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수민은 어떨까.
주환의 이야기에서 수민의 이름이 지속적으로 언급됐다. 얼핏 들으면 수민이 계속 주환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민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직감이었다. 수민은 주환에게 개인적으로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아보였다. 그렇다면 아무리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라고 해도 계속 함께 있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수민이 언제 주환을 떠나 단독행동을 했냐는 거다. 정민은 이미 경찰을 통해 최소한 한 번 단독행동이 있었고 이것이 수민에게 매우 불리한 증거임을 알고 있었다. 과연 수민은 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수민님의 알리바이도 물어봐도 될까요?”
정민과 마찬가지로 경찰이 수민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들어서 알고 있는 만큼, 노아는 주환에게 물었을 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수민에게 물었다. 수민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입을 열었다.
“제 알리바이도 주환작가님과 거의 비슷해요. 아무래도 주환 작가님과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있었으니까요. 큐레이터기도 하지만, 아는 분이 주환 작가님밖에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주환 작가님과 함께 다녔죠. 관장님이 권유하시기도 했구요. 파티에 미술계 관계자들이 많이 올 예정이니 이번 기회에 작가님과 함께 인사를 하며 안면을 익혀두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구요.”
그래서 수민은 6시에 주환과 함께 연회장으로 이동했고, 7시쯤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7시 40분쯤에 주환과 함께 라운지로 이동해 계속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항상 주환을 통해서만 사람들과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주환의 주위에 있었다. 이를 확증해줄 목격자들이라면 수도 없이 많았다.
단, 그녀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라운지에 있지 않았다.
“8시 30분쯤이었을 거예요.”
수민이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업무적으로 확인해야 할 게 갑자기 생각나서…… 전시관을 한 번 둘러보고 오려고 했어요. 작가님께 양해를 구하고 동관 2층으로 올라갔죠. 거기서부터 작품들을 하나 하나씩 확인하면서 가다가 이하윤 작가님을 만났어요. 서관에서 봤을 거예요. 초면이었지만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알아봤죠.”
“그렇군요.”
노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민의 말에 호응했다. 마치 격려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윤 작가님과 인사를 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주환 작가님의 전시회를 담당하는 큐레이터라고 하자 관심을 보이시더라구요. 그다지 말 수가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전 남은 작품들도 마저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하윤 작가님께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어요. 떠나기 전, 주환 작가님과 다른 분들은 동관 1층 라운지에 계신다고 알려드렸더니 본인도 한 번 가서 인사를 하겠다고 했죠…….”
“맞아요.”
주환이 끼어들었다. 주환은 수민의 증언을 서포트 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8시 40분쯤에 하윤이가 라운지로 내려왔어요. 수민 씨와도 만났다고 했죠.”
“그랬군요. 그렇게 이하윤 씨와 헤어진 다음, 수민님은 서관 1층으로 간 건가요?”
이미 강훈을 통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노아는 모르는 척 물었다. 정민은 순간 수민의 얼굴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럴 만했다. 그녀가 용의선상에 오른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이 행동 하나 때문이었으니까.
“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어요.”
수민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중얼거리는 듯한 투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관 1층으로 가서 그곳 작품들도 다 확인했죠. 그러고 나서 로비를 통과해 라운지로 돌아왔어요. 그때 아마 8시 50분이 좀 넘었을 거예요. 손님들이 많이 떠나고 계시더라구요.”
“맞습니다. 저희도 그때쯤 떠났죠.”
노아가 맞장구를 쳤다.
“저희가 좀 더 일찍 떠났던 것 같습니다. 간발의 차 같네요. 저희는 수민님을 보진 못했으니까요.”
“예, 작별인사는 못드렸었죠.”
수민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이에 노아는 조금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곧 예의바르고 이해심 많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질문을 계속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저도 9시까지 라운지에서 손님들께 인사를 드렸어요.”
조금 더 편해진 얼굴로 수민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끝나고 부관장님과 기획팀장님과 잠시 미팅을 했구요. 라운지에 있는 방 중 하나를 이용했어요. 15분 정도? 짧은 미팅이었어요. 저도 그렇지만 두 분도 지쳐 보였어요. 그래서 자세한 얘기는 다음날 하기로 하고 마무리 지었죠. 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고 싶었지만 아직 도서관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직원에게 들었어요. 그래서 택시를 잡으려고 밖에 나갔는데 주환 작가님이 아직 계시더라구요. 늦었으니 같이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했고…… 전 10시 10분이 좀 넘어서 집에 도착했어요.”
“뉴욕에서 오신 걸로 아는데, 지금은 어디서 머물고 계시나요?”
“부모님 집이요.”
수민이 짧게 대답했다. 그 이상은 털어놓기 싫은 눈치였다. 다행히 노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두 분.”
고개까지 숙여가며 노아가 주환과 수민에게 또 다시 감사를 표했다.
“두 분의 이야기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쉽지 않은 자리였는데, 용기를 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질문이 생기면 제가 두 분께 다시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주환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기자님.”
“예, 작가님.”
“그…… 혹시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경찰이 생각하는 용의자가 누구인지…….”
주환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허둥댔다. 딴에는 수민을 위한답시고 물은 것 같은데, 질문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좋을지 갈피를 못잡는 것 같았다. 정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딱딱하게 굳은 수민의 얼굴을 볼 때 주환의 성급함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은 것 같았다.
“아직은 오리무중입니다.”
노아가 시원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경찰 수사를 보조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사실 저희도 그 정도로 중요한 정보를 받진 못하고 있구요.”
“하, 하긴. 역시 그렇겠죠? 민간인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줄 리는…….”
조금 낙담한 듯 주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나 이어진 노아의 말에 두 눈을 번쩍 떴다. 굳었던 수민의 얼굴도 순식간에 풀렸다.
“단, 지금까지의 정황과 두 분의 진술로 볼 때 두 분이 범인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노아가 목소리를 낮추고 중대한 기밀이라도 알려주듯 과장된 제스처까지 취하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요. 경찰조사도 너무 마음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두 분이 첫 목격자이자 신고자이다 보니 더욱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찰도 두 분을 의심하고 있진 않을 겁니다.”
“왜 거짓말을 했어?”
안심한 주환과 수민을 남겨두고 노아와 정민은 로비로 향했다. 두 사람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정민은 바로 물었다. 노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정민을 돌아보았다.
“뭐가요?”
“이수민 씨. 경찰 용의선상에 올라가 있잖아. 왜 경찰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냐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잖아요. 용의자 중 하나라고.”
“그럼 아무 얘기 안 하는 게 낫잖아. 왜 거짓말을 한 거야?”
“형 지인이니까요. 안심 좀 시켜드리고 싶었어요.”
하는 수 없다는 듯 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거짓말은 아니에요. 저 두 분은 범인이 아니에요. 이번 살인을 저지르는 게 불가능해요. 경찰도 곧 용의선상에서 수민 씨를 제외할 거예요.”
“주환 작가님은 나도 알겠어.”
정민이 모른척 추궁을 이어갔다. 사실 정민은 수민도 범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이수민 씨는 왜? 그녀는 사망추정시간 때 서관 2층에서 1층으로 이동한 유일한 사람이잖아.”
“강훈 형사님 말로는 2분 정도 걸렸다고 했죠.”
노아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아까 수민 씨랑 인터뷰하면서 제가 뭘 집중해서 봤는지 알아요, 선배?”
“뭘 봤는데?”
“키랑 팔뚝이요.”
노아가 대답했다. 이에 정민도 머릿속에서 방금 본 수민의 체형을 재구성해보았다. 키는 여자치고는 큰 편이었다. 170cm 이상이었고 힐을 신는다면 170중반 이상 가능해보였다. 팔과 다리도 길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늘었다. 그녀는 연예인 뺨칠 정도로 마른 체형이었다.
“운동을 하긴 하는 것 같은데, 근력 위주는 아닌가봐요. 힘이 세보이진 않더라구요.”
노아가 정확히 정민이 생각한 바를 지적했다.
“피해자도 남자치곤 지나치게 마른 체격이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에요. 수민 씨 같은 여성분이 기습한다고 그리 쉽게 제압당하진 않을 거예요. 그런데 고작 2분 안에 피해자를 제압하고 교살까지 한다? 수민 씨 같은 사람에겐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절대라는 게 없다고는 하지만…….”
“.......”
“반면 범인은 피해자의 얼굴을 철문에 박아서 단번에 제압했어요. 뒤에서 기습했다고 해도 웬만큼 힘이 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피해자는 키도 크잖아요? 상상해봐요, 선배. 범인이 뒤돌아 서있는 피해자의 뒤통수를 잡고 눈앞의 철문에 세게 때려넣으려면…….”
“도훈 작가 이상으로 키가 커야겠구나.”
드디어 깨달은 정민이 흥분해서 대답했다. 순간 오싹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남자일 수밖에 없겠어. 그것도 키가 크고 힘이 센…….”
“그리고 그제밤 화랑관에는 그런 남자분들이 몇몇 있었죠?”
기특하다는 듯 노아가 덧붙였다. 하지만 정민은 노아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부관장 정우현. 그는 키도 컸고 딱딱하고 각진 얼굴에 어울리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만약 화랑관 밖에서 봤다면 예술 쪽보다는 체육쪽 관계자로 착각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라면 도훈을 제압하는 정도가 아니라 번쩍 들어 올려 던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문득 뭔가 기억해낸 정민이 화제를 바꿨다.
“주환 작가님과 이수민 씨. 네 형님 지인들이라고 해도 너무 협조적이던데. 뉴욕에서 무슨 일 있었어?”
“별 일 아니었어요.”
얘기하기 부끄럽다는 듯 노아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였다.
“주환 작가님 가방이 도둑맞을 뻔 했는데…… 마침 범인이 아직 현장에 있어서 제가 잡아드린 것뿐이에요. 그 일 때문에 저를 신뢰하는 것 같아요. 수민 씨는 뭐 형이랑 잘 아는 사이니…….”
노아가 말끝을 흐렸다. 정민은 그게 무슨 뜻인지 더 물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중앙관 로비에 도착해있었고, 안내데스크의 직원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는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둘에게 다가가 세상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부드럽고 정중한 그의 어투에는 어떤 숨겨진 꿍꿍이나 의도도 없는 것 같았다.
“혹시 정우현 부관장님과 안세민 기획팀장님께 연락드릴 수 있을까요? 두 분의 시간이 괜찮으시면 잠깐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두 직원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곤란한 빛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