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정민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키가 작은 중년의 남성으로 서울 유명 갤러리의 관장인 박성수였다. 평소 멋쟁이로 유명한 박성수 관장은 오늘도 파란 정장에 빨간 나비 넥타이를 하고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하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그 옆에 있는 남자였다. 30대 초반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머리는 펌을 한 것인지 살짝 곱슬머리에 짙은 갈색이었고 같은 색감의 큰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복장은 하얀 셔츠에 어두운 회색빛의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박성수 관장의 차림새와 비교가 되서인지 최대한 무난하고 단정하게 입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남자와 박성수 관장은 아직 정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성수 관장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입에서 침까지 튀어대며 남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남자는 주름 하나 없는 웃는 낯으로 박성수 관장의 말을 경청 중이었다. 박성수 관장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한없이 선했다. 예의바르고 얌전한 모범생의 얼굴인데다 눈과 입가에 머금은 웃음이 너무 자연스럽고 밝아서 보고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사실 남자의 힘은 그의 웃음에만 있지 않았다. 남자는 달변가였고 눈치가 매우 빨랐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할 수 있었고 보고 싶어하는 반응을 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라도 남자 앞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쉽게 경계심을 내려놓게 된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마치 반평생을 알고 지낸 관계 같은 친근함을 줄 수 있는 남자. 정민 역시 남자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로 친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기들한테도 조용하고 차가워보인다는 평을 들었던 대학생 정민이 말이다.
남자의 이름은 서노아. 정민의 대학 후배이자 프리랜서 기자였다. 정민과 같은 문화부 기자는 아니었지만.
아니, 정민이 알기로는 노아는 미술의 미 자에도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왜 어울리지 않게 이 화랑관에 와있는걸까? 정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돌아선 다음 거의 뛰듯이 왼쪽으로 이동했다. 노아와 박성수 관장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민은 일단 서관 2층으로 피하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걸음을 재촉하며 정민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난 왜 도망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저 녀석을 피해야 하는 거지? 난 아무 잘못이 없는데?
그렇지만 그건 노아도 마찬가지다.
노아 역시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 특히 정민에게는 더더욱. 오히려 노아는 정민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누구보다도 정민이 잘 알았다.
그렇지만 정민으로선 노아를 편히 대하기 어려웠다. 역시 그 사건 때문이다. 노아를 보니 더욱더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의 사건때문만은 아니다. 정민이 반사적으로 노아를 피한 것은 그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민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다시 서관 2층에 서있었다. 힐끔 뒤를 보았다. 노아도 박성수 관장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예기치 않게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런데 다름 아닌 그 잊고 싶은 기억의 당사자와 여기서 마주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본래 정민은 주환의 작품들을 다 본 다음 프라이빗 파티까지 즐기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아를 보고나니 파티는 포기하고 동관 2층까지만 확인한 다음 집으로 가는 게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민이 서관 2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드디어 정민을 찾아낸 지현이 다가왔다.
“어딨었어, 정민아? 메시지도 확인 안 하고. 한참 찾았네.”
“아, 이모.”
갑자기 다가온 지현 때문에 정민은 조금 놀랐다. 하지만 지현의 얼굴을 보니 또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피해야할까? 시간이 많이 흘렀다. 노아는 과거의 인연일 뿐이다. 과거의 그 끔찍한 사건은 여전히 트라우마처럼 남아있기는 하지만, 다 지난 일이다. 다 지난 일일 뿐인 것이다.
노아와 마주치면 또 어떤가. 벌써 10년도 전의 선후배 사이. 그것 뿐이다. 이제 와서 자신이 이렇게 동요할 이유가 없다. 만약 노아를 피해 자신이 화랑관에서 도망친다면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다고 인정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래, 정민아? 무슨 일 있어?”
스스로를 다잡고 있는 정민의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현을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정민이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이모. 이재훈 사장과는 얘기 잘 하셨어요?”
“어머. 정민이도 재훈 사장 아는구나?”
지현은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정민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그에 대한 불평을 쏟아놓았다.
“말도마. 정말 어울려주느라 혼났다. 하마터면 전시회를 같이 다 돌 뻔 했어.아는 얼굴들만 보이면 아는 척 해대는 인사라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한테 떠넘기고 겨우 빠져나왔어.”
“저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긴 했어요. 말이 많은 편이시더라구요.”
“말만 많으면 다행이지. 허세가 너무 심해. 아, 물론 대단한 사람인 건 맞고 부자인 것도 맞지만. 근데 그걸 자랑 안 하면 혀에 가시가 돋나봐. 이런 저런 얘기를 해도 결국 자기자랑으로 귀결이야.”
그러고도 한참 동안 지현은 재훈에 대해 불평했다. 정민은 적당히 흘러들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지현의 기분이 좀 풀린 다음에야 두 사람은 전시 감상을 재개할 수 있었다. 서관 2층을 이미 다 본 정민이지만 지현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돌았다. 정민은 속으로 노아와 마주치지 않고 지나칠 수 있기를 바랐다. 화랑관은 충분히 넓으니 설사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서로 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정민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이후 지현과 함께 정민은 2층 중앙관과 동관까지 다 돌며 주환의 모든 작품들을 감상했지만, 끝내 노아와 다시 마주치지 않았다. 노아는 동관 2층쪽에서부터 오고 있었으니까 아마 정민을 보지 못하고 엇갈린 거겠지. 이 사실에 정민은 적잖이 안도했다.
하지만 프라이빗 파티를 떠올리자 다시 심란해졌다. 전시회장과 달리 프라이빗 파티 장소는 동관 1층에 국한돼 있었다. 만약 노아도 파티에 참석한다면 마주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노아는 아마 자신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과연 자신은 태연하게 그 인사를 받을 수 있을까? 동요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지는 않을까?
정민과 지현이 전시회 관람을 다 마쳤을 때는 이미 오후 5시를 훌쩍 넘어있었다. 하지만 저녁 파티는 오후 6시부터 시작이었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좀 남은 상황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정민은 지현과 함께 바깥 바람도 쐴 겸 화랑관 뒷편에 있는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쪽 출구들은 모두 잠겨있는 만큼 중앙관 1층의 정문을 통과해 돌아갔다. 로비는 전시를 다 보고 한가해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느라 북새통이었다. 그중에 정민의 눈에 띄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석고상마냥 굳은 각진 얼굴에 안경을 쓰고 올백으로 머리를 넘긴 남자. 클래식한 네이비 정장을 따분할 정도로 빈틈없이 차려입은 남자. 부관장 정우현이었다. 예전에 화랑관에서 만났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음 관장으로 내정됐다고 하니까 뭔가 달라보였다. 실제로 유독 그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이곳에 초대받은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가 화랑관의 다음 관장으로 내정됐다는 소문을 접한 모양이었다.
몇몇 방문객들은 프라이빗 파티는 참석하지 않고 먼저 떠났다. 밖으로 나온 정민과 지현은 마침 떠나는 차 몇 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떠나는 차들보다 더 많은 차들이 화랑관 부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이른 오후에는 참석하기 어려운 사정을 가진 방문자들일 것이다. 신경 쓰지 않고 정민은 계속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어머. 정민아. 저기 좀 봐!”
감탄사가 섞인 목소리로 지현이 갑자기 외쳤다. 정민은 무심코 지현이 가리킨 방향 쪽을 돌아보았다. 번쩍 번쩍 광이나는 검은색의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차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정민이었지만 지금 화랑관 앞으로 오고 있는 차가 그녀는 아마 평생 엄두도 못낼 만큼 비싼 차일 거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차는 비어있는 주차 공간에 들어가는 대신 화랑관 바로 앞에 멈춰섰다. 운전기사로 추정되는 남자가 번개처럼 운전석에서 내렸고 옆 조수석에서 앉아 있던 안경 쓴 젊은 남자도 같이 내렸다. 운전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고 옆에 기립하자 안경 쓴 젊은 남자는 그 반대편에 가서 섰다. 차에서는 이제 20대 중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가 내렸다. 직후, 화랑관 정문을 통해 김준호 관장이 나왔다. 그 뒤를 정우현 부관장과 이세민 기획 팀장이 뒤따랐다.
정민과 지현도 여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녀는 다름 아닌 윤창섭 사장의 막내딸 윤수진이었다. 윤창섭 사장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예술 쪽에 관심이 없었다. 반면 그들과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내딸 윤수진은 아버지처럼 미술에 관심이 많이 해외 유명 미대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많은 이들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직접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미술사와 큐레이터학을 전공하는데 만족했다. 석사 과정까지 마친 그녀는 곧바로 한국으로 귀국했고, 돌아오자마자 세명문화재단의 이사 자리에 취임했다. 이때문에 미술계가 한동안 떠들썩해지기도 했다.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젊은 여자가 한국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까지 단숨에 올라가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연히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정민이 보는 수진은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당당한 여자였다. 지금도 그랬다. 옅은 미소를 띤 채 차에서 내리는 수진은 폭포수처럼 풍성히 흘러내리는 흑발과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머리카락만큼이나 검은 두 눈은 고양이처럼 날카롭고 도도했고, 붉고 도톰한 입술은 도발적이었다. 그녀는 꼭 맞는 아이보리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우아한 실루엣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이 화랑관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고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 윤창섭 사장이 고인이 된 지금 이곳의 주인은 그의 금지옥엽이었던 수진이었다. 김준호 관장이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마중을 나왔다는 것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김준호 관장은 분명 직원들에게 수진이 도착하면 바로 자신에게 알리라고 미리 언지를 줬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정확히 타이밍을 맞추다니, 정민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김준호 관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처세술은 아마 필수불가결한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손녀뻘 되는 여자아이에게 저렇게 머리를 조아릴 수 있다니. 정민 같은 성격의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못할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