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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실라 Sep 16. 2024

화랑관 (8)

실제로 남자는 특별했다. 정민은 남자를 아주 잘 알았다. 남자의 이름은 이하윤. 한국 미술계의 신성으로 현재 젊은 화가들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천재들이 득실거리는 미술계에서도 독보적인 천재라고 불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연예인 뺨치는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에게 미술계를 넘어 대중적인 인기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를 지지하는 팬층이 웬만한 아이돌 팬덤 못지 않다는 이야기를 정민은 들은 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윤과는 구면이었으므로 정민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하윤은 조용히 인사를 받았다. 그는 과묵한 성격으로 필요이상으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하윤 작가님도 파티에 초대받으신지 몰랐네요. 주환 작가님 작품들을 보러 오신 건가요?”


“예.”


하윤이 공손하게, 하지만 짧게 대답했다. 정민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 역시 스몰 토크를 즐기지 않았지만 하윤은 정도가 좀 심했다. 문화부 기자들이 뽑는 가장 인터뷰하기 어려운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그렇군요. 식사는 하셨나요?”


“아니요.”


다행히 하윤이 이번엔 말을 덧붙였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아.”


정민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계속 주환 작가님 작품을 감상하고 계셨던 건가요?”


“예.”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셨나요?”


“......다 좋은 것 같아요, 주환 형 작품은.”


잠시 생각한 끝에 하윤이 대답했다. 거기서 두 사람의 대화도 끊겼다. 정민 역시 더 이상 뭐라 말을 붙일 건덕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같이 있어봐야 어색함만 더 커질 것 같아 대충 마무리하고 서관으로 넘어갈까 생각했다.


그때였다.


“이게 누구야. 이하윤!”


까마귀 울음소리처럼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전시관 내에 울려퍼졌다. 정민과 하윤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장례식이라도 온 것처럼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하나 서있었다.


정민은 흠칫하고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윤만큼이나 그녀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미술계에서 그녀가 가장 기피하는 인사 중 하나였다. 정민 뿐이 아니었다. 한국 미술계 관계자들 중 이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강도훈.


이제 30대 초반의 젊은 화가였다. 180 초반대의 큰 키의 남자였지만 핼쑥해보일 정도로 빼빼마른 몸매의 소유자기도 했다. 그는 길쭉한 말상에 정돈되지 않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고 제대로 면도를 하지 않아 콧수염과 턱수염도 옅게 나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그의 두 눈은 가늘고 길었는데 굶주린 들개 같은 사나움과 공격성을 띤 채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윤을 보고 있는 지금도 그랬다. 도훈은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마치 죽일 듯이 하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정민이 도훈의 눈빛을 받아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윤은 멍하니 도훈을 보다가 느릿느릿하게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도훈 선배님.”


“안녕하지. 네 덕분에.”


“무슨 말씀이신가요?”


“잘 알면서 왜 물어?”


비꼬는 투로 인사를 받고 도훈이 하윤 쪽으로 척척 걸어왔다. 정민은 아예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민은 침을 삼켰다. 하필 오늘 화랑관에서 하윤과 도훈이 마주치는 사고가 일어날 줄 몰랐다.


도훈이 하윤을 거의 증오 수준으로 싫어한다는 것은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정민에게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갈 차세대 화가 세 사람만 뽑으라고 한다면 정민은 하윤, 도훈, 그리고 주환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세 사람 중 누가 가장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정민은 망설임없이 하윤을 뽑을 것이다. 다음은 도훈, 그리고 마지막이 주환이다.


그랬다. 도훈도 도훈의 그림도 좋아하지 않는 정민이었지만 도훈의 재능과 실력만은 인정했다. 도훈도 천재였다. 비운의 천재였다. 하필 하윤과 같은 세대에 태어나 평생 이인자의 낙인이 찍혀 버린 천재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같은 관계라고 해야할까.


물론 많은 부분 다르긴 했다. 대중적으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하윤과 달리 도훈은 일반 대중 뿐 아니라 미술계에서도 소수의 마니아층을 제외하면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는 그의 파탄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도훈의 그림이 문제였다. 도훈은 정민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부정적이고 음험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열등감과 자기혐오의 덩어리였고, 자신의 그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발산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도훈의 그림들은 그의 부정적인 영향을 그대로 흡수한 결과물들이었다. 도훈의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그의 번뜩이는 천재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지만, 어째서인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두운 무언가가 있었다. 도훈은 마치 보는 사람의 기분마저 망쳐놓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 그의 그림들은 언제나 표현하기 어려운 찝찝함과 불길함을 남겼다. 정민이 도훈의 그림을 인정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리고 도훈은 하윤을 볼 때마다 그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대놓고 폭발시켰다. 일인자를 향한 이인자의 질시와 적의. 하윤이 아니었다면 아마 대부분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아니면 똑같은 감정의 폭발로 맞받아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나마 하윤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도훈의 적대적인 시선과 말들을 다 흘려보내버렸기에 아슬아슬하게나마 두 사람의 관계가 미술계 선후배로 유지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중앙관 2층에는 하윤과 도훈. 두 사람 뿐이었다. 아니, 정민이 있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전혀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없는 사람이나 다름 없었다. 도훈의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정민은 초조해져갔다. 하윤도 전혀 피할 기색이 없었다. 이대로가다간 두 사람이 주먹다툼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너도 들었으니까 오늘 화랑관에 온 거 아닌가? 역시 신경 쓰이겠지? 안 쓰일 리가 없지. 너 같이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이…….”


“강도훈 작가님!”


다행히 타이밍 좋게 끼어드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세민이었다. 동관에서부터 중앙관 2층으로 뛰어들어오는 그는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마 그 역시 정민처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모양이었다.


세민이 부르는 소리에 도훈도 걸음을 멈췄다. 짜증 어린 표정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서서 세민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긴 했다. 정민은 조금 의외였다. 도훈이 악명 높은 이유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그의 지랄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도훈이 세민 때문에 자제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윤에게 쏟아부으려고 했던 폭언마저 멈추고 말이다.


“관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도훈의 옆에 바짝 붙은 세민은 하윤과 정민에게 빠르게 눈인사만 건네고 입을 열었다.


“예전에 요청하신 건에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지금 보자고 하시더군요.”


“알겠습니다.”


도훈이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세민이 아닌 하윤을 보고 있었다. 문득 정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했다. 하윤을 보던 도훈이 돌연 씨익 웃으며 눈을 빛낸 것이다. 그건 승리의 도취처럼 보이는 득의양양함이었다. 하지만 정민은 도훈이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정민은 흘끗 하윤의 표정도 살폈다. 하윤은 여전히 멍해보였다. 도훈이 자신을 보고 웃던 말던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관장님은 어디 계신가요?”


“서관 5층 도서관입니다.”


“알겠습니다. 기획팀장님도 같이 가시나요?”


“아닙니다. 관장님께서 도훈 작가님만 따로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끝나고 혹시 필요하시면 연락 주십시오. 전 계속 연회장에 있을 예정이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볼 일 없다는 듯 도훈이 서관 쪽으로 척척 걸어가더니 사라졌다. 겨우 한숨 돌렸다는 듯 세민은 크게 숨을 한 번 내쉰 다음, 정민과 하윤 쪽으로 걸어왔다. 정민은 세민이 무슨 얘기라도 꺼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세민은 뭔가 죄송스럽다는 듯 하윤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정민을 지나쳐 동관 쪽으로 사라졌다.


도훈과 세민이 떠나자 하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그림 관람을 계속했다. 몽롱한 그의 눈빛은 정민의 존재를 아예 잊은 것 같았다. 정민도 뭔가 맥이 빠져 하윤을 내버려두고 동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연회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시간이 좀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지현도 혼자 남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완전 잘못된 생각이었다. 지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노아, 재훈과 함께였다. 식사는 진작에 끝났는지 테이블의 접시들은 다 치워져 있었고 세 사람은 각자의 잔에 음료만 채워넣은 상태였다. 지현은 꽤 취한 것 같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와인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재훈도 조금 취한 것처럼 보였다. 반면 노아는 말짱했다. 정민이 기억하기로 노아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은 떠들썩 했다. 정민이 멀리서 관찰하니 재훈과 지현이 주로 떠들고 있었고 두 사람의 주정을 노아가 싹싹하게 다 받아주고 있었다. 정민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물 한 컵만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정민을 바로 발견한 노아가 밝게 웃으며 정민을 반겨줬다.


“돌아왔군요, 선배! 잘 보고 왔어요?”


 “응. 잘 봤어.”


대충 얼버무리며 정민이 지현 쪽을 보았다. 지현이 킬킬 웃으며 갑자기 오른손을 뻗어 정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정민은 조금 놀랐다.


“이모!”


“우리 정민이! 우리 예쁜 정민이!”


“이모! 취했어요?”


“응응. 이모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정민이 후배분이 정말 너무 좋은 분이더라고! 이 이모한테 좀 진작 소개시켜주지 그랬어!”


“이모!”


당황한 정민의 얼굴도 붉게 상기됐다. 혹시라도 지현이 쓸데 없는 말을 할까 걱정됐다. 다행히 지현은 신이 나서 의미 없는 말을 떠들 뿐, 이상한 말을 하진 않았다. 잔뜩 텐션이 오른 지현을 보며 재훈은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 지현 작가님이 이렇게 재미있는 분이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다음번에도 같이 한잔 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지현이 바로 받았다.


“이렇게 넷이서 따로 모이죠? 그때는 노아 기자님이랑 정민이도 한잔씩 하구요.”


“언제든지요. 불러만 주세요.”


노아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화답했다. 반면 정민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오늘 밤의 만남이 노아와의 끝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이번 화랑관에서의 만남 때문에 일부러 끊어놓았던 인연이 되살아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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