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 Oct 08. 2024

선생으로 사는 낙

 제자라는 귀한 재산

 브런치북에 글을 쓰기 위해  일기장을 들춰보고,  남아 있는 기억들에 집중해 보면서  지나간 시간들을 정리하고 기록할 수 있어 좋았다.

드물지만 내가 쓴 글을 읽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너무 신기하고 고마웠다.

호주에 사는 초등학생 조카가 고모의 다음 연재를 고대하고 있다는 말에 신이 나기도 했다.

알림 표시가 뜰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보며 새로운 일상의 즐거움도 갖게 됐다. 

내 글을 읽고 응원의 편지를 보내 준 청년 사장님도 있어 그 간의 고생이 온전히 위로가 되었다.


이  글은 그 편지의 일부이다.


 가치관 정립이 바르게 되지 못한 반항 청소년들을 “사명감” 하나로 바르게 품어내시려는 루이 작가님만의 노력들.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선생님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이 제삼자인 저에게도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저 또한 벌써 30대 중반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순수하게 중심을 지키며 정직함을 잃지 않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선생님들의 올바른 훈육과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 또한 무너져가는 교권 회복을 기원하고,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권리가  절충되어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줄 수 있는.....,

긍정의 줄다리기가 이뤄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히 잘 읽었고, 다음 연재 또한 기대해 보겠습니다 ㅎㅎ

루이 작가님의 인생 2막.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92년, 교직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서울의 북쪽에 자리 잡은 여고였다.

처음 맡은 과목은 고3 문학이었는데, 그때 아이들 나이가 19살이었으니 대학을 막 졸업한 나와의 나이차는 고작 다섯 살 밖에 나지 않았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은 무척 성숙하고 안정적이었으나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디딘 나는 모든 게 서툴고 어설펐다. 어른스러운 학생들은 실수투성이인 새내기 교사에게 무한한 배려와 애정을 보내주었다.

5월, 학교를 방문한 장학사와 외부 인사들 앞에서 대표 수업을 하게 된 날 나는 너무 긴장하여 실수를 남발했고, 시간 배분도 계획대로 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수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뜻대로 되지 않은 수업 때문에 속이 상한 나는 자리로 와서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선배들은 첫 공개수업인데 그만하면 잘한 거라 했지만 나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로 늦어진 퇴근시간.

해가 어렴풋이 남아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때.  학교 구석에 세워진 차로 향하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색인 내 차가 포스트잇에  뒤덮여 핑크색이 되어 있었다.  내가 상심한 걸 알고 아이들이 포스트잇에 응원의 글을 써서 차 전체에 빼곡히 붙여 둔 것이었다. 나는 터질 것 같은 감동과 감사로 한 장 한 장 뜯어서 읽으며 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마지막 글을 읽고 나니 어느새 사방이 컴컴해져 있었다. 교통체증이 심한 길을 따라 한 시간 반 넘게 걸려 집에 왔지만, 퇴근 시간마다 찾아왔던 극심한 허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든든하고 행복했다. 그때의 벅찬 감정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핑크빛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포스트잇 이벤트를 기획했던 반장은 지방에서 하는 내 결혼식에도 와서 재치 있는 그림과 글로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 그 아이는 지금 쉰 살 중년으로  하와이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는데 여전히 나를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부른다. 귀하고 오랜 이 인연은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 이제는 가족 같은 소중한 관계가 되었다.


 이 처럼 처음 수업을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인연을 이어 온 제자도 있고, 중년이 돼서 갑자기 연락이 된 제자도 있다. 몇 년 전 스승의 날을 앞둔 오후, 커다란 꽃바구니 하나가 배달됐다.

메모에는 이름과 직접 쓴 카드가 있었는데

<선생님 저는 졸업생 A입니다. 선생님은 저를 기억 못 하실지 모르지만 늘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는데,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그 아이가 너무 그리워서 눈물이 났다. 역시 잘 컸구나......, 너무나 반듯하고 성실했던 너를 내가 왜 기억을 못 하겠니. 단발머리에 안경 쓴 하얀 얼굴이 생생하기만 한데......,

나는 바구니에 새겨진 꽃집을 검색한 후 전화번호를 찾고 꽃집에 전화를 했다. 사정을 말하고 제자와 연락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곧 꽃집으로부터 전화번호를 받고 통화를 하게 되었다. 부끄럼 많던 그 아이는 밝고 활발한 40대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곧 재회했고, 그 아이도 나도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며 하나도 안 변했다며 말하며 소리 나게 웃었다. 이제는 가끔 만나 맥주도 한잔 하는 이모와 조카 같은 사이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제자를  만나러 시내로 나갔다. 정확히는 을지로 3가.

결혼을 앞둔 제자 B가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을 예약했다며 시내로 나와서 바람 좀 쏘이시라고 한다.

'선생님, 지하철 어려워하셔서 주차 편한 데로 예약했으니 차 가지고 편하게 오세요' 한다.

고맙기도....., 배려심도 여전하다. 이런 보물을 아내로 맞는 남편은 정말 복 받았네.

시내로 외출해 본 적이 언제인지..... 학교 다니고 애 키우느라 맘 편히 외출도 못했지. 집-학교, 학교-집의 동선만 주로 다니다 보니 서울에 산 지가 40년 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못해 길만 나서면 어리버리해진다. 약속 시간이 다가 오자 운전하기가 겁이 났다. 마침 시내에서 대형사고도 있었던 데다 내비게이션에 뜬 주행길이 모두 벌겋다. 차 타고도 헤매겠다 싶어 한 시간 일찍 지하철을 타고 나섰다

3호선 을지로 3가. 1번 출구에서 280미터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이다.

대학 때 와보고 처음 오는 곳 아님? 혼자 중얼거리며 1번 출구를 찾아 열심히 직진을 했다. 회사원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출입구를 따라 열심히 걷다 보니 어느새 을지로 2가라고 하는 표지판으로 바뀌어 있다. 엥 더 왔나? 싶어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멀리 2번 출구가 보이길래 그 맞은편이 1번 출구겠지  직관적으로 판단해서 올라가니 거긴 또  12번 출구다. 나이 들어서는 뭐든 신중해야 된다고 스스로의 다짐을 또 잊었었네. 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침착하게 한걸음 한걸음 옮기며 사방을 주시해 보니 2번 출구 옆에 비스듬히 세워진 1번 출구가 보인다. 1번 출구 찾는 일이 이렇듯 신중할 일인가 참.. 한숨이 난다. 이런 나를 애들이 알까?ㅎㅎ

1번 출구로부터 280 미터라.....,. 이 정도? 요정도 되나? 걸음을 옮기며 가다 보니 마천루같은 높은 빌딩이 눈 앞에 보인다.  제자 A가 다닌다는 회사다. 빌딩 사진을 한 컷 찍어서 제자 A에게 전송했다.


     여기 다니는 거야?

     어머 어머 ㅋㅋㅋ 선약 있으셨어요? 우왕~~

     미리 연락 주시죠. 여기 맛집 많은데...

     다음에  연락 주시고, 한 번 나오세요.


 잘 자라서 이렇게 건사한 곳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한데 마음 씀씀이도 정말 고맙고 정겹다.


300미터는 더 오지 않았을까? 역시 나에게 길 찾기는 어려운 숙제였다. 외국 사람도 아닌데 묻기도 창피해안다 척을 하며 애들이 하듯 지도앱을 켰다. 이 역시도 어렵네... 뱅글뱅글 돌며 방향을 잡다가 지도와 상관없이 눈앞에 나타난 유명 호텔을 발견하고는 위치를 가늠해 가며 눈치껏 식당을 찾아갈 수 있었다.

식당에 도착하니 제자 B와 C가 와 있었다.

오셨어요? 길은 쉽게 찾으셨어요? 하는데 그렇지 대답했다. 매사 당당한 척, 다 아는 척하며 살았는데 자기들은 쉽게 찾은 여기를 내가 헤매고 다녔다는 말은 절대 못 하겠다.

곧 결혼하는 B는 톡도 자주 하고 1년에 서너 번은 보는데, C는 졸업하고 정말 처음이다. 올해 서른두 살이니까 거의 14년 만에 보는 것 같다. 그래도  신기한 게 한눈에 알아보겠다.  

"어머 얼마만이야? 어쩜, 젖살이 쏙 빠져서 어른이 다 됐네. 정말 예뻐졌다."

"선생님도 그대로 세요. 길에서 만나도 바로 알 것 같아요."

제자 C는 간호분야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곧 박사과정이 끝난다고 했다. 지적하고 혼도 내고 위로도 하며......, 잘돼라 잘돼라 가르친 제자들이 대기업 빌딩에서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고, 느리게 느리게 전진했지만 끝내 박사의 목표를 달성한 제자라.....,

이렇듯 잘 난 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 부르며,

여전히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지지하며, 내 신념에 찬사를 보내 준다.

을지로를 헤매며 이젠 안되나 보다며 한탄했던 마음이 많이 많이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가끔은 내가 하는 일이 보잘것없고 버거움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교직이라는 것이 아이들이 품고 있는 희망이라는 씨앗에 물을 주고 싹을 틔우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선생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고 보람 있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교사,  작지만 위대한 사명자!



이전 12화 헉~ 충격 사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