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와 정민은 다음날 아침 일찍 화랑관으로 출발했다. 이틀 사이 화랑관은 꽤 변해있었다. 입구에서부터 경찰차가 보였고 언덕을을 통과해 화랑관 건물 앞에 도착하니 몇 대가 더 있었다. 화랑관 앞쪽에는 노란 폴리스 라인이 길게 쳐져 있었는데 경찰과 화랑관 직원이 아닌 외부인들은 화랑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듯했다. 노아의 차에서 내린 정민이 살펴보니 폴리스 라인 밖에서 기자로 추정되는 몇몇 사람들이 서성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자들 출입 역시 엄격히 통제 중인 것이다.
하지만 노아와 정민은 당당히 폴리스 라인을 지키고 있는 경찰관에게 다가갔다. 경찰관은 조금 의문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봤는데, 왜 통과 안 시켜줄 걸 뻔히 알면서 접근하냐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 경찰관이 자신들을 통과시켜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노아 기자라고 합니다.”
노아는 먼저 공손하게 경찰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강훈 형사님의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 노아 기자님이시군요.”
경찰관의 얼굴이 풀렸다. 아무래도 강훈이 미리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물론입니다.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노아가 감사를 표하고 허리를 숙여 폴리스 라인을 통과했다. 정민은 눈치를 보며 뒤따랐다. 경찰관이 뭐라고 얘기를 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지만만, 다행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강훈이 정민에 대해서도 미리 얘기해를 해놓은 걸지도 몰랐다.
노아와 정민은 회전문을 통과해 1층 중앙관 로비로 들어갔다. 안내데스크는 프라이빗 파티 때의 남녀 직원 둘이 여전히 지키고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노아와 정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노아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서노아 기자라고 합니다.”
경찰관에게 한 것과 같이 공손하게 노아가 인사를 건넸다. 두 직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아무래도 무겁게 가라앉은 현재 화랑관 내 분위기와 대조적인 노아의 밝은 톤이 거슬리는 것 같은 눈치였다. 신경 쓰지 않고 노아가 쾌활한 어조로 물었다.
“김준호 관장님을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지금 어디 계신가요?”
“관장님은 사무실에 계십니다.”
남자 직원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다 정신이 들었는지 퍼뜩 덧붙였다.
“혹시 미리 약속을 잡고 오신 건가요? 관장님께서 취재에는 응하지 않으시겠다고…….”
“취재목적이 아닙니다.”
노아가 밝게 대답했다.
“조사 목적이지요. 화랑관에서 벌어지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 하지만 수사는 경찰이…….”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아가 재빨리 남자 직원을 안심시켰다.
“담당 형사님에게 수사협조 요청을 받아서 온 거니까요. 혹시 관장님께 서노아 기자가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남자 직원은 아무래도 노아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경찰이 아닌 기자가 조사를 하고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겠다고 나서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노아를 약간 수상쩍은 눈초리로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단 내선전화로 어딘가에 전화를 하기는 했다. 노아는 웃는 얼굴로 기다렸다.
남자 직원은 꽤 오랫동안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 혹은 ‘알겠습니다’만 반복했다. 정민은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정민은 노아가 화랑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사건 현장부터 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김준호 관장부터 찾은 것은 사실 의외였다.
“관장님께서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남자 직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중앙관 5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동관 5층으로 가는 입구쪽으로 가시면 안내해 줄 직원이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아는 또다시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정민이 어색하게 뒤쫓았다. 노아의 태도는 너무 태평해서 도무지 살인사건 현장에 온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정민은 화랑관 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조용한 긴장감에 절로 몸이 굳는 것 같았다. 화랑관을 정말 좋아하는 정민이었지만 바로 이곳에서 사람이, 그것도 자신이 아는 사람이 살해당했다고 상상하니 그저 끔찍했다.
노아와 정민은 중앙관 5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한 후, 걸어서 동관으로 향했다. 동관 5층은 전체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계자가 아니면 애초에 출입이 제한돼 있었다. 중앙관 5층에서 동관 5층으로 통과하는 입구에는 화랑관 직원 한 명이 대기 중이었는데, 노아와 정민을 보자마자 문을 열고 통과시켜 주었다. 문 너머에는 길게 복도가 나있었고 화사한 화랑관의 전체 인테리어와는 비교되는 삭막하고 단조로운 잿빛빛 벽지 색이 눈에 띄었다. 복도의 양 옆에는 투명한 유리문들이 보였는데 왼쪽 문 안에는 프런트 데스크와 데스크를 지키고 있는 직원이 한 명 보였다. 오른쪽 문 안에는 직원들 몇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내를 맡은 직원이 키카드를 이용해 왼쪽 문을 열어주었다. 노아와 정민은 직원을 따라 화랑관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랑관에 자주 방문한 정민이었지만 화랑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김준호 관장과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도 동관 1층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래서인지 동관 5층은 화랑관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노아와 정민을 흘끔 흘끔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들이 낯선 분위기를 한층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대다수의 눈빛에 일종의 경계심이 서려있었다. 하긴. 경찰을 포함한 외부인들이 어제 얼마나 이 화랑관을 들쑤셔놓았을까. 그걸 생각하면 정민은 그들의 심정이 이해는 됐다. 화랑관 직원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그들 중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다들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준호 관장의 방은 사무실 내에서 꽤 깊숙히 위치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노아와 정민 모두 조금 더 걸어야했다. 직원은 두 사람을 관장실 바로 앞까지 안내한 후, 닫혀 있는 문에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김준호 관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직원은 기계적으로 문을 열어보였다. 노아와 정민이 들어가자 직원은 바로 문을 닫았다. 정민은 안내를 맡은 직원의 태도가 유독 딱딱한 것이 신경 쓰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노아 기자님. 그리고 정민 기자님. 일단 앉으시죠.”
김준호 관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노아와 정민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는 이미 접객용 소파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노아와 정민은 김준호 관장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움직이는 걸 보며 김준호 관장은 뜻모를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별 생각이 없었을 텐데, 상황이 이래서인지 정민의 눈에는 김준호 관장의 미소에도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커피나 차라도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정민이 얼른 노아를 따라 거절의사를 내비쳤다. 그래요? 김준호 관장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순간 노아와 정민을 살피는 눈초리는 매우 날카로웠다. 김준호 관장은 특히 노아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아 기자님에 대해서는 서정훈 교수님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노아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 김준호 관장이 선수를 쳤다.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라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전부 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요.”
이건 아마도 노아의 추리력과 지금까지 해결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노아는 화랑관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러웠고, 또 공손했다.
“당연히 과장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노아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제 진심은 전해드린 그대로입니다. 경찰과 똑같습니다. 전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왔습니다. 물론 결국 진실을 대중에 알려야 하겠지만, 그걸 우선시하진 않습니다.”
“그것 참 희한하군요.”
김준호 관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많은 기자님들을 만나봤지만 노아 기자님처럼 말하는 기자는 처음 봅니다. 방금 그 발언은 절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신 겁니까?”
“그렇지요.”
노아는 바로 인정했다.
“관장님 뿐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불필요한 오해와 소문이 많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강훈 형사님에게도 미리 약속드렸지만, 관장님께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전 이 사건의 진상이 완벽하게 드러나기 전까지는 기사를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강훈 형사님이라면 이강훈 형사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준호 관장이 흥미를 보였다.
“이미 경찰과 이야기가 되신 겁니까?”
“수사 협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는 거지요.”
노아가 설명했다. 이에 김준호 관장이 씨익 하고 웃어보였다.
“경찰에서조차 노아 기자님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것을 보니 정훈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인가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작은 아버지가 하신 말은 아마 많이 과장됐을 겁니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미 경찰과 협력 중이시라면 저는 왜 찾아오십 겁니까?”
김준호 관장이 뜬금 없이 물었다.
“전 이미 경찰에게 아는 사실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CCTV도 다 공개했구요. 저희 직원들도 모두 조사를 받은 걸로 압니다. 필요한 정보라면 경찰에게 다 받으실 수 있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이미 많은 정보를 받았지요.”
노아는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이 대답했다.
“다만 앞으로 화랑관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돌아다니게 될지도 몰라…… 미리 관장님께 허락을 받고 싶었습니다. 부디 양해부탁드립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정민은 문득 김준호 관장의 톤이 한층 부드러워졌다고 느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노아가 자신을 먼저 찾아 양해를 구한 것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경찰도 이미 동의했는데 제가 왜 반대하겠습니까? 기자님의 조사에 방해가 되지 않게 미리 이야기 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직원 분들과 따로 인터뷰를 좀 해도 될까요? 사건 관련 증언을 듣고 싶어서요.”
“물론입니다.”
김준호 관장이 그 역시 어려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미리 얘기해두겠습니다. 직원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제 허락을 구하실 필요가 없도록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노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사실 지금부터가 본론이었다.
“그렇다면 관장님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관장님께서 왜 어제 피해자와 따로 미팅을 하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