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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채환 Oct 27. 2023

[페미니즘의 도전]

함께 책 읽기 ①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 읽게 된 계기

 :  [인생샷 뒤의 여자들]이란 책을 우연히 신문에서 알게 되어 사서 읽었는데, 그 책의 작가가 본인이 여성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큰 영향을 받았고 이쪽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라고 언급해서 읽게 되었음.     



■ 감상 및 추천

 :  "인간이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라는 이 책의 구절이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비단 이 주제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나) 성별에 따른 입장 차이뿐 아니라 강성 지지부터 강성 혐오까지 입장 차이가 매우 크고 다양해 보인다  

 지금 읽고 있는 정재승교수의 [열두 발자국]에는 또 이런 문장들이 있다. "...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 태도란 논리적 관점에서 상황을 들여다보고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찾고자 노력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회의주의자'로서의 삶의 태도를 권해드립니다. ... 회의주의적인 삶의 태도란 어떤 것도 쉽게 믿지 않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려 애쓰는 태도를 말합니다. 근거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항상 틀릴 수 있다는 열린 태도를 말합니다." 

 어떤 주제, 현상, 사건에 대해 사회적으로 많이 다루어지고 비판, 지지, 평론이 쏟아질 때 그것들을 소비하는 시간에 비해 정작 그것에 대해 직접 공부하고, 생각하고, 나름의 의견을 정리해보는 시간은 얼마나 부족한지 자주 반성하게 된다.

 M.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지도 그리기'에 비유했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라고 일찌감치 지도를 완성해 놓고 나서, 자기가 이해한 세상 즉 자신의 지도와 일치하지 않는 정보를 만나게 될 때 그걸 인정하고 수정하는 사람도 있고, 그 대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여성학이라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 대한 지도를 새로 그려보거나, 좀 상세히 하고자 하거나, 수정해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주제를 떠나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현상을 매우 날카롭게 관찰하고 그 이면에 깔려있는 권력관계, 이데올로기 등을 파헤친 작가의 통찰이 매우 돋보여서 읽는 내내 부러움을 느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 러네이 엥겔른

  : 보여지는 모습을 가꾸기 위해 여성들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열정을 쓰고 있는지, 

  친밀감 형성 등을 위해 나누는 body talk 등이 우리를 정말 친밀하게 하는지 좌절감을 함께 나누게 하는지, 

  그 시간  동안 남성들은 무얼 하는지 등. 외모보다 스스로의 능력에 더 집중하자는 제언. 

 

▶ [인생샷 뒤의 여자들] - 김지효

  : 왜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사진을 (꽤 많이)찍고, 고르고, 보정할까 궁금했음. 그런 행동의 역사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매우 길다는 사실. 현실의 나 vs 가상공간속 또다른 나의 자아, 보는 나 vs 

  보여지는 나 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다루었음. 

 

▶ [20대 남자] - 천관율, 정한울

  : 소위 '이대남' 이라는 불리우는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이고, 어떤 배경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떤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 자세히 담겨있음. 



■ 주요 문장 (요약 또는 마음에 드는 문장) 

[머리말]

여성운동의 기본 목표는 여성이 가족, 국가, 민족 등 남성 사회가 원하는 성역할 규범에서 벗어나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하는, 여성의 인간화였다.


나의 젠더의 구분

첫째, 성별 분업에 대한 문제 제기로서 여성주의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여성주의는 대개 성별 분업, 즉, 성(차)별에 대한 자유주의적 평등 차원의 문제 제기이다. ... 성차의 역사와 현실을 드러내는 투쟁만도 앞으로 5천년은 더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사회, 인간, 자연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요소 혹은 분석과 파악의 원리로서 젠더이다. ... 젠더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대부분인데도, 젠더 시각에서 사회를 분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 여성주의의 문제의식이다.

셋째, 성별을 초월하여 새로운 대안적 인식론의로서의 여성주의다. 


조건이 열악한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사회에 고마운 마음을 지니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돌파하는 데 여성주의 인식만큼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금, 여기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양보의 결과이다. ... 감사는 예절이나 긍정적 태도,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더욱이 편안할 수 없다. 다른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모든 물음은 질문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질문 내용은 질문자의 입장과 관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물음에는 이미 특정한 형태의 답이 전제되어 있다.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 


여성주의는 성별 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자들과의 소통, 그리고 다른 사회적 모순과 성차별의 관계에 주목한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그 어떤 정치학보다도 다른 사회적 차별에 매우 민감하며, 다양한 피억압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연대와 제휴의 정치이다.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이지, (남성 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은 그것의 구조와 원인, 역사를 규명하려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깊이, 크기를 깨닫는다.


상처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 조건이다. 상처가 클수록 더 넓고 깊은 세상과 만난다. ... 그러므로 편안한 상태에서 앎이란 가능하지 않다.


단일 원인을 주장하고 '주적을 규탄/타도'하기 보다는 문제가 전개되는 맥락에 대해 사유할 때, 문제가 구성되는 과정에 개입할 때, 자기 성장을 피하기 위해 타자를 찾는 일을 포기할 때, 다른 상상력을 가질 때, 저항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디.  


변화와 성장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고정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다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고통을 '자원화'할 때 가능하다. ... 고통은 변형되어야 하되 잊혀져서는 안 되고, 부정되어야 하되 지워져서는 안 된다.


내기 이 책에서 가장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성의 관점으로부터 여성, '나'를 정의하지 말고, 서구(이성애자, 백인, 비장애인, 부자, 서울사람...)와의 관계로부터 '우리'를 정의하지 말자는 것이다. 


1부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여성학이나 여성운동을 여성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이렇게 억압받고 있다")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가가 아닌, 즉 정치학이 없는 전문가는 의미가 없으며, 운동가는 이미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그 경게의 위계를 깨는 것 자체가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하지만(꿈꿔보지만), 사람들은 늘 나를 어느 한편으로 규정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여성', 이 독특한 정치적 약자들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자기를, '자기편'을 부정할까? ... 남성은 적이 아니라는, 여성들의 자기다짐과 남자를 안심시키는 발언들, 그리고 남성들과 대립하고 싶지 않은 자기 최면의 배후에, 혹시 '가부장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라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여성들은 안다. 장애인이나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때와는 다르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을 사회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여성에게는 언제나 권리보다 도리(의무)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을...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 "제가 바깥일을 하지만 애들 아침밥은 꼭 치려주고 나와요."


여성운동가에게 사회의식이 없다는 말은, 여성 문제는 개인적 문제이지 사회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여성 의식은 사회의식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여성운동에 대한 가장 일발적인 편견은, 가부장제는 독자적인 모순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작동케 하는 구조의 일부에 불과하며, 페미니즘은 중산층 여성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 시키자는 것이다. ... 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남성에서부터 성폭력과 가정폭력 가해자까지 다양한 남성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마초'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이들은 모두 내가 먼저 칭찬과 격려로 자신을 보살펴주기를 바란다. 이른바 '지혜로운 여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로'하기 전에는, 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남자의 기를 살리자는 식의, 남성을 불쌍히 여기는 담론이 만연해 있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가부장제이지, 여성의 '직설적인' 목소리가 아니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만일 여성학이 어렵다면, 그것은 여성학자가 현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익숙하지 않은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까?

여성은 특정 연령층이 되면 (아마도 30대부터), 혹은 소위 '아줌마 체형'을 갖게 되면, 결혼과 출산 여부와 상관없이 당연히 어머니로 호명되고 어머니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여성은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고, 남성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성보다 더 많이 받는다. 잠재적 어머니로 분류되는 여성노동자는 노동 시장 진입에서 임금, 승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냐, 노동자냐'라는 정체성을 택일할 것을 강요받거나, 택일하지 못할 바에야 둘 다 완벽하게 해야한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인 사이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개인으로서 여성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라는 생각 때문에 여성은 다 같다고 같주된다. 그래서 한 여성의 실수나 무능력은 언제나 전체 여성을 욕 먹이는 일이 된다.


공적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은 두가지다. ... 남성은 여성과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대개 예외 없이 '누이 같다' 혹은 '어머니 같다'는 말로 친근감을 표시한다. 또 다른 방식은 여성을 '여자'로 보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분류하는 방식인 성녀(聖女)와 성녀(), 정숙한 여성과 순진한 여성, 본처와 애첩, 아내와 애인... 은 배타적인 범주 같지만 남성을 위한 여성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같다. ...  남성 판타지가 원하는 것은 성애화된 모성, 모성화된 성애이다. 대개의 부부 싸움, 아내에 대한 폭력은 아내가 '어머니 같은 이해심'과 '성판매 여성의 섹시함'을 동시에 감당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 간 권력 관계의 표시이자 점령지로 간주된다.


미혼모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은 아버지가 있어야 어머니와 자식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가부장제는, 가족은, 국가는, 민족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활용/매개/동원함으로써만 유지된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그토록 어머니로 호명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로 간주되는 여성은 성적 주체가 될 수 없고, 자신의 몸을 가질 수 없다. 그의 몸은 남성만이 주체가 되는 가족과 국가의 소유이다.


어머니의 일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미숙련 노동이라는 인식은 공적 영역에서도 확장되어, 노동 시장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낮은 평가와 연결된다. ... 배려와 보살필, 감정노동을 중요한 노동 요소로 요구하는 사회복지사나 간호사, 유치원 교사의 저임금은 이들 노동의 특징이 어머니의 노동을 닮은, 성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학력과 연령대의 남녀가 담당하는 경비원과 여성청소부(사실 청소의 노동 강도가 더 세다)의 급여가 다섯 배 격차가 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일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부분의 가정폭력은 가해 남편이, 아내가 어머니/며느리로서 성역할 규범을 어겼다고 판단했을 때 발생한다. 성역할 불이행이 '맞을 짓'이 된다는 사실은, 이 노동이 여성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대개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를 대할 때 어머니와의 관계부터 묻는다. 정신 질환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은 아버지와 자녀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문제삼는다.


오늘날과 같은 모성 이데올로기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어떤 것이라도 쓸 수 있는 백지상태'라는 관점과 함께 탄생한 것이다. 이후 어머니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아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엄청난 부담감과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


문제는 어머니의 권력과 여성의 권력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지위가 높은 사회일수록 여성의 지위는 낮다. ... 어머니의 권력은 결국 출세한 아들의 권력에서 나온다. 어머니의 행복한 삶은 잘난 아들을 통해서(정확히 말하면 아들의 아내의 노동력을 통해서) 보장된다.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는 결국 젠더 문제다. 여성의 자아실현과 인생의 성공은 자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합의다. ...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성공하더라도 어머니의 정체성과 역할이 우선적으로 강조된다. 


우리 사회의 아줌마에 대한 혐오 담론은, 그들이 모성(남을 보살핌)과 섹슈얼리티라는 핵심적인 여성성을 상실한 집단이라는 인식에서 온 것이다. 


딸은 어머니를 자신에게 투사하지 말고 스스로 욕망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사회는 여성과 어머니를 분리하고, '성스러운' 어머니의 일을 남성에게도 부과해야 한다.


▶여성주의,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

전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낮은 국가는 인도인데, 대신 인도는 기혼 여성의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누가 나더러 여성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라는 말을 소개한다. "착한 여자만이 천당 갈 수 있다."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생각이라면 ... 여성주의는 남성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든 증오든 이제까지 남성에게 쏟았던 기운을 여성 자신에게 돌릴 것을 제안한다.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다. ...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남성이 아니라)>, 앵그르의 <욕탕의 여인들(사람들이 아니라)>이다. '유관순 언니'가 아니라 '유관순 누나'이다. 


말 자체가 여성 혹은 남성에게만 해당하거나 여성 비하적이어서, 성별에 따른 역할 분리(차별)를 규정하고 당연시하는 경우도 많다. 미혼부라는 말은 없다. '걸레'는 남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영웅'은 여성을 뜻하지 않으며, ... '연상의 여인(연상의 남성은 없고)' .. '여성 상위(남성 상위는 없고)' ... 한국 사회의 태아 성감별과 여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 침해 사안인데도, 그 원인이 되는 남아 선호 악습을 굳이 '남아 선호 사상'이라고 부른다. 살인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폐습을 굳이 '사상'이라고 칭할 필요가 있을까?

여성은 흔히 '곰과 여우', '본처와 애첩', '성녀(聖女)와 성녀()', '어머니와 창녀"로 구분되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여성은 남성 주체의 개척 대상인 자연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 왔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 남성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이름에서 비롯된 아메리카(America) 대륙은, 아메리고의 여성형이다. '자궁(子宮)'은 남아가 사는 곳이다. 여성의 질을 뜻하는 버자이너(Vagina)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칼이 머무는 '칼집'을 뜻한다. ... 폐경보다 완경, 처녀막이 아니라 질주름, 삽입 성교보다는 성기 결합, 미혼이 아니라 비혼이 듣기에도 좋고 상호적이지 않은가.


'똑똑한 여성'은 '특이한 여성'을 의미한다. 남성 사회는 여성이 언어를 갖는 것, 똑똑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 근데 미국에서 국민 의무교육이 실시되었을 때도 흑인 노예와 가정주부는 예외였다. 사회는 이들이 교육을 통해 자기 노동의 의미를 깨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언어는 자원과 권역이동의 전제이며 시작이기 때문이다. 

주류의 언어를 규범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익힐수록 이들은 더욱 열등해지지만, 이들이 자신의 경험과 노동에 근거하여 자기 언어를 갖기 시작하면 말할 수 없이 '똑똑해진다'. 저항할수록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남성 소비자가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으로 만족할 때 발생한다.


'위안부 누드' 사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인간의 감성과 사랑이 평등이나 정의가 아니라 지배와 폭력을 에로틱하게 느끼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등을 에로틱한 것으로 느낀다면, '위안부 누드'는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여성의 고등교육 '수혜율'은 세계 최상위권인데, 취업율과 취업의 질은 100위권 밖이다.


'여성 정치인 시대'가 여성운동의 성과임은 분명하지만 개인의 뛰어남, 집안 배경, 도덕적 상징, 신선한 이미지 활용이라는 면에서 여성의 '진출'이라기보다 남성 문화의 '선택'이라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남성 정치인은 지역, 정치적 입장, 경력, 학연 등으로 분류되는데 왜 여성은 성별이 유일한 기준이 될까?

고학력, 중상층, 어느 정도 고귀한(?) 여성성, 우리 사회의 주요 네트워크 출신이 아닌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노동자, 장애인, 다문화가정 출신 등 성별 이외의 범주로 분류된다. 중산층 여성만을 규범적 여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근헤 후보는 여성이 아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숫자가 2라는 사실 외에는, 여성과 가장 거리가 먼 여성이다. 그는 여성도 국민도 대변하지 않는다. 그의 몸은 '아버지 박정희'를 매개한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화신'이다. ... '대통령 박근혜'는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근대 민주주의의 성과가 아니라 신분사회의 부활이다. 


▶사랑과 섹스

남성은 성취를, 여성은 관계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도록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여성이 상대적으로 외로움에 더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남성은 대개 독립심과 자립심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아왔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 이제까지 여성은 남성의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사람들이었지,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었다. ... 스트레스 탈출을 위한 술, 담배, 스포츠, 섹스, 여행, 낚시 등의 기호/취미 생활 역시 남성들에게 훨씬 더 개방되어있다. 사회는 남성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만, 여성의 외로움은 '사소한 일'로 취급한다.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여성들이 남자와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상대방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 속에 내재된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을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 남성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는 가족이나 연애 관계에서 관계성을 경시 혹은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 노동, 감정 노동, 정신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관계에서 남성의 '과묵함'이나 모든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때문이다. 


호나이에 따르면, 여성의 성공은 자신의 여성성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공을 두려워하고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남성의 외로움은 보살핌의 가치나 감정 영역을 폄하해 온 남성 문화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남성 외로움의 '가해자'가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들도 타인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감정 노동의 영역에 참가하는 것이 남녀 모두가 사는 상생의 길이다. 


남성 문화는 남녀 관계의 진도를 대화나 가치관의 공유보다는 상대 여성의 몸에 어디까지 '도달'했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이는 남성의 본능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학습의 결과이다. 섹스가 남녀 관계의 종착역이라면, 섹스 이후 두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권력과 자원을 가질수록 많은 여성과 섹스를 한다('가질 수 있다'). 반면,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남성들은 한 여성을 다른 남성과 공유한다. ...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한 명의 남성하고만 섹스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많은 남성을 상대해야 한다.


남성들에게 성과 폭력('박진감', '거친', '짜릿한' ....)은 분리되지 않는다 ... 남성은 성폭력 상황에서 여성의 목숨을 건 저항을 '자극'으로 이해하고 수용한다. ... 가해자인 남편은 '부부 싸움 후 섹스로 화해'했다고 만족하지만, 피해자인 아내는 '구타 후 강간'당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무게는 절제와 인내력 등 자기 관리의 지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정체성과 인격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물론 뚱뚱한 남성도 환영받지 못하지만, 몸무게가 일상적으로 남성의 삶을 통제하거나 규율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체중은 곧바로 취업/결혼/대인관계/자존감으로 연결되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가부장 사회에서 먹는 양을 조절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어머니나 친구 등 주변 여성들이 나서서 협박에 가까운 걱정과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식욕과 성욕은 모두 혐오스런, 최소한 바람직하지 않은 여성성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섹스와 음식 만들기는 가부장제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노동이다. 즉, 음식과 성을 노동으로 강요받는 사람은 여성이지만, 여성은 음식과 성을 즐길 수도 없고, 욕망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사회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몰두할 뿐, 여성이 자기 몸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여성은 남성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만든다.


왜 거식과 폭식 등 섭식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의 95%가 여성일까? ...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이 좌절이나 분노, 우울증 같은 학대당한 경험을 표현하는 것을 억압하는데, 여성이 자기 고통에 직면하지 못할 때 섭식 장애가 나타난다. ... 폭식은 남성의 투사(남 탓으로 돌리는)와 대비되는 여성의 내사(가기 탓으로 돌리는)로 일종의 우울증인데, 사회가 싫어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자기 처벌이다. 


타인의  내 몸에 대한 판단은, 내 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경유한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이 먼저다. '아름다운' 몸은 자기 사랑의 수많은 열매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의 사회진출'? 그렇다면, 여성이 생활하는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 논리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은 강력한 가족주의 사회지만, 당위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강요하고 신화화할 뿐이다.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은 친밀성과 자발적인 상호 보살핌의 공간이 아니라 지나치게 도구적이다. '기러기 아빠'는 이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이는 남성이 희생하는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족이 자녀 교육의 성공, 즉 출세 지상주의와 경쟁 논리로 가득 찬 공적 영역에 얼마나 종속적인지를 보여준다.


신경질적인 반공주의, 레드 콤플렉스가 집요한 사회에서는 타인을 '빨갱이'로 지목해야만 내가 '빨갱이'가 이니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시민권은 "너는 빨갱이다!" 이 한마디에 얼마든지 박탈될 수 있다. 이처럼 협박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유하는 문화적 신념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여성이나 흑인, 장애인 모두 누군가 '찬성'하지 않아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동성애자 역시 누군가의 '동의'와 '허락'이 있어야먄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동성애자임을 알리겠다는 위협이 한 사람의 인권을 몰수하는 '권력'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퍼져 있는 동성애 혐모문화 때문이다. 


문제는 성범죄의 원인이 성별 권력 관계의 불균형 때문이지, 남성 호르몬 과다로 인한 생리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화학적 거세'는 문제를 왜곡하면서 주의를 분산시키는, 이 경우에는 매우 질 나쁜 맥거핀(속임수나 미끼)이다. 


"남자는 참을 수 없다." ... 가해자들의 이야기는 나이, 학력, 계층과 무관하게 사전 회의라도 한 듯 똑같다. 이는 이들의 성 인식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범죄의 원인은 일상의 성차별, 성역할 구조인데, 이를 수용하게 되면 모든 남성은 피곤해진다. 남성은 잠재적 피고인이 되지 않기 위해 기존의 여성관, 세계관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수 '변태'의 문제로 축소하면 성범죄는 남성문화의 결과가 아니라 특정 개인의 문제가 된다. 


2부

▶가정폭력의 정치학

자신만이 인식 주체라고 생각하는 남성의 생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억압은 자신이 경험한 억압이다. 그 외의 사회 문제는 부차적이고 특수하고 주변적인 것이 된다.


젠더 정치의 시각에서 본다면, 좌파와 우파 모두 남성 중심적 정치전선을 강하게 유지하려 한다.


사회적 소수자를 정치적 주체로 보고 이들의 고통을 정치적 의제로 설정하기보다는, 기존 진보를 '풍부하게'하기 위해 동원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한국은 정확한 통계조차 없으나 미국에서 살해당한 여성들의 약 42%는 이전 또는 현재 파트너에 의해 죽는다. ... 미국에서 아내 구타는 강간, 자동차사고, 강도를 합한 것보다 많은 외상의 이유이며 여성 상해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비바람은 집안에 들어가도 법은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가 이제까지 가정폭력을 방치/지지하는 논리였다. 물론 이 논리는 거짓이다. 같은 가정 내 폭력인 아동학대나 노인학대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불개입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목숨을 위협하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남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 가장폭력 방지법으로 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 한다.


남성이 남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억압이고 이에 대한 저항은 투쟁이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이거나 집안 일, 혹은 기껏해야 '격렬한 로멘스'로 간주된다. 여성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당한 아내의 고통은 한국 사회구조에서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매 맞는'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

내게 상담을 청한 어떤 성폭력 피해 여성은, 칼을 들고 덤비는 성폭력 가해자를 설득하여 임신과 성병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게 했다. 나는 그의 행동을 칭찬했지만, 그에게 고소를 적극적으로 권할 수는 없었다. 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 각본에서, 이 여성의 뛰어난 행위성과 협상력은 '섹스(강간) 동의'를 의미한다. 여성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있어야만 피해가 인정되고, 피해자로서 '권력'을 부여받게 된다. 


성폭력 '피해자 중심주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실현되기 힘들며, 피해자 진술의 객관성은 피해자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인권

인간의 범위는 자연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 차별주의, 인종주의, 서구 중심주의, 가부장제, 비장애인 중심주의, 이성애주의 등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권력 관계의 역동 속에서 결정된다.


서북청년단이 "우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빨갱이'를 죽였다."라고 말한 것이나, 아내폭력 가해자들이 "나는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다."라고 주장하는 사례 등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진보는 인간의 범위가 확대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이 부여되는 과정을 말한다. 


성폭력 사건의 80%는 아는 사람에 의한 것인데, 이는 성폭력이 남녀 간의 '정상'적인 성/사랑과 질적으로 다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 - 성매매 - '아름다운 성과 사랑'(이성애)은 모두 불평등한 성역할 제도의 연속선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린이 성폭력이나 윤간 등 남성의 기준에서 볼 때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피해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폭력은 가시화 되기 어렵다.


한국의 성폭력 신고율이 2~6%에 불과한 것은, 신고할 경우 더 큰 패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여성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 현행법상 명예훼손은 피해 여성이 여성단체에 상담하는 등 피해 사실을 제3자에게 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이렇게 5천년이 넘은 성별 권력관계의 역사성을 무시한 채, 인권의 보편성을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사회적 강자의 이해를 실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은 사법권을 가진 국가를 상대로 용의자와 재소자의 권리 차원에서 주장되어야 하는 것이지, 피해 여성을 상대로 경합되거나 주장될 수는 없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아무 때나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 규범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저항일 때만 권리로 존중될 수 있다. 기존 대부분의 포르노그래피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여성 인권 침해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그래피를 반대하는 것은, ... 현재 제작, 유통되고 있는 포르노그래피가 성폭력을 '정상적인 섹스'로 묘사하여 성폭력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 '가족임금제'가 만들어졌다. 남성이 가족을 부양한다는 전제 아래 고융/임금/승진/직업 훈련 등에서 남성 노동자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가족 임금제 사회에서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대단히 어렵다. 


가정은 남성의 입장에서 공적인 곳과 달리 경쟁이나 권력 관계, 노동이 없는 평화로운 안식처로 여겨진다. 때문에 가족은 비정치적인 공간이어서 법이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까지 가정 내 폭력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주된 근거는 개인(구타 남성)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였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은 인간이 아니므로 여성의 프라이버시는 남편에게 속해있으며, 폭력당하는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대 학생들의 이화여대 축제 난동 사건. .. 이화여대 학생들과 여성운동가들은 이 사건을 '성폭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여론은 ... 고려대 학생들의 '젊음의 낭만, 장난스러운 놀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폭력을 강간으로 한정하는 해석이다. 이 사건은 여성 공간 침탈, 여성의 자율성 침해, 실질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성폭력에 해당한다. 

더욱 중요한 시사점은 평화시 남성 중심적인 놀이 문화가 바로 전쟁시에 집단 강간이나 대량 학살과 같은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사티는 인도 사회의 카스트 제도 중 최상층인 브라만 계급의 여성들이, 남편이 죽어 화장할 때 산 채로 뛰어드는 아내 순사 관습이다. ... 인도의 독립운동가들은 영국 정부가 사티 금지를 민족 문화 침탈로 간주하고, 인도 독립운동 과정 내내 규탄과 저항 대상으로 삼았다.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가부장제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부녀'에 대한 침해죄 - '사유재산권' 침해 - 가 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 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 '배신자'로 간주된다.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려는 여성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남자 앞길 망칠 여자'라는 비난이다. 


최근 불가피한 글로벌 경제 현상처럼 논의되고 있는 이주 남성 노동자의 매춘할 권리가 인권인가?


일부 남성 장애운동가의 장애남성의 성을 살 권리 주장에 대해

첫째, 사회가 장애 여성의 성적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장애 여성이 남성의 성을 살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이 입장을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괄하는 보편적인 장애인권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둘째,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성 활동(여기서는 성매매),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셋째, 위와 같은 일부 장애 남성들의 주장은, 비장애 남성으로부터 받는 차별을 비판하기보다는 비장애 남성의 '남성다움', '정상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비장애 남성이 누려왔던 권력이자 잘못인 성폭력, 성매매를 장애 남성도 똑같이 하는 것이, 장애 남성과 비장애 남성의 '평등'인가? ...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인권 개념의 재구성은, 이제까지 지배 규범이었던 비장애 남성 섹슈얼리티를 "우리도 똑같이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적 타자들이 연대하여 대안적인 성 문화를 생산할 때 가능하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폭력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별 제도, 젠더라는 사회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범죄라는 여성주의의 주장과 모순된다. 여성이 성적인 권리를 스스로 결정,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에서는, 성폭력 피해의 책임 역시 여성이 지게 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자유주의적으로 해석될 때, '10대 원조 교제(청소년 성매수)', '자발적 매춘', '낙태'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여성 개인이 마음대로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행사한 결과로 이해되기 쉽다.


여성의 자기결정은 여성의 정신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되거나, 약자인 여자의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성적 자기결정론은, 개인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 내용이 사회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추상적, 현실 초월적인 논리이다.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은 근대 자유주의의 남성 논리를 비판하기보다, 기존의 논리에 여성도 포함시켜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고, 이는 여성의 삶에 기반을 둔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여성주의의 최종 목표하고 할 수 없다.


이제까지 '양성 평등'은 남성이 여성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은 '공적 영역'으로 진출했지만, 남성은 그만큼 '사적 영역'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남성 중심의 같음을 의미하는 '양성 평등' 이념은, 여성에게 임금 노동과 가사 노동의 두 영역에서 이중 노동을 결과를 초래하였다. ...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적인 노동'을 하는 것은 수치와 무능력으로 여겨진다.


같음의 기준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때,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해도 차별받고 다름을 주장해도 차별받는다. ... 여성이 남성과의 차이를 주장하면 남성 사회는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고, 같음을 주장하면 사회적 조건의 다름은 무시한 채 남성의 기준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양성 평등'을 '여자도 군대 가라." "여자도 숙직해라."로 이해하는 것이다.


▶나이 듦, 늙음 그리고 성별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자 범주이다. 지식인, 여성 지식인, 게이 지식인이란 말은 있어도 노인 지식인이란 말은 없다. 지식인이나 정치인, 재벌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고 불리지 않으며 그들도 스스로를 노인이라고 정체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이것은 나이 듦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에 맞는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보는 시선은 '패배자' 그 자체다.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개선하기 두려워하는 사회는 성별 제도를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하고 이를 정치화하려는 페미니스트에게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연령주의의 문제화를 회피하는 사회는 나이 듦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질서라는 식의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아줌마'에 대한 혐오는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가 나이 든 여성에게 가하는 처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0대, 20대 초반 여성은 또래 남성보다 권력이 많다. 그러나 (물론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0대쯤에 이르면 여성과 남성의 권력은 비교 불가능하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젊고 예쁜 여성은 '억압받지 않는다.'


남성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개념은 대단히 협소하다. 정숙하고 젊고 예쁜 여성만이 여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성별 사회에서 '여성적' 자원과 '남성적' 자원은 동등하게 평가되지 않는다. '여성적 자원'인 몸은, 소멸하는 유한한 자원이지만 남성의 자원은 그렇지 않다. 남성은 일생동안 남성으로 산다.


나이 듦이 곧 죽음을 의미하지 않지만, 여성에게 나이 듦과 늙음은 같은 말이다. 대개 중산층 이상의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권력과 자원에 접근할 가능성이 높지만 여성은 그 반대다. 


남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몸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몸의 기능과 상태(나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의해 형성된다.


사적인 영역이라고 불리는 성과 사랑, 가족 질서에서뿐만 아니라 공적인 노동 시장에서도 여성 섹슈얼리티는 노동 자원으로 간주된다. 현재 20대 미혼 여성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행사 도우미' 같은 판매 서비스, 대인 서비스직은 가사 노동과 유사한 단순 노동으로 간주되면서도 젊음과 외모를 중요한 노동 요소로 요구한다.


성별 사회에서 연애는 결국 성별 자원의 교환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원하는 것은 '몸'이거나 보살핌이며, 여성이 남성에게 원하는 것은 자원이다. 


장애인 공중 화장실에 남녀 구분이 없는 것, 여성 노인을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모든 여성 노인을 할머니로 간주하는 것 등이 그 사례이다. 할머니는 모성만을 간직한 존재라는 판타지는 너무 강력하다. 여성 노인/남성 노인이라는 지칭 대신 할머니/할아버지라는 가족 내 성역할 호칭으로 이들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은, 가족이 지닌 비정치적 이미지를 이용해 이들의 문제를 탈정치화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 조건의 사람 - 남성이 연상인 미혼의 젊은 중산층 선남선녀의 이성애 - 들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각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심리적 타자들 - 장애인, 노숙자, 나이 든 여성들 - 에게는 성과 사랑의 욕망이 없다고 상정하기 쉽다.


자기 경험을 뛰어 넘어 타인, 더구나 타자의 억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특정 연령대의 '생산성 높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매우 위험하다. 그들이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 여성들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대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다. 나이 든 사람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시선을 다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반연령주의 정치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3부

▶'성판매 여성'의 인권

... 성판매 방지법 시행으로 생활 수단을 잃은 성판매 여성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켜보는' 여성주의자 다양한 모습('분노', 옹호, 무기력, 혼란...)...


여성 내부의 '타자'들의 목소리가 기존 여성주의를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 해체, 재구성할 것인가...


성판매 여성 필리스는 아내폭력으로 이혼한 후 50대 후반 성판매를 시작했고, 69세에 석사학위를 마쳤다.


성판매가 '여성의 선택인가' 대 '사회구조 혹은 직접적인 인신매매에 의한 강제인가'를 기준으로 성매매 제도를 정치적/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섹슈얼리티의 성별 권력을 은폐하는 남성 중심의 논리이다. 강제냐 동의냐는 질문은, 성매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왜 언제나 사는 사람은 남성이고 파는 사람은 여성인가는 논의를 봉쇄한 상태에서 구성된 언설이다. 


그들이 성매매와 성폭력을 통해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남자 되기'이다. 


성매매 방지법 '사태'는 한국 여성주의 세력이, 여성에게 계급 문제는 '곧바로'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반증이기도 하다.


성판매 여성들이 ... 성판매를 '선택'하고 거리 투쟁에 나선 것은, 현실의 정치경제학이 그보다 훨씬 다급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의 이중 규범('더러운' 여자라는 낙인)은 모든 여성을 통제하지 않는다.


'약자의 큰소리'는 불행과 고통이 심각할수록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착각을 주기 쉽다.


여성주의는 '인간은 다르다'는 주장이 부정의(injustice)한 만큼이나, '인간은 같다'는 주장이 다른 집단을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매매는 섹슈얼리티를 통한 젠더 억압의 모형이라는 점에서,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의 성을 교환가치로 삼는 제도라는 점에서, 성은 인격으로 상품화 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모두 비판 가능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감정 노동, 관계 유지를 위한 노동을 면제받는다.


남자의 일생 중,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을 조절하는 기간은 연애할 때가 유일하다. 결혼하면 남자들이 돌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공적'인 곳이라고 간주되는 영역에서 남성은 국가나 자본의 형태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며, '사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가족, 이성애 관계, 성매매에서는 관계성을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감정 노동에 무임 승차한다. 


▶성매매를 둘러싸 '차이'의 정치학

성매매 산업 종사자 수는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어려우나 2003년 여성부 조사에서 33만명(20~30대 여성 인구의 4.1%, 20~30대 취업 여성의 8%), ... 성매매 산업 규모는 연간 총 24조 원으로 추정된다. 이는 국내 총생산의 4.1%로 농립어업(4.4%)와 비슷하다.


이름짓기는 정치학이다. 명명의 과정과 결과는 명명하는 집단의 시각과 이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성매매 여성'이라는 말은 가정폭력, 배우자폭력, 부부폭력이란 용어가 아내폭력의 성별 권력 관계를 은폐하는 중립적 용어이듯이, 성매매의 명백한 남성 권력을 보이지 않게 한다. 


성매매는 강간할 권리를 사는 것과 다름없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판매 여성을 가부장제 피해자로 간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판매 행위는 당사자 여성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남성의 성적 실천에 기여하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자율적 의지'로 성판매를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성판매 여성들의 주장은 남성들에게 '세뇌'된 '허위 의식'에 불과하다. 이 점이 바로, 섹슈얼리티와 여성 종속에 대한 붕부한 이론을 생산했으며 실천적으로도 헌신해 온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비판받는 부분이다. 


성판매 여성이었다가 여성운동가가 된 여성들도 있지만, ... 여성주의자가 '이혼녀'가 되거나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는 있어도, 성판매 여성이 되지는 않는다. 


성 노동자 페미니즘은 성매매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판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낙인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둔다.


빈부 격차로 인해 성매매는 점차 젠더뿐 아니라 계급, 인종 모순의 성격을 띠게 된다.


▶군사주의와 남성성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성 혹은 여성의 성(섹슈얼리티)에 대한 타자화와 동일화의 이중 메세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군 가산제 논쟁에서 "가산점을 인정하라."는 주장이, 남성의 억압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상화하는 타자(여성)에게 차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장은 대상화하는 타자가 차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하는 동일화 논리이다. 


근대 이후 여성은, 공사 분리 제도/이데올로기를 통해 남성과는 다른 형태로 국가, 사회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남성들의 세계인 공적 영역은 남성만을 주체로 세우기 때문에 여성이 공적 영역과 관계를 맺거나 경찰, 법 같은 공적 자원을 이용하려면 가족 제도를 통해 남성을 매개할 때 가능하다. ... 여성은 병역의 의무가 있는 남성에게 밥을 해주거나 섹스 상대가 됨으로써, 즉 성역할 노동을 통해 국민인 남성의 요구에 부흥함으로써, 남성 국가의 인정에 의해 '국민'이 된다. ... 체제를 초월하여 어느 사회에서나, 국가에 헌신한 남성에게 '젊고 예쁜' 여성과의 결혼은, 남성의 '희생'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다.


군 가산제 논쟁 때마다 등장하는 남성 논리인 "여자들이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한다."라는 비난이 있는데,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무와 권리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출 경우, 국가는 개인을 '국민', '시민'으로 인정하고, 국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행했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군 가산제 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처음부터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 그 면제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격이다. 


군대를 안 가도 되는 남성에 대해서는 분노와 적대감을 가져도 그것을 공식적인 저항으로 표출하지 않으며 여성, 장애인, '방위' 등에 대해서는 남성성에 미달, 남성다움이 훼손된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와 조롱을 일삼는다.


군대의 존재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남성이 군대에 복무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남성성을 검증할 수 없다고 느끼도록 해야하고, 그들의 경험은 여성에 대한 지배와 보호, 여성들의 고마움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적과 피보호자를 상정하는 군대가 존재하는 이상, 여성이 군 복무에 남성과 평등하게 참여한다고 해서 시민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 평등의 기준 자체가 남성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평등은 공정함을 추구하는 정의가 아니라, 남성과 같음을 강요하는 남성 동일화이다. 때문에 여성의 '평등한' 군대 참여는, 역사상 어느 국민국가에서도 채택된 적이 없고, 어떤 여성해방 이론에서도 주장된 일이 없다.


모든 폭력이 '우리'라는 배타적인 정체성에서 시작된다고 볼 때, ...


... 시위 도중 "남자 앞으로! 남자 앞으로!" ...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항상 운동 진영은 전투적인 운동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통해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는 '군사화된 남성성'의 문제이다.


여성주의 정치학이 반대하는 것은 폭력이지 '음란'이 아니다.


보호관찰소에서 상담 명령을 받은 성폭력 가해자들을 심층면접한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가해자들은 일반적으로 피해 여성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성폭력으로 인해(정확히 말하면 성폭력이 발각됨으로 인해) 남성의 명예를 훼손시켰기 때문에, 남성 일반과 자기 자신에게 죄의식을 느낀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처럼 상대방의 존재나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의 자기 연민, 자기 도취는 한국 사회에서 유일한 사회적 자아, 시민은 남성뿐이라는 남성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목소리, 남성의 자존심, 남성의 기, 남성의 상처는 너무나 중요하고 지나치게 존중받는다.


전쟁에서 여성은 전리품으로 여겨지는데, '전리품을 소비하는 행위', 즉 전시 강간의 특징은 윤간이다. 이는 약자에 대한 공격을 통한 남성 연대의 확인이다. ... 이 사건(이라크 남성 포로에 대한 남녀 미군의 성희롱 및 성학대)에서, (미 여군을 포함) 미군이 침해한 것은 이라크의 남성성이 아니라 이라크를 여성화함으로써 여성성을 침해한 것이다. 


생전에는 인간/민족의 범주에 들지 못하다가 미군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야 민족의 성원이 되는 기지촌 여성의 현실은, 남성이 이해 관계에 따라 여성의 삶이 죽음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독려 포스터들은 국가 자체를 여성의 몸으로 간주하여, 독일이 "벨기에를 강간했다."며 연합군 동원 논리를 만들었다.


남성에게 섹스나 포르노그래피는 폭력, 권력, 정치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이 야기하는 긴장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가부장제 성 문화의 하나는 남성에게는 폭력과 성(섹슈얼리티)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남성 문화에세 강간은 대개 '격렬한 섹스'쯤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성애 섹스와 성폭력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행해지고 수용된다. 남성의 섹스는 폭력, 분노, 스트레스와 동반 상승한다. 남성의 성적 오르가즘과 폭력은 동일한 생리적 현상을 공유하는데, 한편으로는 욕망을, 한편으로는 공포를 추구한다. 


전통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보는 사람, 재현하는 주체는 남성이며, 보이는 사람, 재현의 대상은 여성이었다. 보는 주체가 남성일 때 보이는 대상, 타자는 보는 주체를 기준으로 차이가 구성되는데, 젠더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섹스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은 성애화된다.


여성은 남성의 정치학적 충격흡수대다. 가장 낮은 계급의 병사라 할지라도,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지배자'가 될 수 있으며, 섹스를 통해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령한 자는 명령한 자의 책임이 있고, 실행한 자는 실행한 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군 제도에 동원되는 피지배 계급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성찰하여 지배 계급 남성과의 연대와 동일시 욕망을 극복하고 여성들과 연대할 때, 군사주의에 대한 사회적 문제 제기가 시작될 수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남성성, 폭력의 시장화

사실 최근 빈발(재현)하는 이른바 '묻지마 폭력'은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간 행동중의 하나다. 


폭력의 개념을 '타인의 의지에 반한 일방적인 행위'로 한정한다면, '이유 없는 폭력'은 모순어다. 타인의 신체를 침해하는 것은 어떠한 논리를 동원한다 해도 부정의하다. 


가해자가 생각하는 피해자의 잘못은 언제나 자의적이다. '이유 있는 폭력'은 대개 '교육', '처벌', '괴롭힘' 심지어 '놀이'라고 불린다. 이유가 있으면 타당하고 이유가 없을 땐 폭력이라면, 폭력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폭력의 피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사회운동은 '아무 잘못도 없는 피해자'론을 강조한다. ... "잘못을 했으면 몰라도..." 내지는 "잘못을 했으면 맞을 수도 '있다'" 혹은 "맞아야 한다"는 통념을 수용한 대응이다. 일단 '잘못'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철저히 성별적, 계급적, 인종적, 연령주의적 개념이다. 잘못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위계)에 의해 구성되고 판단된다.

전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려는 경우 대개 여성들은 "어머, 왜 이러세요?"라고 말한다. 항의나 비판이 아닌 '겸손한 태도'로 이유를 질문한다. ... 반면, 남성들은 "이 자식 왜 이래, 미쳤어?"라는 식으로 대처한다.


.. '묻지마 폭력'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러므로 새삼 '묻지마 폭력'을 지나치게 문제삼는 것은 수천 년간 그들이 당했던 폭력의 역사를 구조적으로 삭제하는 것이다.


폭력은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운동을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 사랑이나 폭력은 모두 자기 확신 행위이지 상대방의 매력이나 잘못과는 무관하다. 


미국에서 가난한 흑인 여성들에게 군대는 학업, 취업, 의료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다. ... 여성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군사화된 해방'이라는 '슬픈' 용어를 쓴다. 가난한 자만이 군대를 선택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모병제를 '빈곤 징병제'라고 하는데 이는 젠더화 되어 있다.


1990년대 걸프전 때는 100명 중 1명이 용병이었는데, 이라크 전에서는 10명 중 1명이 용병이었다. ... 전쟁은 점차 국민이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한 국가에서 지원한 자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토마스 홉스의 위대함은 가부장제를 인간 본성으로 보지 않고,  "이기적인 남성들의 집단적 동의에 의해 탄생한 시민법의 일종인 결혼법"에 의한 '여성의 2차 세계사적 패배'로 인삭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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