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호 관장이 웃으며 수진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정민이 위치한 곳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김준호 관장 뒤에는 우현과 세민이 마치 경호원마냥 뻗뻗하게 서있었는데, 두 사람 다 큰 키에 정장차림이라 그런지 얼핏 보면 진짜 경호원 같아 보이기도 했다. 김준호 관장과 몇 마디 나눈 수진은 미소띤 얼굴로 화랑관 안으로 향했다. 수진을 위해선 특별히 회전문 옆에 위치한 비상구가 활짝 열렸다. 화랑관 직원 중 하나가 눈치 빠르게 열어 놓고 대기 중이었다. 수진이 먼저 들어갔고 그 뒤를 이어 그녀의 비서로 추정되는 남자가, 그리고 그 뒤를 김준호 관장과 우현, 세민이 따라들어갔다. 마지막으로 화랑관 직원이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 운전기사는 돌아보지도 않는 수진의 뒷모습에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차로 돌아갔다. 능숙한 솜씨로 빈자리를 찾아 주차하더니 차에서 나와 유유히 언덕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는 화랑관 밖에서 대기할 모양인 듯했다.
“나중에 아가씨 만나서 인사하려면 피곤해지겠어.”
지현이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성격이 나쁜 애는 아니거든. 그런데 아무래도 재벌가 아가씨라 상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거기다가 세명 그룹 오너가 일원이니까…….”
“그러네요.”
이해한다는 듯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세명문화재단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지현인만큼 껄끄러워도 어쩔 수 없이 세명 그룹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현 같은 타고난 예술가들에겐 상당히 고역일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화랑관 뒤편의 정원에 볼 만한 조각들이 많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민과 지현은 일부러 늑장을 부려 화랑관 안으로 돌아가는 타이밍을 최대한 늦췄다. 정민이나 지현이나 안에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늑장을 부리게 됐다. 이심전심. 정민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결국 6시가 됐다. 슬슬 바깥도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반면 화랑관 내부, 특히 동관 1층은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된 것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정민과 지현도 다시 발걸음을 화랑관으로 돌렸다. 중앙 로비의 리셉션 데스크는 두 명의 직원이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은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 직원이었다. 두 사람은 정민과 지현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인지 인사만 할 뿐 게스트 체크는 하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막힘 없이 바로 동관 1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동관 1층은 연회장이었다. 화랑관에서 고용한 케이터링 업체가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보기 좋게 세팅해둔 참이었다. 출장 요리사들이 즉석에서 요리해주는 코너도 곳곳에서 보였다. 동시에 서빙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와인이나 핑거푸드를 쟁반 가득 싣고 돌아다니며 삼삼오오 몰려있는 게스트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정민과 지현도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와인과 핑거푸드를 권유받았다. 두 사람은 거절하지 않았다.
정민은 은은한 과일향이 느껴지는 스파클링 와인을 한모금 입에 담으며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보았다. 대략 스무명 정도의 사람들이 음식을 담거나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마 연회장을 통과해 그 옆의 큰 홀로 이동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민이 기억하기로는 보통 그 홀에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들이 세팅돼 있었다. 일단 노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정민아.”
연회장 한쪽에서 주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수진을 발견한 지현이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김준호 관장과 정훈도 있었다. 우현 역시 마네킹마냥 무표정했지만, 아직 김준호 관장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세민은 보이지 않았다. 휴. 지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가서 인사는 해야지. 인사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수고해요, 이모.”
정민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바로 수진 쪽으로 걸어갔다. 정민은 아마 지현이 빨리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감하고 반대편으로 향했다. 별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맛있어보이는 음식들을 그릇에 담았다. 어느 케이터링 업체를 쓰는진 모르지만, 화랑관에서 열리는 파티 음식은 언제나 맛있었다. 노아가 여기 있다는 걸 알지만 않았다면 아마 훨씬 더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음식은 다 담았지만 지현은 옆의 홀로 가는 게 망설여졌다. 노아가 연회장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곳에 노아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식사를 한다면 노아도 이번에는 분명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주쳐도 당당하게 대하기로 결심을 굳혔것만 막상 노아를 대면한다고 생각하니 또 자신이 없어졌다.
하다못해 지현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뒤늦게 지현을 그리워하며 정민은 근처에 자신이 말을 걸어볼 만한 사람들이 있는지 한 번 둘러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 틈 속에 숨는다면 자연스럽게 노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현재 파티에 참석하고 있는 게스트들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았지만 오래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는데…….
“정민 선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적당한 중저음에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조금 놀람이 섞인 목소리기도 했다. 정민은 뒤돌아보지 않고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민은 순간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실수였다.
음식을 추가로 가지러 오기 위해 노아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생각 못했다.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정민 선배 맞죠?”
정민이 반응 없이 굳어버리자 노아가 다시 한 번 정민을 불렀다. 정민은 소리 없이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래. 내가 피할 이유는 없어. 난 잘못한 게 없으니까. 노아도 마찬가지야. 저 녀석은 잘못한 게 없을 거야. 아마도 말이야…….
정민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노아의 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그의 미소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잘 어울렸다. 노아는 전반적으로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그보다는 유난히 선한 인상이 더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인지 똑똑하고 성실하다는 느낌도 주었다. 노아에 대해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의 인상만 보고도 그가 선하고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아와 가볍게 대화를 시작한다면, 아마 그 대부분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그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노아는 부드러운 미소만큼이나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의 소유자였으며 정민이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말을 잘 했다. 말만 잘 하는 게 아니었다. 노아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데도 누구보다 탁월했다. 상대가 아무리 쓸데 없는 소리를 늘어놓아도 내색 한 번 하지않고 다 들어줄 뿐 아니라 언제나 최적의 타이밍에 최고의 반응을 보여줬다. 그러다보니 노아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조차 그에게 푹 빠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감추고 있던 속내마저 자신도 모르게 술술 털어놓게 될 정도로…….
“선배?”
또한 노아는 귀신 같은 빠른 눈치의 소유자기도 했다. 정민이 표정관리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잠깐의 머뭇거림에서도 정민의 복잡한 심경을 바로 읽어낸듯했다. 노아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에 묘한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정민은 급히 입을 열었다.
“안녕, 노아.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이네요.”
노아가 화답했다.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고, 그저 오랜만에 만난 정민이 반갑다는 투였다. 정민은 묘하게 입안이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깨닫지 못했지만, 정민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선배도 이 파티에 초대받았는지 몰랐어요. 전시회 작가님이랑 아는 사이에요?”
“응. 그럭저럭. 아무래도 문화부 기자니까.”
정민이 대답했다.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띄우려고 했지만 얼굴 근육이 마음먹은만큼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
“너는? 네가 미술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럴 리가요.”
노아가 활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저야 문외한 중의 문외한이죠. 그렇지만 저희 작은 아버지가 화가시거든요. 신우대학교에서 교수를 하시는데, 여기 관장님이랑 잘 아시는 모양이에요. 이번 프라이빗 파티에 초대를 받으셨다고 하더라구요.”
“아.”
정민이 짧게 감탄사를 토했다. 멋지게 수염을 기르고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던 정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성도 서씨였다. 아마도 그가 노아의 작은 아버지인 모양이었다.
“만난 것 같은데 너희 작은 아버지. 서정훈 교수님 맞지?”
“네, 맞아요.”
노아는 조금 놀랐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미 만나셨는지 몰랐네요. 설마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직접 만나 인사드린 건 오늘이 처음이야. 하지만 서정훈 교수님 꽤 유명하신 분이야. 그분 전시회 관련 내가 칼럼을 쓰기도 했고.”
“진짜요?”
노아가 더욱 놀랐다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그는 자신의 작은 아버지가 그 정도로 알려진 사람인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자세한 얘기는 안 하셔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유명하신 모양이네요. 선배 가 기사를 낼 정도면.”
“서정훈 교수님은 유명하신 분 맞아. 내가 기사를 낸 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고.”
정민이 급히 설명했다.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의외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말 할 것도 없이 노아의 솜씨였다. 노아가 던지는 질문들과 보여주는 리액션에 휘말려 정민은 생각보다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넌 교수님을 따라 여기 온 거야?”
“네. 그런 것도 있구요.”
노아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다른 인연도 있구요. 이번 전시회 작가님…… 마주환 작가님이랑도 아는 사이거든요. 작년에 형 보러 뉴욕 갔다가 우연히 만난 적이 있거든요.”
“그래?”
정민도 조금 놀랐다. 설마 주환과 노아가 구면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노아가 설명했다.
“작은 아버지가 관심이 있냐고 연락해오셨었는데 처음에는 거절할까 했거든요. 그런데 작가님이 제가 아는 분인 거예요! 오랜만에 가서 인사해도 좋겠다 싶어 가겠다고 했죠.”
“그래. 잘 했네.”
“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더라구요. 그런데 와서 선배까지 만났으니까 오길 정말 잘 했네요.”
노아가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민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노아가 이곳에 오는 줄 알았다면, 정민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