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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Oct 21. 2021

전화위복(轉禍爲福)

은래빛 에세이 2부

- 전편 "소발작과 대발작"에 이어지는 후속편 에세이입니다.



난 밤늦게 온 남편에게 해준이의 대발작 사건을 얘기했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도, 나를 위로하지도, 더 묻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남편은 해준이에 대한 문제에 새롭게 직면하면 그에 대한 대화를 피했다.


이전에도 난 남편에게 해준이의 치료 수업이나 근황에 대해서 조잘조잘 얘기하곤 했는데,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내가 화를 내며 다그친 적이 있었다.


"오빠는 왜 아무 말이 없어? 내가 어떤 치료 수업이 좋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잖아!


나만 혼자 이리저리 알아보고, 고민하고,  

당신은 아이한테 아무 관심이 없어??

의견을 좀 달라고!"


그는 드디어 입을 뗐다.


"솔직히 말할까?

 이 수업을 하든, 저 수업을 하든 아무 상관없어! 

 아무 효과도 없을 테니까!!"


난 말문이 막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 그래도 언젠가는 효과가 있을 거야..

원래 교육이라는 게 콩나물에 물 주듯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도.. 콩나물은 쑥쑥 자라잖아.


당장 효과가 없더라도 우린 엄마 아빠니까..  

자주 해준이에 대해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

안 그래?"


"...."


그는 다시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젠가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우리가 그를 걱정하고 논의를 한다고 해서,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뒤로 난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난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의 '역할 수행'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씁쓸해졌다.




서울로 올라온 우리 가족은 소발작으로 약을 처방해주고 있는 대학병원에 진료예약을 했다.


며칠을 기다린 후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간의 일을 얘기하자, 의사는 기존에 먹고 있는 소발작 약으로는 대발작을 막을 수 없다며, 아이에게 새롭게 "뇌전증" 진단을 내리고 새로운 약을 처방해주었다.


나는 잠자코 약의 처방을 받아 들었다.


난 그렇게나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는데, 하늘은 마치 나를 비웃듯이 약을 안 먹고는 견딜 수 없는 증상을 주셨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이의 상태에 나는 무미건조한 무력감을 느꼈다.


딱히 슬프거나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력할 뿐이었다.




해준이는 아침/저녁으로 두 번 대발작 약을, 그리고 저녁에 한번 소발작 약을 먹었다.


다행히 약을 먹기 시작한 후로 대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약으로 조절되는 증상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또다시 해준이의 공격성이 심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해준이는 어릴 때부터 공격성이 있어 종종 갑자기 사람을 할퀴거나 날뛰고,  스스로의 머리를 때리며 크게 소리 지르며 우는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자주 그런 증상이 나타났고, 어떨 때는 몇 개월간 조용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짧게는 20분에서 길게는 50분 정도 날뛰며 발악을 했고,

온 가족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나와 남편의 얼굴과 목덜미, 손과 팔에는 해준이가 할퀸 상처들로 가득했고, 생채기에서는 피가 흘렀다.


종종 학교에서도 갑자기 친구를 할퀴어, 반 친구 어머니에게 사과 전화를 하는 일도 있었다.


반 친구 어머니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해준이, 이렇게 공격성이 있는데 약 안 먹여요???"


"아.. 네.. 죄송합니다.. 병원에 가보려고요"


난 굽신거리며 연신 사과를 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난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와 함께 병원에 내원했다.


자폐성 장애아동을 위해 적합한 약 조합을 잘하기로 유명한 이 병원은 진료 대기만 약 2년 정도 걸리는 병원이었는데, 당시는 약 8개월의 대기기간이 남은 상태였다.


난 병원에 전화해 아이의 공격성이 근래 갑자기 심각해져 빠른 진료가 필요하다고 사정사정했고, 마침 운 좋게 취소된 예약이 있어 예정보다 빨리 진료를 볼 수 있었다.


난 의사와 면담 후 공격성 조절을 위한 약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소아정신과 약은 아이에게 맞는 약을 찾는 데까지 어려운 과정이 동반되곤 했다. 해준이가 5살 때 약을 먹고 공격성이 오히려 늘어 고생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이에게 약을 먹이기 시작한 후에는 잠은 잘 자는지, 소변과 대변의 간격과 상태는 어떤지, 밥은 잘 먹는지, 멍해지지는 않는지 등을 세심히 살피며 약의 양을 조절하거나 교체해야 했다.


새롭게 처방받은 약은 공격성을 줄여주었지만, 일주일 만에 해준이의 몸무게는 4kg가 불어났다.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약이었지만 흔히 나타나는 부작용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진료예약을 잡았다.



"어머니 일주일 만에 내원하셨네요~ 해준이 약이 잘 맞지 않던가요?"


"네 선생님.. 공격성은 줄었는데 일주일 만에 체중이 4kg 늘었어요.."


"역시나.. 그럼 다른 약으로 바꾸어야겠네요"


"네.. 참 선생님, 해준이는 소발작과 대발작이 모두 있어서 두 가지의 약을 먹고 있어요.


그리고 제 생각인데 공격을 할 때도 본인 의지가 아닌 것처럼 발작하듯이 갑작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혹시 공격성이 뇌전증과 연관이 있진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런가요? 공격 양상은 어머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실 테니.. 좋은 의견을 주셨네요..

그렇다면.. 해준이를 위해서 이 약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실제 처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약인데... 뇌전증을 가진 환아의 공격성을 줄이는데 효과가 있다고 입증된 약입니다"


"오, 그런 약이 있나요? 네네 그럼 그 약으로 처방해주세요.

세심히 살펴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난 의사의 조언대로 아침/저녁에 1알씩 해준이에게 새로운 약을 먹였다.


그러자 해준이는 밥을 통 먹으려 하지 않았고 무기력했고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세심히 관찰한 나는 의사의 조언데로 다음날 약을 1/2알로 줄였다.

그러자 해준이는 조금 더 나아졌지만 여전히 식욕도 의욕도 없어 보였다. 



이틀간 지켜보던 나는 약을 더 작게 나누어 해준이에게 아침에 1/4알, 저녁에 1/2알을 주었다.

아침에 특히 식욕이 없는 것을 고려해서 아침 약은 더 줄이고 자기 전 약은 그대로 둔 것이다.


그러자 해준이는 다시 눈에 생기가 돌며 활동적이 되었고, 밥도 다시 잘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격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에게 맞는 양을 찾은 것이다.

의사가 최초 권유한 양보다 훨씬 적은 양이었다.


나는 의사와의 전화 면담 및 아이를 관찰한 결과, 해준이가 보통 아이들보다 약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여 몸무게 관련 정량보다 1/4 정도로 적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준이는 그렇게 소발작 약, 대발작 약, 그리고 공격성 약까지 총 3개의 약을 먹게 되었다.


해준이의 공격성은 현저히 줄어들어 더 밝고 안정되게 생활하게 되었고, 가끔 화를 내더라도 지속시간이 2분 이내로 매우 짧아졌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약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서,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 우리 가족이 많은 시간을 너무 힘들게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가장 힘들었을 해준이에게도 말이다.


그는 스스로 머리를 때리며 울고 날뛸 때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남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혼자만의 고통 속에서

말이다.




해준이가 처음 대발작을 하는 모습을 봤을 때 난 너무나 놀랬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약물치료의 필요성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었고,


오랫동안 온 가족을 힘들게 했던 공격성에 대해 부작용 없이 조절하는 약을 비교적 빨리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을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걸까?




이렇게 우리는 아주아주 느리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한걸음 나아가고 다섯 걸음 뒷걸음치는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힘든 일이 바뀌어 오히려 좋은 일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 소발작과 대발작 1부, 전화위복(轉禍爲福) 2부 끝 >



제목 : 기분 좋은 바람 / 캔버스, 유화 50 cm×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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