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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Aug 17. 2021

"그냥 집에 있어, 심심하면 고양이 한 마리 키우던지"

은래빛 에세이


남편과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교내 영어회화동아리에서 만났다.


당시 영어회화동아리에서는 신입회원이 들어오면 선배와 1:1로 매칭 해서 코칭을 받게 하는 patron(후원자) 제도가 있었는데,


바로 남편이 나의 patron이었다.


남편은 아주 조각 같은 미남은 아니었지만 훈훈한 외모에 말 수가 적었고, 키가 180cm에 적당한 근육질의 체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영어를 무척 잘했다.


그래서 남편을 좋아하며 따르는 여성회원들이 꽤 있었던 탓에, 나는 그녀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그가 유독 내게 다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험기간에 새벽같이 나와 도서관 자리를 대신 맡아주었고, 내가 동아리 영어 숙제가 어려워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징징대면 부드럽게 웃으며 숙제를 대신해주기도 했다.




하루는 누군가가 동아리방에 자전거를 가지고 왔다.


힐끔힐끔 자전거를 보던 나는 그를 쳐다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ㅡ 자전거ㅡ타ㅡ고 시ㅡ퍼'


그는 바로 살짝 웃더니, 쉬는 시간에 나를 태우고 대학교 교정을 한 바퀴 돌아주었다.


"뭐야~~ 둘이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하는 야유를 들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그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에게 다정하고 영어를 잘하는 남자 선배 정도의 포지션을 유지했다.




우리는 둘 다 졸업 후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1년 정도 하다가, 다시 연락이 닿아 만난 후에서야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보던 '다정한 남자 사람'에서 '늠름한 사회인'이 되어 있었고,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약 1년 정도 연애를 한 후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자, 연애할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다.


그는 아주 숨 막히는 짠돌이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경제적으로 알뜰했고, 내가 맞벌이를 하는 아내인 것에 대해서 매우 흡족해했다.


종종 남자들은 결혼을 하고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거나 하면  "일 하는 거 너무 힘들지 않아? 원한다면 집에서 육아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격상 입에 바른 거짓말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아내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부부동반 모임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질문을 퍼붓고는 했다.


부부동반 모임에 다녀온 뒤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빠, 내가 직업이 없었어도 나랑 결혼했을 거야?"


"...."


"응? 대답해봐"


"..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과 결혼해야지"



대답을 들었을 때는 조금 실망했다.


그는 정말 날 사랑했던 걸까?


아내가 될 사람의 직업 유무에 상관하지 않은 남편의 친구 부부들이 정말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 같고,


남편은 나의 조건을 필수적으로 참고(?)하여 선택한 사랑인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남편이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야근이 지속되면, 남편에게 '우리는 맞벌이니 너무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라'며 조심스럽게 더 업무강도가 낮은 곳으로의 이직이나 휴직 등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회사생활 중에 너무나 힘이 들어 상담치료를 받거나 엉엉 울며 하소연하면, 내 얘기를 잠자코 들어주거나 해결책을 제시했다.


역시나 단 한 번도 "그딴 회사 집어치워!!!!"라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심신이 지친 내가 휴직을 해서 필라테스 등을 하며 건강관리를 하고 싶다고 하자,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음... 그럼 필라테스 자격증을 따는 건 어때?"



그 한마디로 나는 폭발했다.


내가 10년 넘게 회사일과 육아를 한꺼번에 하느라 이렇게나 지쳐 잠시 쉬겠다는데! 어떻게든 돈 버는 쪽으로 날 이용(?)해 먹으려는 심산이냐며 내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고, 그는 말이 없었다.



이와 같이 난 남편에게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돈에 대한 개념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운한 것은 쇼핑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옷을 살 때 나는 그가 마음에 들어 하면 다소 고가의 브랜드의 옷이라도 입어보게 하고 기꺼이 결재해 선물해주곤 했다.


하지만 내가 옷을 고를 때, 그는 매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내가 휴직을 하고 나서 1년이 지났다.


나는 휴직을 함으로써, 회사 스트레스와 보육 아줌마 스트레스가 사라져 서서히 건강을 되찾았고, 그로 인해 우리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예전에는 내가 퇴근 후 아이를 혼자 돌보다가 남편이 늦어지면 그에게 짜증을 쏟아내곤 했는데,


종일 충분한 휴식과 나만의 시간을 가지다가 아이를 돌보니, 남편에게 화내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로 보육 아줌마가 자주 바뀌던 아이정서적으로 안정되었고, 남편이 오면 나는 아이와 함께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느 한적한 일요일 오후였다.


온 가족이 거실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나와 해준이는 누워있었고, 남편은 바로 옆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남편은 고양이를 좋아해서 아파트 내 공원에서 고양이를 보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그들과 교감을 나누곤 했는데, 아마 보고 있던 TV에서 고양이가 나왔나 보다.



그가 문득 나에게 말했다.



"꼭 복직해야 하나? 그냥 집에 있어.. 심심하면 고양이나 한 마리 키우던가"


"응?"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 나 집에 있으라고?"


"어어... 그냥 집에 있어"


"헤에..? 지금처럼 내가 집안일도 잘 못하고 요리 도 못해도?"


"그런 건...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어..."


"나 돈 안 번다고 구박하는 거 아니야?"


"안 해.. 아프지나  마라.."




일하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말..


내가 그에게 거듭 묻거나 강요하지 않고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오다니..


어디까지나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던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도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느꼈을 것이다.


시부모님도, 보육 아줌마도, 그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은 우리 가족만의 행복을.



바로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냥 집에 있어, 심심하면 고양이나 한마리 기르던가 끝 >


이미지 출처 - https://m.blog.naver.com/emkkkkk/222429935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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