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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채환 Oct 30. 2023

[에밀]

함께 책 읽기 ② - 장자크 루소, 에밀

■ 읽게 된 계기

 "루소는 이 종적 차이를 다른 곳에서 발견했다. 왕들이 백성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이 결코 인간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귀족이 평민을 멸시하는 것은 그들이 결코 평민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밀>에 쓰인 이 구절은 곧, 인간에게 있어서 연민이 어디서부터 기원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바꿔 말하면, 위선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부자는 결코 자신이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빈자를 연민하지 않고, 정치가는 일반 시민이 될 턱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권위적이다." 아래 링크되어 있는 칼럼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떻게 같은 사람끼리 저럴 수가 있지?" 정치적으로 양 극단에 있는 사람이 상대 진영의 사람에게, 혹은 권력자가 그 막강한 권력 아래에 있는 힘없는 국민에게, 혹은 경제/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열악한 처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상식에서 볼 때 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을 법한 매정하고, 가혹하고, 상대의 입장을 전혀 헤아릴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든 생각이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아무래도 저들(행위자/말하는 자)은 저 사람들(피행위자/듣는 자)을 자기랑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저럴 수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고 아마 그게 맞겠지 하고 살다가 이 글을 접하게 되었다. 나 말고도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그것도 옛날부터 이미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반가운 마음에 책을 읽게 되었다.

*경향신문,  <종적 연민에 대하여> -강유정-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603242111345



■ 감상 및 추천

 읽게 된 계기와 달리 '종적 연민'에 관한 부분은 아주 적은 분량에 불과했고, 전체적으로 보면 한 인간에 대해 유아기부터 결혼까지 이루어져야 한다고 작가가 생각하는 양육/교육에 관한 것이었고, 찾아보니 교육 분야에서는 상당히 손꼽히는 고전에 해당된다고 한다.

 일전에 출판사에서 일하시는 분과 얘기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정~말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서 팔리는 책이라고는 학생들 참고서가 거의 대부분이고, 전 성별과 연령을 통틀어서 그나마 학생 자녀를 둔 어머님들이 책을 좀 읽으시는데 그것도 아이들 진로와 관련된 책들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정말인가 하고 출판사 순위를 검색해 보니 정말로 딸아이 문제집에서 본 출판사들이 위쪽 순위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고,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문제집이 아닌 읽는 책을 펴내는 출판사들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장자크 루소는 책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는 모두 자식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싶어 하지만 정작 어떤 교육이 바른 교육인지 알지
    못한다. 바른 교육에 앞서 ‘바른 인간’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지를 향해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숨가쁘게 뛰고 있는 학생과 학부형들에겐 '한가한, 팔자 좋은' 소리가 될지 모르겠다. 먹고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삶의 의미, 행복, 내가 사는 삶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아이의 사생활], [아이의 자존감] - EBS 아이의 사생활 제작팀, 정지은, 김민태.

 : EBS가 기획한 [아이의 OOO] 시리즈가 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윤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랑과 헌신'도 중요하지만, 엄마아빠도 공부하면서 키우면 그 사랑과 헌신이 아이를 위해 더 값지게 쓰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린 자녀를 둔 부모님들께 자주 추천했던 책들.  


▶ [수레바퀴 밑에서] - 헤르만 헤세

 :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시골학교에서 모범생이자 수재로 인정받아 큰 도시에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와 자신에게 기대되는 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 우리도 아이들의 등을 계속 떠밀고 있는데, 그 길이 마음에 드는지?, 지금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걷고 있는지?,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뭔지? 같은 질문들도 하면서 그러고 있는 건지 생각하게 된다.


▶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 작가는 인생의 목표를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라'로 보았다. 일단 '놀고'가 당당히 인생 목표 중에 하나로 들어가 있는 것에 놀랐다. 노는 것은 비생산적이기 때문에 짬나는 시간에 조금씩만 하는 것이지 과하면 '놀고먹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되는 거라는 생각이 당연하다고 여겨왔었는데 이후로 노는 것도 나를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떳떳해졌다. 저자의 목표에 대한 공감/동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책을 보면서 스스로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고 정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 같다. 목표를 정하려면 나는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죽기 전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만의 목표가 없으면 다른 많은 이들과 무리를 지어 평생 뛰어다니기만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오직 더 큰 집과 외제차와 명성/지위를 위해서.



■ 주요 문장 (요약 또는 마음에 드는 문장)

1: 유아기 (출생~5)     

모든 사회는, 결속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기적이다.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선량하게 대하는 것이다.     


자기만 생각하며 자란 인간이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것을 잘 견뎌낼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교사가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정작 필요한 것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는 지식이 가득하지만 지각이 없다. 지각이 없으니 분별이 있을 리 없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학문은 단 한 가지, 인간의 의무에 관한 학문밖에 없다.     


허약한 신체는 정신을 약화시킨다.     


노동은 식욕을 돋워주고 절제는 과식을 막는다.     


재물은 부자들을 게으르게 길들인다.     


아이는 젖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유모의 마음까지도 흡수한다.     


비교는 언제나 지도자(교사, 강사)에 대한 아이의 존경심을 약하게 만드는 법니다. 그러면 권위는 떨어지고 양육은 실패한다.     


습관이 아이의 욕구는 낳는다.     


아이는 울면서 뭔가를 부탁한다. 처음에는 도와달라고 울지만 나중에는 시중을 들어달라고 운다. 자신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의존이 어느 순간 지배와 통치의 욕구로 변질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든 사물에게든, 아이는 결코 주인이 아니다. 아이에게 지배나 복종의 관념이 깃들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욕망을 자제하는 데 익숙해지면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박탈감조차 거의 느끼지 않을 것이다.


2: 아동기 (5~12)     

아이는 어른을 통해서 판단한다. 내가 두려워하면 아이도 두려워하고, 내가 침착하면 아이도 차분해진다. 고통을 필요이상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고통의 단계에 맞는 아픔만 수용하는 의연함을 길러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더 큰 고통이 찾아와도 참아낼 수 있게 된다. ... 아이는 고통을 알아야 하고 위험이 무엇인지 겪어봐야 한다. 그런 경험이 아이를 강하게 한다.     


씩씩하게 자란 아이는 불평도 적다. 그 아이는 스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므로 타인의 손길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 고통을 가장 적게 겪는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 기쁨을 가장 적게 느끼는 사람이다. 인생에는 기쁨보다 고통이 더 많다. 항상 그렇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사는 동안 느끼는 행복이란 어떤 소극적인 상태일 뿐이다. 즉 행복이란 언제나 그가 겪는 고통의 최소량에 의해 측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고통은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모든 쾌락은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 그러므로 우리의 불행은 이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능력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욕망의 확대를 가져오고, 이것은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능력을 넘어서는 욕망을 줄이고 힘과 의지를 평형상태로 유지하는 데 있다.     


인간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핍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욕망 때문이다.
 
신체의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빼고 나면 불행은 모두 상상적인 것(자기 생각?)에서 연유한다.
 

지나치게 소유함으로써 불행해지지 말라. 그 욕망이 당신을 불행하게 할 것이다.
 

앞 날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불행으로 이끈다.     


최고의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되, 하고 싶은 일만 한다.     


나는 보다 큰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작은 고통들을 많이 겪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육신이 편안하면 정신이 부패한다. 고통에 무지한 사람은 비인간적이다. 그런 사람은 어떤 일에도 감동할 줄 모르며,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일 뿐이다.


당신의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갖게 하라.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게 하라. 욕망은 날로 증대될 것이고 그에 따라 당신의 능력은 고갈될 것이다. 언젠가 당신은 아이의 요구를 거절해야만 할 시기가 올 것이고 그러면 아이는 미칠 것이다.      


반항보다 복종이 더 이익이고 편리한 처세 방식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아이들은 가면을 쓰게 된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라. 당신이 주위 사람의 선생이 되지 못한다면 아이의 선생 역시 되지 못할 것이다.      


아이가 집 밖에서 보고 듣는 것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의 내면에 그런 것들이 적절히 안치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데만 힘써라.     


야단치지도 않고 벌주는 일도 없는데 왜 아이가 거짓말을 하겠는가? 정직함이 어떠한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데 말이다.


서둘러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서둘러 요구하는 일도 없게 된다. 빨리 가르치려는 욕심이 아이로 하여금 약속을 남발하게 한다. ... 그러므로 아이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는 신중히 하라. 의무를 지울 땐 그 의무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읽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염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아직 학문을 사랑할 수 없는 아이에게 학문을 싫어하도록 만들지 않아야 한다.


당신의 아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고 싶은가? 그의 신체를 단련시켜라.      


몽테뉴는 말했다. “아이의 정신을 강하게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근육을 튼튼하게 하라. 노동에 익숙하게 함으로써 고통에도 익숙해지게 하라.”     


아이의 신체나 정신의 결함은 모두 한 가지 원인, 아이를 너무 일찍 어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학습에서 기인한다.      


안락한 생활은 끝없이 불쾌한 감각만을 가져온다. 애지중지 자란 사람은 포근한 이불에 감싸여야만 잘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 데서나 잘 수 있다. 어디서건 눈만 감을 수 있으면 그는 잔다.


아이는 천성적으로 유희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 그것이 놀이라고 생각되면 무르팍이 깨져도 명랑하게 대응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고통이 쓴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도 쓴맛을 제거하는 양념은 있다.      


명심할 것은 실행하기에 앞서 결과를 예측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습관이 몸에 밴다면 아이의 행동은 회를 거듭할수록 명민해질 것이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두렵다. ... 그 두려움이 나의 상상을 자극해 스스로를 더 불안하게 한다.      


정신의 진보는 겉보기에 불과하지만 육체의 진보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보이는 아이들의 재능은 사실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 아이들이 보이는 움직임은 실제적인 것이다.     


아이의 미각을 단순하게 유지시켜라. 아이의 입맛이 편협한 미각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3: 소년기 (12~16)     

가진 힘에 비해 욕구가 크면 클수록 유약해진다. 강해지고 싶은가? 그럼 욕망을 줄여라. 욕망을 줄이면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여분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럴 때 그는 강해진다.     


그 일을 함에 있어 아이가 고통스러워하거나 싫증 내는 기미가 보이면 빨리 접도록 하라. 무엇을 배우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그가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터득했을 때 가장 명료한 관념을 갖는다. 그래야 그의 이성이 타인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다.     

줄자의 사용으로 눈대중의 감각이 떨어지며 저울의 사용으로 손이 지닌 무게감이 훼손된다. 도구가 정교하면 할수록 우리의 감각 기관은 더 퇴보한다.     


나는 책을 싫어한다.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것에 관해 말하는 법만 가르친다.  ...

나는 에밀이 이 책(다이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처럼 생각하고 공상해 보길 원한다. 책이 아닌 사물을 통해 보고 느끼고 배웠으면 한다.     


가장 유용한 기술이 가장 적은 소득을 낳는다. 가령 농산물의 생산이 그러한데, 이에 필요한 기술은 가난한 사람이라도 지불할 수 있는 가격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적으로는 유용하지 않음에도 높은 가격으로 유통되는 기술이 있다. 소위 말하는 예술가들의 기술이 그 범주에 속한다. 그 사람들은 한가한 부자들을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에 임의대로 가격을 매기는 한편, 그 가격이라는 것이 세간의 의견에 의해 결정될 뿐이어서 값이 비쌀수록 그 가치 또한 높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이 철물점에 들어갈 때보다 금은방에 들어갈 때 더 큰 경의를 표한다면, 당신의 학생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가치가 유용성에 비례해 결정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는 기술이나 물건의 참된 가치에 대해 오해하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의 의견에 기대어 판단하게 하지 말라. 그 판단이 다시 그의 의견이 되는 한 아이는 절대 어리석음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분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위도식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모두 도둑이다.     


작품이 좋으면 단지 ‘잘 만들었다’고만 말해야지 누가 만든 작품인가를 확인하지 말라. ... 그가 장인이라는 호칭으로서가 아니라, 작품으로서 장인임을 드러나게 하라.      


진리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4: 청년기 (15~20)     

정념의 원천이 자연에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념이 흘러오는 동안 다른 흐름들이 가세해 큰 강물을 이루게 되었다. ... 자연적인 정념은 소량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를 보존케 하며 자유롭게 한다.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억압하는 모든 정념은 다른 하천에서 온 것이다. 자연은 결코 그런 가미를 하지 않는다.      


아이가 갖는 최초의 감정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첫 번째 감정에서 두 번째 감정, 즉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온다.      


자기애와 달리 이기심은 늘 자기 자신을 남들과 비교한다. 남들보다 더 자신을 아껴줄 것을 요구하는 이 감정은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런 연유로 미워하고 화를 잘 내는 정념은 이기심으로부터 오고, 온화하고 애정이 넘치는 정념은 자기애로부터 온다.     


아이에게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른들이 솔선수범해서 그 순수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젊은이의 마음을 선량하게 가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의 마음이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 사치와 화려함의 세계를 맛보게 하지 마라.     


아이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다듬고 동정심 많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래서 그 존재가 자기처럼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한편, 그 대상과 일체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감정을 지속시키는 것은 기억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은 상상이다.     


없는 자들의 고통은 그 상황에서, 그들을 짓누르는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온다. 어떤 지혜나 덕망도 육체의 굶주림이나 피로를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      


당신의 종족인 인류를 존중하라. 인류의 주류가 민중임을 알고 그들을 사랑하라. 당신의 학생으로 하여금 한 계층에만 속해 있게 하지 말고 전 계층에 있게 하라. 인류에 대해 경멸이 아니라 연민을 가지고 대하도록 가르쳐라.     


사람에 따라서는 좀 더 냉혹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웬만한 비극이 아니고서는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공정하고 바른 인간은 될 수 있을지언정 너그러움이나 동정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다.     


인간의 얼굴은 단지 자연의 책임이 아니다. 습관화된 감정의 누적된 결과이다. 그 결과가 인간의 얼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나이 들어서의 얼굴은 그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보다 자유롭고 독립적이게 하는 것은 마음의 절제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통념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보고 느낀 것 외에 어떠한 권위에 의해서도 지배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을 믿어야 한다는 교리는 인간의 지성에 치명타를 가하는 헛된 가르침의 근본이다. ... 기독교도임을 자칭하는 아이는 무엇을 믿는가? 자기가 이해하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얘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른 장소에서 다른 말로 말해주면 그 상황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어른이든 아이든, 이러한 측면에서 모든 신앙은 지리적인 일이다. 그래서 누구는 기독교도가 되고 누구는 이슬람교도가 되며 누구는 불교도가 된다.


우리는 철없는 나이에 죽은 아이들은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인간의 정신이 신을 인정하기 위해 필요한 작용을 할 수 없을 때는, 그것이 어린아이이든 미친 사람이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 같은 원리로 논의를 진전시켜 보면 나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신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그 역시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될 이유가 없어진다. 무지했든 철이 없었든 마찬가지다.

 ... 아이는 아버지의 종교에 따라 길러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 종교만이 최선이며 올바르다는 사상이 주입된다.     


가장 약속을 잘 지키는 자는 가장 나중에 약속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권위를 확립한 뒤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그 권위를 행사할 기회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의 인물보다는 자기가 만들어 낸 상상 속의 인물을 더 좋아한다.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홀로 방탕에 빠지지 않는다. 대부분 또래들과 어울려 타락의 늪으로 빠진다. ... 동료들과의 의리 때문에, 혹은 체면 때문에, 혹은 조롱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자신의 몸을 대담하게 내던진다. 방탕해질 줄도 모르면서 방탕해지는 그 마음의 밑바닥에 허영심이 있다. ... 유혹은 허영심의 문을 통해 들어온다.     

세상 만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이 얘기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기울이는 관심, 즉 자기에 대한 관심과 자기 말에 대한 관심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무엇이든 얘기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5: 성년기 (20~결혼)     

말하는 목적도 다르다. 남자는 유용성이, 여자는 즐거움이 목적이다.     


에밀이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 일찍 나타나는 것은 그녀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는 일이며, 늦게 나타나는 것은 그녀를 무시하는 일이다.     


인간의 고통은 결핍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아니라 집착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 거야. 욕망을 충족하면 할수록 결핍은 더 커지지. 집착하면 할수록 고통도 증가해.     


부록     

우리는 모두 자식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싶어 하지만 정작 어떤 교육이 바른 교육인지 알지 못한다. 바른 교육에 앞서 ‘바른 인간’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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