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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채환 Nov 18. 2023

[사랑의 기술] 2/2

함께 책 읽기 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2. 사랑의 이론 (계속)

 친밀감은 우선 성적 교섭을 통해 확립된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분리를 우선 신체적 분리로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 결합은 분리상태의 극복을 의미하게 된다.

 ... 자기 자신의 개인 생활, 자신의 희망과 불안을 말하는 것, 자신의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면을 보이는 것, 세계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확립하는 것, ... 분노, 증오, 그리고 자제심의 완전한 결여를 드러내는 것 ...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 언제나 새로운 사랑은 이전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환상을 품고 - 바라게 된다. 성적 욕망의 기만적 성격은 이러한 환상에 많은 도움을 준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 합일의 환상을 일으키지만 사랑이 없는 한, 이러한 '합일'은 낯선 사람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그들은 서로를 동일시하는 두 사람이고, 그들은 단일한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분리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은 고독의 극복을 경험하지만, 그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여전히 서로 분리된 채로 있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곧 그들의 합일의 경험은 환상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로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아이들은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압박을 받는다. 아이들은 덕이라는 가면 아래서 삶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랑, 기쁨, 행복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전도력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앞에서는 분리의 체험과, 여기서 생기는 분리 상태의 불안을 합일의 경험에 의해 극복하려는 욕구가 사랑에 대한 우리 욕구의 기반임을 검토했다.


 신은 최고의 가치, 가장 바람직한 선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특별한 의미는 한 사람에게 가장 바람직한 선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신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의 성격 구조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적어도 여러 문화에서 부계적 종교에 앞서 종교의 모계적 시기가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계사회는 사유재산의 발달과 병행한다)

 

 인도 문화, 이집트 문화, 그리스 문화, 유대적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남성적 신들이 있고 그중에서 으뜸가는 신이 지배하거나 모든 신이 일자(一者, 한 존재?), 곧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제거되어버린 부계 세계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신의 사랑은 '은총'이고, 종교적 태도는 이 은총을 믿고 자신을 연약하고 무력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카톨릭 교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이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좋은 일에 대한 카톨릭의 교리는 부계적 양상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복종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획득할 수 있다.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일신론적 관념의 본질에 따른다면, 어떠한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 그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 겸손하다. 


 역설적 논리학에서는 신에 대한 사랑은 사고를 통한 신에 대한 지식이거나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신과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사상은 올바른 생활방식을 강조하게 된다.


 브라만교에서는 불교나 도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에 둔다.


 올바른 사고가 궁극적 진리도, 구제에 이르는 길도 아니라면, 사고를 통해 다른 공식에 도달한 다른 사람들과 싸울 까닭은 없다.


 서양 사상의 주요한 흐름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 참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올바른 사고에 의해서만 궁극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올바른 행동도 동시에 중요시되기는 했지만, 중요한 강조점은 사고에 놓였다.

 종교적 발전 과정에서 이러한 강조로부터 교의의 정형화, 교의의 정형화에 대한 끝없는 논쟁, '비신자' 또는 이교도에 대한 비관용이 생겼다. 신을 믿는 자는 - 비록 그가 신을 뜻을 좇아 살지 않더라도 - 신의 뜻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느꼈다.


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의 능력은 이 문화가 평범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달려있다.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 생명이 없는 축적된 물품이 살아 있는 인간의 힘, 곧 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 자본주의가 발달한 결과, 우리는 자본이 점점 더 중앙집권화하고 집중화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 이러한 기업에 투자한 자본의 소유권은 이 자본을 관리하는 기능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된다. 


 주도권은 좋든 나쁘든 자본의 분야에서나 노동의 분야에서나 개인으로부터 조직으로 옮겨졌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성을 잃고 거대한 경제적 제국의 관리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쉽게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되고 목적 없이 -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노동의 규격화만으로는 이러한 일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오락의 규격화에 의해, 곧 오락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음향이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절망을 극복한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행복한 결혼에 대해 쓴 무수한 논문은 원활한 기능을 가진 팀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에서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세계에 대항하는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된다.


 사이비 사랑의 다른 형태는 '감상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경험할 뿐, 실재하는 다른 사람과 여기서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러한 사랑의 본질이 있다.


 감상적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은 시간에 의한 추상화이다. 부부는 그들의 지난날의 사랑 - 비록 이 과거가 현재였을 때에는 사랑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 의 기억이나 미래의 사랑의 환상에 의해 깊은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오늘을 살지 못한다. ...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고독과 분리감을 완화해 주는 마취제로서 작용한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에 '사랑하는' 사람의 결함이나 결점에 관여하려고 '투사적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천연덕스럽게 무시해버린다. 항상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개조하기에 바쁜 것이다. ...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의 문제를 무시하는 데 성공하고 따라서 그들 자신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 조치를 하는데 실패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 의의가 없다고 느낄 때, 그는 자식들의 생활을 통해 의의를 느끼려고 한다.


 자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오류 ... 사랑을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환상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갈등'이 사실은 '진짜' 갈등을 회피하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에 있다.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원칙이나 신념이 없으며, 그들에게는 전진한다는 목표 말고는 아무런 목표도 없다. ... 매일의 생활은 물질적 안락에 대한 갈망,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성공하려는 갈망에 바쳐지고 있다.


4. 사랑의 실천

 우선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현대인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은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게을리 지내거나 빈둥거리고 싶어 하며, 더 좋은 말을 하자면 '긴장을 풀고' 싶어 한다.  


 '정신 집중'이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데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거의 증명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 요소는 '인내'이다.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최소한의 시간 이상으로는 탐정 소설이나 영화 같은 도피주의적 활동에 탐닉하지 않는 것, ...


 사실상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곧 음악 감상, 독서, 사람들과의 대화, 경치 구경 등에 전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순간 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생활 궤(태?의 오기인지 의문)도가 불쾌하고 음울한 친구도 피해야 한다. ... 육신은 살아 있으나 정신은 죽은 자들, 사상과 대화가 보잘것없는 자들, ... 생각하지 않고 상투적인 의견을 주장하는 자들 역시 피해야 한다.


 어떤 활동이든, 만일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행한다면, 우리를 더욱 각성시키지만(비록 후에는 자연스럽고 유익한 피로감이 생기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모든 활동은 우리를 졸립게 만든다.


 인내가 어떤 것인지 알려면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어린아이는 계속 시도하며 조금씩 고쳐나가서 결국 어느 날엔가는 쓰러지지 않고 걷는다.


 우리는 지식을 가르치지만, 인간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가르침, 곧 성숙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어질 수 있는 충분한 가르침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 문화 이전 시대에는, 또는 중국과 인도에서는, 뛰어난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높이 평가받았다. 선생은 일차적으로 지식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의 기능은 어떤 인간적 태도를 전달하는 데 있었다.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결관성의 결여는, 외국인에 관한 한 악명높다. ... 적의 모든 행동과 자기 자신의 모든 행동을 서로 다른 기준에 의거해 판단한다.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 객관성과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면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가는 길을 절반은 걸어온 셈이다. 


 비합리적 신앙이라는 말을 나는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어떤 사람 또는 관념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한다.


 교육과 반대되는 것이 조작이며, 조작은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에 대한 대한 믿음의 결여, 그리고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억압해야만 비로소 어린아이가 올바르게 되리라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에리히 프롬의 삶과 사랑>                 -라이너 풍크 -

 모든 사회와 사회집단은 그들의 자기 보존에 최상으로 기여하는 것을 사랑이라 내세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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