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정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아는 세민과 사소한 잡담을 주고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정민이 들어보니 두 남자는 날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노아가 ‘오늘 밤부터 비가 온다고 하네요’ 라고 하자 세민은 ‘그렇다더군요. 원래 어제부터 오기로 예정돼있었지요’ 라고 대답했다. 이에 노아가 ‘가능하면 오늘도 안 왔으면 좋겠네요. 밖에 있을 때 비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세민도 ‘저도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라고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다만 세민은 더 이상 노아와 잡담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직후 입을 다물어버렸다.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기 때문에 노아도 억지로 대화를 이어갈 시도를 할 필요는 없었다.
화랑관의 카페는 5층 중앙관에 위치해 있었으며 식당 바로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부는 꽤 널찍했는데 이는 직원들과 관람객들이 편히 앉아서 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카운터에 서있는 한 명의 직원 외에는 카페 안이 텅텅 비어있었다. 적어도 누가 엿들을 염려는 없겠다고 정민은 생각했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 세 사람은 카운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화랑관에서 대접하는 것이니 부담 없이 음료를 고르라고 세민이 권했지만, 노아와 정민은 나란히 가장 값이 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세민도 같은 메뉴를 선택했다.
주문한 커피가 모두 나오기 전까지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다. 노아는 계속해서 시덥지 않은 말만 늘어놓고 있었고 세민은 대충 반응만 해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커피가 나오기 무섭게 공기가 변했다. 정민은 노아와 세민이 암묵적으로 대화 시작의 타이밍을 미리 정해놓은 게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세민 팀장님은 화랑관에서 피해자를 전담했다고 들었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노아가 운을 뗐다.
“왜 그렇게 하셨나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요?”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커피 한모금을 마신 후, 세민이 입을 열었다. 커피가 쓴 것인지, 아니면 내키지 않는 것인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원해서 도훈 작가님을 전담한 것은 아닙니다.”
“아. 그럼 혹시 관장님의 지시로?”
“그렇습니다.”
세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작년 말쯤일 겁니다. 도훈 작가님과 저희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같이 했었는데……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저희 직원 중 한 명이 실수를 했습니다. 상당히 큰 실수였지만 어떻게든 저희 선에서 커버 가능한 정도였지요. 그런데 문제는…….”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세민이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도훈 작가님이 말 그대로 난리를 쳤습니다.”
세민의 말에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상상이 갔다. 강도훈. 그 성격에 아마 단순 난리 정도가 아니었으리라.
“개인적으로는 도훈 작가님의 반응이 좀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 실수였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지요. 사과나 단순 징계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결국 실수한 직원의 직위를 강등하고 부서까지 옮겼습니다. 그제야 만족을 하더군요. 그 이후로 관장님께서 도훈 작가님에게 오는 연락은 다른 직원에게 맡기지 말고 제가 직접 담당하라고 하셨지요.”
“굳이 팀장님이 맡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성격 때문이지요.”
세민이 피식 웃었다.
“도훈 작가님 정도는 아니지만 저도 좋은 성격은 못됩니다. 예민하고 까다롭다는 소리를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살았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도훈 작가님과 맞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기싸움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구요. 물론 저조차도 가끔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예를 들면 이번 7월 특별전시회에 참여시켜달라는 요청 같은?”
노아가 불쑥 던지자 세민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시는군요?”
“관장님께 들었습니다.”
“관장님께요?”
순간 세민의 안색이 변했다. 처음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진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군요.”
“안심하셔도 됩니다.”
노아가 재빨리 대답했다.
“모두 관장님께 허락을 받은 사안입니다. 관장님께서도 특별전시회 관련해서는 팀장님에게 물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요?”
세민이 반신반의하는 투로 노아에게 반문했다. 노아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을 풀었다. 노아의 해맑은 미소에 경계심을 누그러트린 것인지, 아니면 곧 들킬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아는 한 최대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결심을 굳힌 것인지 세민이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도훈 작가님이 요청하셨지요. 이번 7월 특별 전시회에 참여시켜달라고 말입니다.”
“곤란하셨겠군요.”
“말도 못하게 곤란했습니다.”
끙. 세민이 앓는소리를 내뱉었다.
“일단 7월 전시회 자체가 저희 화랑관에서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준비하던 이벤트였으니까요. 저희 입장에서는 굉장히 뜻깊은 행사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면서 세민은 입꼬리를 가볍게 씰룩여보였다. 정민은 세민이 무의식 중에 보였을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돌려 말하고 있긴 했지만, 세민은 7월 전시회가 김준호 관장의 은퇴 무대였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동기인 정우현 부관장이 다음 관장으로 내정되는 것이 확정되는 무대기도 했지.
그리고 그건 세민 입장에선 정말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민은 새삼스럽게 세민의 이모저모를 관찰했다. 세민 역시 키가 컸고 체격이 좋았다. 무슨 운동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철저히 몸관리를 하는 사람 같다는 인상이었다. 체격 조건만 따지자면 세민 역시 범행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미 이하윤 작가님의 단독전시회로 확정돼 있는 상태였습니다.”
세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떠올려도 답답하다는 듯했다.
“그런데 도훈 작가님이 그 사실을 알아낸 겁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화랑관 내부에서 정보가 유출된 건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세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노아의 질문에 살짝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노아는 눈치 채고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넘겨짚었네요.”
“아닙니다.”
다행히 세민은 노아의 사과를 바로 받아주었다.
“저희도 그런 의심을 가지고 있긴 했습니다. 내부조사도 했지요. 하지만 딱히 어디서 정보가 새나갔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준비에 투입된 일부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내부에서도 비밀에 부치고 있던 터라 내부직원 소행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려웠지요.”
“그렇군요.”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노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세민이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느닷없이 도훈 작가님에게 연락이 온 겁니다. 제게 말이죠. 7월 특별 전시회에 꼭 참여하고 싶으니 하윤 작가님과 공동 전시회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억지를 쓰더군요. 전 당연히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경우 없는 요청이었지요. 게다가 저희 입장에서는 작년 말 그 소동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도훈 작가님과 협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구요. 그런데…….”
“그런데요?”
“하도 관장님과 직접 얘기하겠다고 떼를 써서 관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직접 통화를 한 번 하셨습니다. 그때부터였지요. 상황이 이상해진 게.”
“이상해지다뇨? 어떤 점이 말입니까?”
흥미진진하다는 듯 노아가 바로 물었다. 세민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도훈 작가님의 억지를 관장님이 딱 잘라 거절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럼 받아들이셨다는 건가요?”
“아뇨.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제 와서 도훈 작가님을 참여시키는 건 무리였죠.”
세민이 손사래까지 치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강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곧 뭔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애매한 상황이 돼버렸지요. 관장님께서 도훈 작가님의 청을 거절하지도, 그렇다고 수락하지도 않은 채 시간만 흘렀으니 말입니다. 이후 관장님께서 도훈 작가님과 몇 차례 더 통화를 하신 것 같습니다. 심지어 직접 만나기도 하시구요.”
“그렇군요. 혹시 관장님께서 왜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는지 팀장님에게 따로 말씀하신 게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세민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우현…… 부관장은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따로 들은 바가 없습니다. 대신 도훈 작가님에게 몇 차례 연락이 오긴 왔지요. 그 양반도 제게 자세한 내용은 얘기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항상 자신감에 차있긴 했습니다. 본인이 7월 전시회에 참여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입니다.”
세민이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이번에도 정민은 세민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머리가 아파서 한숨을 쉬는 것인지, 아니면 도훈이 죽어서 특별 전시회 문제가 해결돼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노아가 물었다.
“피해자의 마지막 전화를 받으신 분이 팀장님이라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조금 더 신중해진 얼굴로 세민이 대답했다.
“파티 중이었죠. 참석자 분들이 대부분 식사를 끝내고 라운지로 이동한 후였을 겁니다. 갑자기 도훈 작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죠.”
“경찰은 관장님과의 미팅 후 전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더군요.”
“맞습니다. 본인도 그렇게 얘기했으니까요.”
“팀장님도 알고 계셨나요? 그날 피해자가 관장님과 미팅을 가질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다시 세민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7월 전시회 관련으로 미팅을 잡은 것으로 압니다. 그때문에 주환 작가님을 위한 파티에 도훈 작가님을 초대한 거구요. 다만 자세한 내용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우현 부관장이 동석한 것으로 아니 부관장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아가 싱긋 웃으며 바로 넘어갔다.
“혹시 피해자가 팀장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세민이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해보였다.
“7월 특별 전시회 참여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으니 미팅을 하자고 하더군요…… 그때 계셨으니 아시겠지만 전 그럴 정신도 여유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도훈 작가님의 말도 믿을 수가 없었구요. 제가 아는 관장님은 그런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실 분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일단 알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지금은 너무 바빠서 만나기 힘들 것 같으니 내일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죠. 또 한소리 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바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피해자에게 연락하셨죠?”
“예. 일단 먼저 관장님과 이야기를 했죠. 아니나 다를까, 관장님께서는 결정난 바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뭔가 오해가 있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중간에서 내 입장만 또 난처해지겠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연락을 하기로 했으니 전화를 걸었습니다. 받지 않더군요. 그래서 확인하는대로 전화 달라고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만 남겼죠. 설마 살해당했을 줄은…….”
세민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도훈의 죽음을 눈곱만큼도 슬퍼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억지로라도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건 아마 이번 살인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심정일 거라고 정민은 생각했다. 적어도 생전 도훈이 어떤 작자였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