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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실라 Sep 09. 2024

화랑관 (7)

“그런데 선배.”


정민이 들고 있는 그릇에 눈길을 주며 노아가 말했다. 


“자리는 잡았어요? 혹시 일행이 있나요?”


“아…….”


정민은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지현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지현은 수진과 이야기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밝게 웃으며 수진의 이야기에 맞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지현의 주위는 김준호 관장과 정훈, 그리고 우현이 지키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세 남자는 마치 지현이 수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방벽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지현은 쉽사리 정민에게로 돌아오지 못할 듯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노아와 같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건 좀…….


노아가 무엇을 권유할지 정민은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민은 성격상 다른 사람에게 거절이나 싫은 말을 잘 하진 못했다. 당연히 노아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거절해야겠다고 정민은 마음을 굳혔다. 


그때였다. 정민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노아와 정민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거 이정민 기자님 아니십니까!”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에 정민은 옆을 보았다. 이재훈 사장이 서있었다. 정민은 당황했다. 설마 이 타이밍에 재훈이 나타나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할지 몰랐다. 재훈은 몹시 반가워하는 것 같았지만, 정민은 사실 재훈과 그 정도로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재훈은 마흔이 넘었지만 상당한 동안인데다 남자치고는 굉장히 하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그는 키도 컸고 이목구비가 굵고 뚜렷해서 마치 배우 같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다만 정민은 개인적으로 재훈이 조금 느끼한 상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가 워낙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재훈과 이야기를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정민은 재훈이라는 사람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재훈의 취미 역시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한 일종의 허세가 아닐까 생각했다. 


당황한 정민은 제대로 인사도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재훈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엔 노아 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서노아 기자님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이거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


“네?”


놀란 정민이 되물었다. 


“아시는 사이세요? 노아랑?”


“말도 놓으신 거 보니 잘 아시는 사이신가 보군요.”


재훈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서노아 기자님과는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 명성은 익히 알고 있지요.”


“명성이라니. 과찬이십니다, 사장님.”


노아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아. 정민도 재훈이 말하는 바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사실 노아는 유명인이었다. 


범죄사건 전문 기자 서노아. 


대외적으로 알려진 노아의 타이틀이었다. 노아는 어느 특정 신문사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기자로 흉악한 범죄사건이나 미궁에 빠진 미제사건만 취급했다.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범죄 사건들을 취재하고 기사를 썼는데 정확한 분석과 흥미로운 설명으로 인기가 많았다. 처음에는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마니아층에서만 인기가 있었지만 전국민의 관심을 산 몇 가지 사건과 관련하여 쓴 기사가 계기가 되어 그의 블로그 팔로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슈퍼 블로거가 된 노아는 방송에도 출연하게 됐는데 그중 그가 출연했던 추리퀴즈예능이 많은 사랑을 받게 되면서 그의 이름도 더욱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똑똑하고 겸손하며 추리력이 뛰어난 범죄사건 전문 기자로 말이다. 


“제가 추리소설을 꽤 좋아해서 노아 기자님이 나온 예능도 종종 챙겨봤죠.”


재훈이 말을 계속했다. 


“노아 기자님을 여기서 만나니까 정말 연예인이라도 본 기분이었습니다. 지금 같이 식사를 하면서 노아 기자님이 취재했던 여러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습니까 정민 기자님. 일행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저희와 같이 앉으시죠?”


“그게…….”


일행이 있긴 한데…… 정민은 다시 지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현은 여전히 수진으로부터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재훈이 다시 말했다.


“같이 가시죠.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듣고 싶군요. 아무래도 같은 기자라 그런 거겠죠?”


“정민 선배와는 동문입니다. 같은 학교를 나왔거든요.”


노아가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재훈이 더욱 반기며 정민에게 합류할 것을 권했다. 오랜만에 동문까지 만났는데 함께 못할 이유가 뭐 있냐는 투였다. 정민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젠틀한 노아와 달리 굉장히 적극적으로 강권하는 스타일인 재훈의 권유를 더 뿌리치기 힘들었다. 


그래도 재훈이 있어 좋은 점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말을 재훈이 한다는 사실이었다. 재훈은 입에 모터라도 달린 것인지 식사 중에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대화의 주제는 다양했지만 거의 항상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점이 비슷했다. 정민이 아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재훈의 이런 점을 싫어했다. 당연히 그와 오래 대화하는 걸 즐기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노아는 달랐다. 노아는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재훈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맞장구까지 쳐주었다. 노아와 같은 대화 상대는 오랜만인 것인지 한층 더 신이 난 재훈이 더 열심히 떠들었고, 노아는 질세라 더 거기에 맞춰 반응을 해줬다. 노아와 재훈이 워낙 쿵짝이 잘 맞았기 때문에 정민이 할 건 거의 없었다. 조용히 밥을 먹으며 때때로 화두가 자신에게 오면 짧게 답변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럼 재훈과 노아가 알아서 대화를 또 이끌어가면서 필요한 소음을 채워주는 식이었다. 


그 사이 정민은 그릇에 담아온 음식을 다 먹었다. 사실 더 이상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노아와 재훈, 두 남자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연회장으로 가서 음식을 더 가져올 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방해를 받았다. 이번엔 지현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정민아!”


드디어 수진과의 인사가 끝난 것인지 지현이 그릇 가득 음식을 들고 정민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나타났다. 처음에 정민은 재훈을 발견하고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인상을 풀었다. 그리고 노아를 발견하고는 바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박지현이라고 합니다. 정민이와는 이모조카 하는 사이랍니다.”


“정민 기자님과 지현 작가님이 이모조카 사이라구요?”


재훈이 과장된 제스처를 섞어가며 놀라는 척을 해보였다. 보아하니 지현의 말을 일부러 못알아듣는 척 하는 것 같았다. 지현도 모른척 설명했다. 


“진짜 이모조카는 아니구요, 정민이 아버님이 사실 제 은사님이세요.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죠.”


그렇게 대답하며 지현이 노아 쪽을 바라보았다. 무언 중에 노아에게 자기 소개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재훈과 달리 지현은 노아가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노아가 붙임성 좋게 웃으며 인사했다. 


“서노아라고 합니다.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정민 선배와는 대학교 동문입니다.”


“그렇군요!”


반갑다는 듯 지현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정민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정민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듯했다. 지현은 지금 분명 노아가 정민에게 잘 어울리는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정민이에게 이렇게 멋진 후배님이 있다고는 못들었는데! 정민이처럼 문화부 기자신가요?”


“아뇨. 전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서노아 기자님을 모르시나보군요 작가님!”


옆에서 재훈이 호들갑을 떨었다. 


“범죄 전문 기자 서노아! 방송에도 여러번 나왔는데, 못들어보셨나요?”


“어머. 방송에서요?”


지현이 관심을 보이자 기세를 탄 재훈이 과장되게 노아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재훈에 의하면 노아는 경찰에게도 인정 받을 정도로 뛰어난 추리력을 자랑하는 명탐정이었다. 재훈의 과장된 칭찬에 노아는 진땀을 빼며 해명을 쏟아내야했다. 자신은 탐정이 아니라 기자이고 추리력이 뛰어나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송을 잘 탔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지현도 재훈이 하는 말의 절반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노아에 대해서는 꽤나 호감이 있는 듯했다. 그 증거로 대화 주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재훈이 노아에 대해 떠들게 두었다. 그러면서 기회만 되면 은근히 정민 얘기를 꺼내며 두 사람의 공통분모를 찾으려 했다. 


정민은 내심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물을 한모금 마셨다. 재훈은 아마 아무 것도 모르고 노아에 대해 떠드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의 과장된 설명은 거의 정답에 가까웠다. 지현도 마찬가지였다. 노아와 정민의 관계는 단순 대학 동문 정도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말이다. 


“아.”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정민이 자리에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정민을 향했다. 


“기사 주제로 뭔가 떠올라서…… 잠깐 2층 좀 다녀올게요.”


어색한 미소를 띠며 정민이 말했다. 그리고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정민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후,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재훈이 다시 무어라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노아가 뒤따라오는 것 같진 않았다. 노아라면 충분히 뒤따라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정민이 일부러 서둘러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정민은 일단 동관 2층으로 올라갔다. 파티 참석자들은 다 식사중인 것인지 전시장은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했다. 정민은 겨우 한숨 돌렸다. 태연한 척 하긴 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노아와 함께 있는 게 불편했던 것이다. 정민은 전시관 2층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연회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정민이 나타나지 않으면 남은 세 사람도 아마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 지현에게 연락해 지현과 다시 합류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전시된 작품들은 파티 전 충분히 감상했기 때문에 새삼 다시 살펴 볼 이유는 없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만 다시 확인하면서 정민은 중앙관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앙관 2층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정민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중앙관 2층에서도 가장 중앙에 위치한 작품 앞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180 후반대는 될 법한 장신의 남자였다. 마치 모델처럼 작은 머리에 몸은 늘씬했고 다리는 유독 길었다. 이제 20대 중후반쯤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깜짝 놀랄 만한 미남이었다. 특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없는 그의 몽롱한 눈빛은 남자에게 어떤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 그를 더욱 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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