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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실라 Aug 19. 2024

화랑관 (4)

“오랜만입니다 이정민 기자님.”


작은 키의 노인이 웃으며 정민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은 정수리 부분이 훤히 벗겨져 있었는데, 그 주위에 듬성듬성난 머리는 하얀 백발이었다. 크고 둥근 안경 렌즈 뒤의 두 눈은 작았고 안경테를 받치는 콧등도 낮았으며 입술 역시 작고 얇았다. 체격도 작고 마른편이다 보니 입고 있는 정장이 살짝 커보였다. 그렇지만 언뜻 볼품없는 외관과는 반대로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총기로 반짝이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오랜만이네요.”


정민은 공손하게 노인의 인사를 받았다. 노인의 이름은 김준호. 이 화랑관의 관장이었다. 화랑관의 관장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유명한 아트 딜러로 활약했던 김준호 관장은 윤창섭 사장 생전에 그가 한국 미술계에서 활동할 수 있게 여러모로 도움을 줬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김준호 관장이 화랑관의 초대관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세명 그룹이 윤창섭 사장과 관련하여 그가 세운 공로들을 인정해준 것으로 볼수 있었다. 이때문에 미술계에서 김준호 관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예술성보다 상업성을 우선시하는 속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를 재벌가의 머슴쯤으로 취급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민은 김준호 관장이 한국 미술계에 과보다는 더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화가들을 지원하고 양육한 세명문화재단 설립에도 김준호 관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들었다. 김준호 관장이 윤창섭 사장과 돈독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그 관계를 통해 세명 그룹의 투자를 미술계에 이끌어내지 않았다면 과연 한국 미술계가 오늘 같은 모습일 수 있었을까? 정민은 아마도 많은 게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환 작가님께 소개해드리려고 우리 교수님을 모시고 왔는데, 정민 기자님까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오히려 잘 됐습니다. 신우대학교에서 미술학을 가르치고 계시는 서정훈 교수님입니다. 교수님. 이쪽은 마주환 작가님, 그리고 성운신문의 이정민 기자님입니다.”


“안녕하세요. 두 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준호 관장의 옆에서 서있던 노신사가 빙긋 웃으며 정민과 주환에게 인사를 건넸다. 깊게 울리는 듯한 중저음이 몹시 듣기 좋았다. 서정훈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여러모로 김준호 관장과 대비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쯤으로 짐작되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김준호 관장과 달리 키가 컸다. 허리도 꼿꼿하게 펴고 있었고 어깨도 넓어서 입고 있는 회색 정장이 몸에 딱 들어맞았다. 반백의 머리도 깔끔하게 정돈했고 그의 하관을 덮고 있는 콧수염과 턱수염도 지저분하지 않고 오히려 잘 어울렸다. 그는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몸도 매우 탄탄하고 균형잡혀 보였다. 아마도 꾸준히 운동을 하는 것 같다고 정민은 생각했다.


“주환 작가님 작품은 예전부터 자주 봤는데, 너무 좋아서 제가 관장님께 혹시 이번 파티에 와볼 수 없는지 특별히 부탁을 했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서 정말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교수님.”


황송하다는 듯 주환이 대답했다. 한참 연장자이자 업계 대선배가 건네는 분에 넘치는 칭찬에 그는 거의 머리를 조아릴 뻔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저도 대학 때 교수님 책을 보면서 많이 공부했습니다. 교수님 작품들도 정말 좋아하구요.”


“저도요.”


자신도 모르게 정민도 맞장구를 쳤다.


“풍경화를 많이 그리셨죠? 예전에 교수님 전시회에도 취재차 간 적이 있었거든요. 직접 뵈지는 못했지만요.”


“그러셨군요. ”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정훈이 정민에게 화답했다.


“저도 정민 기자님이 제 전시회에 오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답니다. 그때 뵀으면 좋았을 텐데, 새삼 아쉽네요.”


“어머. 어떻게 아셨나요?”


“사실 제가 기자님의 숨겨진 팬입니다. 기자님의 주간 칼럼 정말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제 전시회에 관해 쓰신 칼럼은 조교한테 부탁해 스크랩까지 해뒀습니다. 하하.”


살짝 부끄러운 듯 정훈이 웃었다. 정훈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한없이 겸손한 태도가 그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정민은 그의 인상과 목소리에 묘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마저 무장해제시키고 호감을 갖게 하는 어떤 힘 말이다. 이 정도로 호감상인 사람을 정민은 살면서 거의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있다. 한 명 더. 정민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정민은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됐다. 주환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좋았던 흐름이 뚝 끊기는 느낌이었다.


이후 네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정민과 김준호 관장은 주로 듣고만 있었고, 정훈과 주환이 주로 말을 했다. 정훈은 확실히 신통방통한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은 주환으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여러 대화 주제를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주환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어느덧 뉴욕에서 본 인상 깊었던 미술품들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특히 MoMA 얘기가 나오자 주환이 신이나서 자신이 가장 좋았던 작품과 화가들에 대해 떠들었는데 여기에 정훈의 해박한 지식까지 더해지자 대화는 한층 더 불이 붙었다. 이러다가는 서양미술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밤을 새가면서 토론이라도 할 기세였다.


“주환 작가님?”


그러기 전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정민은 조금 놀랐다. 주환에게 말을 건 새로운 사람은 여자였는데 엄청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 정도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세련된 업스타일로 묶은 짙은 갈색머리는 단정했고 희고 고운 피부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크고 맑은 눈동자와 오똑한 콧날이 매력적이었다. 키도 커서 신고 있는 힐을 빼더라도 170cm는 넘을 듯했다. 그녀는 세련되고 우아한 블랙 미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희고 긴 목선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었다.


여자는 주환 외에도 김준호 관장과 정훈, 그리고 정민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하지만 바로 다시 시선을 주환 쪽으로 돌렸다. 주환은 여자의 등장에 깜짝 놀란 것인지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정민은 주환이 여자의 얼굴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2층 동관 전시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서요. 혹시 지금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수민 씨. 지금 같이 가죠.”


양해를 구하고 주환은 바로 여자를 따라나섰다. 정민은 수민이란 이름의 여자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 이를 눈치챈 것인지 김준호 관장이 바로 설명해줬다.


“이수민 큐레이터입니다. 본래 뉴욕에서 활동하는데 주환 작가와의 인연으로 이번 전시를 맡아주게 됐지요. 젊지만 감각이 정말 뛰어난 친구입니다. 뉴욕으로 돌아가지 말고 화랑관에서 한 번 일해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하고 싶을 정도에요.”


“어쩐지. 저도 주환 작가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평소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뛰어난 큐레이터 분이 또 뒤에서 도와주고 계셨군요.”


정훈이 감탄을 토했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처럼 들렸다. 정민도 감탄했다. 정훈은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대화 상대의 모든 말에 호응해주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자꾸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를 말이다.


기분이 가라앉은 정민은 김준호 관장과 정훈에게 취재를 위해 다른 작품들을 보러 가야겠다고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두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지킨 채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민은 서관 1층의 다른 작품들도 천천히 둘러봤지만 처음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잊고있던 기억이 떠올라서인 것 같았다. 한 번 떠오르고 나니, 억지로 잊으려고 할 수록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 같았다.


지현은 어디 있을까? 정민은 괜히 지현에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리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물론 과거의 기억은 결코 우스운 기억이 아니었지만……


서관 1층을 다 둘러본 정민은 서관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ㄴ 모양의 건물인 서관의 엘리베이터는 서관 모퉁이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기 때문에 정민은 일부러 그들을 피해 비상 계단을 이용해 올라갔다. 서관의 비상 계단은 엘리베이터의 왼쪽에 위치한 무거운 철문을 열면 이용할 수 있었는데 화사한 화랑관의 인테리어와 달리 어두운 회색빛으로 거칠고 울퉁불퉁한 느낌이 있었다. 안의 조명도 살짝 어두워서 음산한 기운마저 풍겼다. 그때문인지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굳이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정민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정민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서관 2층은 1층과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전시된 작품들의 느낌이 달랐다. 서관 2층의 작품들을 통해 주환은 뉴욕에서 그가 목격한 다양한 삶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빽빽한 빌딩숲 사이에서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을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작은 레스토랑에서 손님을 서빙하고 있는 웨이터, 쇼핑을 즐기고 있는 화려한 차림의 여자들, 점심 시간에 피자집 앞에 줄을 서고 있는 샐러리맨들, 공연 중인 음악가들, 심지어 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 그림도 있었다. 주환의 그림 속에서 살아 숨쉬는듯한 다양한 인종들을 마주하며 정민은 조금씩 집중력을 되찾았다. 화가인 주환이 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을 받은 걸까. 뭘 표현하고 싶은 걸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걸까. 결국 주환은 뉴욕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이 뉴욕이라는 유니크한 도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서관 2층에 전시된 작품들을 다 둘러본 정민은 지체하지 않고 중앙관 2층으로 건너갔다. 그녀의 집중력은 온전히 다 회복된 후였다. 중앙관 2층의 작품들은 정민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작품들은 주환이 뉴욕에서 만난 가지각색의 예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환은 이번에도 사람을 통해 뉴욕의 예술을 표현했다. 정민은 그 그림들에서 예술에 대한 주환의 열정과 사랑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벅찬 감성이 그녀의 내면을 채워갔다.


정민은 미술을 사랑했다. 그래서 비록 그림을 그리는 재능은 없었지만, 평생 명작들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기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 보물 같은 작품들과 만날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미술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정민은 깊게 숨을 한 번 내쉰 다음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른편으로 이동해 나머지 작품들을 마저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두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동관 2층에서 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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