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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채환 Nov 18. 2023

[사랑의 기술] 1/2

함께 책 읽기 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읽게 된 계기

 언제 어디선가 이 책의 제목을 알게된 후 매력적으로 느꼈던지, 선후배,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이 책에 아마 이런 내용이 쓰여있지 않을까라는 근거 없는 얘기를 하며 제목을 입에 많이 올렸다. 읽지도 않은 책을 언급하는 죄책감을 털어버리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첫 장을 펼치는 데까지 꼬박 20여 년이 걸렸고, 작년에 일명 <아이가 크면서 혹은 커서 보았으면 하는 책 골라 모으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그 일환으로 직접 책을 사서 밑줄 그으며 정독하며 다시 읽는데 까지는 또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두 차례를 읽고 나니, 알림장(예전에는 연락장) 거의 맨 앞 장에 써놨던 오래된 숙제를 해치운 것같아 마음이 퍽 홀가분하고 심지어 떳떳하기까지 했다. ^^



■ 감상 및 추천

 개인적으로는 이 책과, 같은 작가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최고의 책 상위 2권으로 꼽는다. 하지만 두 권 모두 꽤 나이를 먹은 후에 시차를 두고 2번 읽었음에도 60% 이상 이해했다고 자신은 못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다뤄진 내용이 우리 현대인의 삶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는 점에는 의심이 없다. 한국말로 쓰여있지만 쉬운 영어보다도 더 이해가 되질 않고, 읽는 재미가 있다기보다 정신집중해서 끈기를 가지고 참고 읽어내야 하는 책이다. 그래서 선뜻 권하기 어렵지만, 아이가 커서 사회생활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사랑도 하기 위해 세상에 나갈 때, 선택하라면 이 두권을 뽑아 손에 쥐어주고 싶다.

 같은 작가의 [인간의 마음]도 정말 놀라운 분석이라 생각되고, [건전한 사회]도 읽으려고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 [사랑의 기술 ], 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에서 다루었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 고립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주어진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억압과 권력에 구속되려는 현상 및 심리를 다룬 책이다. 이 책에 비하면 사랑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잘 읽히는 책이다. 책 좀 읽었다는 분들도 두손두발 다 들었다고 얘기하는 악명 높은 책이다. 하지만 직장생활, 사회생활에서 오는 무력감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써의 힐링을 끊없이 반복하는 삶이라고 생각된다면 한번 읽어보고 찬찬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한다.


▶ [섹스의 진화] - 제러드 다이아몬드

 : [사랑의 기술]이 운명과 감정의 영역으로 생각했던 사랑에 기술과 훈련의 개념을 도입했다면, 이 책은 그것을 인간의 동물적 특성과 본능의 관점에서 풀었다고 볼 수 있다. '7. 섹스어필의 진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유전자를 널리 퍼트리고자 하는 목적' 관점에서 성을 다룬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까지 읽으면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다움'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잠깐 들 수도 있겠다.


▶ [하윤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 4. 사랑

https://brunch.co.kr/@2f5d6d1cad1247c/6

 : 여기서 언급된 책들의 내용에 내 경험과 생각을 더해 정리한 글.



■ 주요 문장 (요약 또는 마음에 드는 문장)

1. 사랑은 기술인가?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한 사랑의 이야기, 불행한 사랑의 ... 영화를 보며, ...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두 번째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세 번째 오류는 '사랑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리고 밀접하게 느끼면 일체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격앙된 경험 가운데 하나다. ...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더욱 촉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을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어떤 기술을 배울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는 무엇인가?

 편의상 기술 습득 과정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 둘째는 실천의 습득이다.


 세 번째 요인이 있다. 곧 기술의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사랑을 뿌리 깊이 갈망하면서도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곧 성공/위신/돈/권력이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정력이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 들지 않는다.


2. 사랑의 이론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만인과의 의견일치는 '자신의'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즉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창조적 작업이든 창조하는 자는 외부 세계를 나타내는 자료와 결합한다.


 완전한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복종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팽창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 나는 위대성, 힘, 확실성의 일부이다.


 공서적 합일(피학성 또는 가학성 공생관계)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은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일 것이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를 통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충분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언제나 남아 있다. ... 더 나아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사랑받는게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쓰라린 감정을 쉽게 일으킨다.


 아버지는 자연적 세계를 나타내지는 못하지만 인간 존재의 다른 극, 곧 사상, 인공적 사물, 법률과 질서, 훈련, 여행과 모험 등의 세계를 대표한다. 아버지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어린아이에게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지시해 주는 사람이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합일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면서도 기술은 배우지 않고, 올바른 대상만을 고르면서 대상만 찾아내면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에 비유할 수 있다.


 무력한 인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시작이다.

 

 동정에는 지식과 동일시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린아이를 아직도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고 있는 한, 어머니의 사랑과 탐닉은 그녀를 자아도취적으로 만족시킨다. ... 어린아이는 무력하고 어머니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배욕과 소유욕을 가진 여자에게는 자연히 만족스러운 대상이 된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 모성애에서는 한 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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