니다.”


정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드디어 불편한 동석이 끝날 만한 계기가 생겼다. 재훈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업무 관련인지 재훈은 갑자기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뭐라 속삭이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앉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재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을 떠났다. 동관 1층 홀의 오른편에는 출입구가 하나 있었는데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편히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넓은 라운지가 있었다. 미술 전시관 라운지 답게 아름다운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고 라운지 가운데에는 대형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잡고 있어서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즉석연주도 가능했다. 


라운지의 위쪽에는 길게 복도가 나있었다. 복도의 양쪽에는 사적인 미팅이 가능한 방들이 몇 개 있었다. 각 방은 소규모의 프라이빗한 미팅을 위한 공간으로, 방음이 잘 되어 있어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구조였다. 정민은 재훈이 이 방들 중 하나로 들어가지 않을까 추측했다. 업무 관련 통화를 해야 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래도 재훈 사장님은 좀 걸릴 것 같네요.”


노아나 지현이 뭐라 말하기 전, 정민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사실 재훈이 통화를 끝내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정민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우리도 슬슬 일어날까요? 라운지 쪽으로 가봐도 좋을 것 같고…….”


“그래. 그래도 좋지.”


지현이 동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묘한 웃음을 지으며 노아와 정민 두 사람을 한 번씩 슬쩍 보더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 부분을 누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근데 나 너무 마신 것 같아. 갑자기 살짝 머리가 아프려고 그러네?”


“괜찮아요, 이모?”


지현의 말에 놀란 정민이 지현의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안내 데스크 가서 약이라도 받아올까요? 아니면 좀 쉬는 편이…….”


“응. 좀 쉬는 게 좋겠어.”


지현이 기다렸다는 듯 정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오늘 밤은 좀 무리한 것 같아. 난 먼저 숙소에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어.”


“이모?”


지현이 이렇게 빨리 파티를 떠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정민은 당황했다. 지현까지 떠나버리면 노아와 단둘이 남아버리게 되지 않는가. 


“잠깐만요 이모. 그럼 제가 숙소까지 바래다드릴게요.”


“아냐. 그럴 필요 전혀 없어!”


씩씩하게 지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도무지 방금까지 취기가 올라 머리가 아프다고 한 사람 같지 않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간만에 파티잖아. 지현이 넌 꼭 끝까지 즐기다 가.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노아 기자님.”


정민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노아 쪽을 돌아보며 지현이 말을 계속했다. 


“저희 정민이 잘 부탁해요. 오랜만에 만난 동문인데, 마음껏 회포 푸시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작가님.”


노아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지현에게 대답했다. 노아의 대답은 몹시 지현의 마음에 든듯했다. 지현은 흡족한 눈빛으로 잠시 노아를 쳐다보다가 다시 정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먼저 가서 쉴게. 정민이 너도 조심히 가고. 내일 내가 다시 연락할게.”


“이모. 그럼 제가 문앞까지라도…….”


“아냐. 그럴 필요 전혀 없어. 나 여기서 먹고 자고 하고 있잖아. 배웅이 왜 필요하겠니.”


낄낄대며 손을 흔들어보인 다음 지현도 홀을 떠나갔다. 재훈이 간 방향과 반대였다. 아마 홀을 통과해 연회장쪽으로 간 다음 중앙관 1층으로 나가서 화랑관 뒤편에 있는 숙소로 돌아갈 것이다. 번거롭지만 작업실과 숙소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우린 라운지 쪽으로 갈까요?”


지현이 홀을 나가고 더 이상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노아가 천연덕스럽게 정민에게 물었다. 정민은 순간 거절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우물쭈물하다가 확실히 거절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정민은 아무 음료나 하나 더 집어들고 노아와 함께 라운지 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가다 말고 정민이 슬쩍 뒤를 돌아보니 서빙을 담당하고 있던 직원이 벌써 그들의 빈자리를 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라운지에는 벌써 여러 사람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라운지의 한쪽 구석에는 작은 디저트 바가 준비돼 있었고 음료를 서빙하는 직원들도 있었기 때문에 후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굳이 연회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어 보였다. 시간은 밤 8시가 이미 넘어있었다. 전시회 관람도 식사도 다들 끝난지 오래였다. 아마 어떤 참석자들은 이미 화랑관을 떠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라운지에는 여전히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다들 이 좋은 밤을 이렇게 보내는 게 아쉬워 좀 더 소파 위에 몸을 누인채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모양들이었다. 만약 노아와 단둘이 남아있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정민도 그들처럼 푹신한 소파와 달콤한 디저트가 안겨주는 안락함을 만끽하며 귀가 시간을 최대한 미뤘을지도 몰랐다. 


이런 정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아는 눈치 없이 계속 정민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새삼스러웠지만 정민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눈치가 빠른 노아가 정민이 자신을 불편해하는 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노아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마냥 편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하필 대화 주제도 기가막히게 잡아서 정민도 쉽사리 그의 말을 끊지 못하고 계속 호응을 해줘야 했다. 


정민의 기억에 의하면 오늘의 파티는 오후 9시쯤에 끝날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참석자들은 더 머물고 싶어도 화랑관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9시는 아직도 40분 이상 남아있었다. 정민은 그때까지 계속 노아와 함께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정민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노아를 떼어놓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주환이 보였다. 주환은 수민과 함께였다. 그리고 수민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쉴 새 없이 인사를 받고 있었다. 주환은 조금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즐거워보였다. 전시회의 시작이 성공적이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듯했다. 정민은 자신도 저 사람들 무리에 껴서 다시 주환에게 뭐라 말을 걸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정민이 주환 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노아가 말했다. 


“대단한 분이시네요, 주환 작가님은. 뉴욕에서 소개 받았을 때는 실감이 나지는 않았는데, 오늘 여기 오니까 유명한 화가라는 사실이 확 와닿네요. 수민 씨도 그렇구요.”


“저 수민이란 분이랑도 아는 사이야?”


정민이 무심코 되물었다.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형이랑 잘 아는 사이에요. 형네 교회를 다니거든요. 주환 작가님도 뉴욕에 계시는 동안 형네 교회를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두 사람 다 형한테서 소개 받았어요.”


“......그래?”


그러고 보니 노아는 예전에 친형이 신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분이 지금은 뉴욕에서 목회자가 된 걸까. 그렇지만 정민이 예외라고 느낀 사실은 노아의 형에 관한 정보가 아니었다. 


“주환 작가님이 교회를 다니셨다고? 무교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래요?”


재미있다는 듯 노아가 반문했다. 


“근데 저도 어렴풋이 그렇게 느끼고 있긴 했어요. 신앙이 있어서 교회를 다닌다는 느낌보다는…… 아무래도 수민 씨한테 관심이 좀 있으신 것 같더라구요.”


“아…….”


그건 자신도 그렇게 느꼈지. 정민은 바로 납득했다. 정민은 다시 주환과 수민 쪽을 바라보았다. 친밀해보였지만, 농담으로라도 연인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환에게는 정말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수민은 주환 쪽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정민이 노아에게 물었다. 


“정훈 교수님은 어디 계셔? 아까부터 안 보이시던데.”


“그러게요.”


노아도 고개를 으쓱해보였다. 전혀 모른다는 투였다. 


“저한테도 아까 짧게 메시지 하나만 왔어요. 볼 일이 있으니까 먼저 돌아가라구요.”


“같이 왔었어?”


“예. 제가 차로 모시고 왔어요. 선배는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난 택시로…….”


“그래요?”


노아가 한층 더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제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냐. 늦었는데…….”


“늦었으니까요. 밤 늦게 위험하잖아요. 제가 직접 데려다줘야 저도 안심이 될 것 같아요.”


“.......”


정민은 똑 부러지게 거절하고 싶었지만 또 망설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아는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이후로도 노아는 계속 떠들었고 정민은 계속 대답을 해주었다. 정민은 이러다 정말 스리슬쩍 노아와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파티 참석자 중 한 사람이 그랜드 피아노 쪽으로 다가가더니 뜬금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고즈넉한 라운지의 분위기와 더 없이 잘 어울리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클래식 연주였다. 연주자는 젊은 여자였는데 마치 연주회를 하러 온 피아니스트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자의 연주는 더 없이 훌륭했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멈추고 여자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연주를 감상했다. 예술적 감성이 없는 노아조차 감탄어린 눈으로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저분 피아니스트신 것 같은데…… 아마추어 실력이 아니지 않나요?”


“그래.”


정민도 동의했다. 


“피아니스트 같은데…… 화랑관에서 연주하라고 초청한 건가?”


그건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민은 일단 물음을 던졌다. 노아는 별다른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부정의 의미일 거라고 정민은 생각했다. 문득 뒤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피아니스트 한서연’이라고 속삭이는 게 들렸다. 역시 피아니스트였구나.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서연의 연주를 감상했다. 서연의 연주가 어찌나 감미로운지 노아 때문에 내내 불안했던 정민의 마음이 다 위로받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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