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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실라 Aug 12. 2024

화랑관 (3)

“그때는 기획 팀장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요. 제 기억속 기획팀장은 인상이 달랐거든요. 훨씬 무표정했고 각진 얼굴에 안경을 쓴 사람이었어요.”


“정우현 부관장 말하는 거네.”


정민의 간단한 설명만 듣고도 지현이 바로 대답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부관장이 예전에는 기획 팀장이라고 했던 것 같아. 새로 부관장이 되면서 안세민 기획 팀장이 자리를 물려받은 거고.”


“맞아요. 저도 들었던 것 같아요.”


정민이 맞장구를 쳤다. 


“관장님께서 곧 은퇴하신다는 소문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후계자를 내정하셨다고…….”


“그게 정우현 부관장이야.”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지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다행히 식당은 거의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를 누군가 엿들을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나도 여기 머물면서 듣게 된 이야기인데, 외부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아. 정민이도 비밀로 해야해?”


“그럼요 이모.”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정민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빙긋 웃었다. 정민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술계 가십거리를 기사화할 사람도 아니었다. 


“관장님이 은퇴하신다는 소문은 사실이야. 아마 올해 안으로 하실 것 같아.”


지현이 조곤조곤 말했다. 


“그럼 누가 그 뒤를 이어 이 화랑관의 관장이 될까? 내부 승격? 아님 외부 인사? 화랑관 내에서는 한동안 꽤나 관심있는 주제였던 것 같아. 경쟁도 나름 치열했대. 후보는 둘. 말 안 해도 누군지 알겠지?”


정우현 부관장과 안세민 기획 팀장.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이 말을 계속했다. 


“세명 그룹에서는 관장님께 후계자 고르는 일을 전적으로 맡겼던 모양이야. 그리고 관장님은 기왕이면 오랫동안 같이 일한 젊은 둘 중 한 명에게 이 화랑관 관장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 같고…… 둘 다 나름 관장님한테는 애제자 같은 사람들인가봐. 둘이 동기인데 공통점이 많아. 유능하고 예술적 안목도 뛰어나고.”


그리고 결국 최종 승자는 정우현이 됐다. 기획 팀장 자리에서 부관장 자리로 승진한 것이다. 안세민도 기획 팀장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같이 승진했지만 보직상 명백히 부관장 아래.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화랑관의 직원들 모두 이 인사이동의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다음 관장은 정우현이 될 것이다. 


안세민은? 모르겠다. 이대로 화랑관에 계속 남는다면 부관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화랑관을 떠나 다른 전시관이나 미술관으로 이직할 수도 있고. 정우현이 다음 관장이 된다면 아마 안세민은 떠날 것이라고 화랑관 직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왜요 이모?”


정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동기 밑에서 일하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그래서 그런가요?”


“응. 아마도.”


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세민 기획 팀장, 인상 보면 대충 알겠지만 보통이 아니거든. 자존심도 엄청 강하고 성격도 급하고 사납고…… 결국 관장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도 이 성격 때문이 아니냐는 소리가 많아. 정우현 부관장은 좀 드라이하긴 해도 무난한 사람이거든. 화를 내는 일도 거의 없고. 그런데 안세민 기획 팀장은 밑에 직원들을 정말 쥐잡듯이 잡는 걸로 유명하거든. 저 사람 성질머리를 못견디고 퇴사한 직원들도 꽤 된다고 들었어.”


“.......”


정민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많은 예술가들과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 평범한 성격의 소유자는 정말 흔치 않았다. 보통 사람의 배 이상 예민한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사적으로는 절대 얽히고 싶지 않을 만큼 파탄난 인성의 소유자들도 흔했다. 


“나한테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딱 봐도 항상 저기압이니까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본단 말이지.”


지현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주제로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정민도 더 캐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심을 먹으며 다른 주제들에 집중했다. 서로의 안부라던가, 화랑관에서 하고 있는 지현의 새 작품이라던가. 


“커피 다 마시고 작업실로 갈까? 정민이 너한테는 특별히 보여줄게.”


“괜찮아요 이모? 방해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아직 갈 길이 먼데. 대신 오늘 보는 건 절대 발설 금지야.”


“당연하죠.”


싱긋 웃으며 정민이 즉답했다. 지현도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다음 대화주제로 넘어갔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시작된 것인지, 화랑관 직원들이 하나 둘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식사 후에는 화랑관의 작업실로 가서 지현이 새롭게 구상 중이라는 작품들을 구경했다. 가을에 화랑관에서 단체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작품들을 완성시켜야 했다. 스케쥴이 너무 빡빡하다고 지현은 혀를 내둘렀지만, 즐거워보였다. 예술가인 그녀에게 자신만의 예술활동을 최대한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이 공간은 마치 천국과도 같았다. 지현은 가을에 열릴 전시회에 정민을 꼭 초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에는 오후 3시까지 지현의 숙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3시가 조금 넘어 갈 쯤에 두 사람은 자리에 일어섰다. 두 사람 모두 프라이빗 파티에 초대받은 만큼 슬슬 가서 얼굴을 비추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전시관은 오후 2시부터 개관되니까 지금쯤이면 아마 사람들이 꽤나 와있을 것이다. 


예상대로였다. 한적했던 화랑관은 어느새 도착한 사람들로 웅성이고 있었다. 이때 정민과 지현은 조금 번거롭지만 중앙관 1층 로비까지 다시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지현의 숙소는 화랑관 뒤편에 위치해 있었고 화랑관은 서관, 중앙관, 동관 모두 뒤편 출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출구들은 비상구라 평소에는 굳게 잠겨있었고 카드키를 소유한 화랑관 직원들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화랑관에 머무는 지현도 직원 카드키는 없었기 때문에 화랑관에 들어갈 때면 조금 번거롭지만 화랑관 정면까지 늘 돌아가야 했다. 


정민은 먼저 파티의 주인공인 주환을 찾아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중앙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아는 얼굴들이 여럿 보였기 때문에 그들과 먼저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한국 미술계에 나름 이름을 알린 유명인사들이 많이 보였다. 주환과 같은 화가들도 있었고, 미술 평론가들도 있었고, 아트 딜러와 유명 수집가들도 보였다. 다른 신문에서 취재 온 기자들도 몇 명 눈에 띄었다. 와중에 화랑관의 직원들은 한층 좁아진 공간을 종종걸음으로 누비며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리셉션 직원과 다시 한 번 게스트 등록을 확인 후, 정민은 일단 서관 1층으로 가보기로 했다. 지현은 그녀의 작품을 예전에 구매한 적이 있는 수집가와 마주쳐 묶여버린 터라 일단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수집가와 대화를 나누는 지현을 보고 정민도 남모르게 빙긋 웃었다. 수집가의 이름은 이재훈. IT 관련 스타트업으로 크게 성공해 40대 초반의 나이에 큰 부를 쌓은 남자였다. 전시회를 돌며 미술 작품을 수집하는 게 취미라 국내에 열린 꽤 큰 전시회에는 거의 항상 빠짐없이 얼굴을 비췄기 때문에 정민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화랑관의 서관 1층은 화랑관의 주 전시회장이었다. 서관 1층만 해도 공간이 상당히 넉넉했기 때문에 단독 전시회는 주로 서관 1층에 열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주환의 이번 전시회는 특별히 화랑관 2층에까지 그의 작품들을 전시한다고 했다. 나름 특별대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화랑관도 앞으로의 주환의 행보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뜻이 아닐까. 


일단 정민은 주환을 찾는 것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전시된 주환의 새로운 작품들을 하나 하나씩 감상했다. 이번 전시회의 테마는 지난 2년간 주환이 경험하고 느낀 뉴욕이었다. 뉴욕이라면 정민도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압도적인 화려함과 비루함이 공존하는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한 도시. 그것이 정민이 받은 인상이었다. 주환은 어떻게 느꼈을까, 그리고 어떻게 표현했을까. 서관 1층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있었다. 주환이 만난 사람들, 방문한 장소들,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여러 형태로 표현돼있었다. 언제부턴가 정민은 주환을 찾는다는 본래 목적을 잊고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림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먹듯 집중해서 들여다보았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붓칠. 그 안에서 주환의 세밀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가 하면 분노와 부끄러움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정민은 “야경”이라는 제목의 그림 앞에서 멈춰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림은 허드슨 강 너머에서 보이는 뉴욕의 야경을 그리고 있었다. 캔버스 가득 담긴 잠들지 않는 도시의 아름다움에 정민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몇 년 전 감상했던 뉴욕 야경의 기억이 머릿속에 되살아나면서 정민 스스로가 그림 속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됐다.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기자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정민은 옆을 보았다. 다름 아닌 주환이 정민을 보며 씨익 웃고있었다. 중키에 머리를 짧게 깎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주환은 옷차림도 무난하고 수수해서 얼핏보면 예술가가 아니라 학자나 엔지니어처럼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구도 그가 이 성대한 파티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반갑게 웃어보이는 주환을 보며 정민도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작가님. 진작에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넋을 놓아버렸네요.”


“기자님이 넋을 놓고 보셨다고 하니까 안심이 되네요.”


주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감이 좀 생기네요. 오랜만에 한국에서 하는 전시회라 조금 떨렸는데 말이죠.”


“아직 다 보진 못했지만 너무 좋네요. 예전 뉴욕에 갔던 기억도 생각나고. 빨리 작가님의 나머지 작품들도 다 보고 싶네요.”


그렇게 작품 감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다음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넘어갔다. 사실 정민이나 주환이나 내향적인 사람들로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자 금새 할 말이 떨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웃으며 말하고 있긴 했지만 슬슬 다음엔 무슨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속으로 고민해야 하는 타이밍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헤어지기도 어색한 노릇이었기 때문에 정민과 주환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사람들이 정민과 주환을 발견하고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정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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