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계

몽리

by 김미령

공공도서관에서 선정하는 <2023 원북 독서동아리 모집>에 우리 독서회가 선정되어 독서동아리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다. 며칠 전 부산에서 활동 중인 여러 독서동아리가 선정 수를 초과하여 신청하였고, 뒤늦게 신청한 우리 동아리는 선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담당자의 전화 상담 내용이 있었다. 상담 내용을 전해 듣고 모두가 포기하고 있던 일이었다. 오늘 다시 도서관 담당자에게 연락 왔다. 올해는 동아리 지원금을 20만 원에서 17만 원으로 소폭 하향하고, 애초 모집 팀 수였던 170팀을 초과한 190팀을 선정하게 되어 우리 동아리도 혜택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지원금은 희망도서로 전달될 거라는 설명과 <원북 독서동아리>로 선정되었으니, 도서관에서 요구하는 동아리 운영계획서나 회의록, 출석부 등 공식적인 문서 제출과 필수 활동이 있다고 한다. 번거로운 일도 있겠지만, 함께 뭔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생긴다.


도서명 : 이방인

저자 : 알베르 까뮈

출판 : 믿음사

출간 : 2011년 03월 25일

줄거리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문장이 유명한 까뮈의『이방인』.

소설 속 주인공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했다고 재판에서 얘기한다. 소설 속에선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의 재판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은 매정한 아들에 대한 비난이 주된 사건이 된다. 뫼르소가 신을 거부했다는 것과 사회적 윤리관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두 가지 관점으로 그는 악인이 되어 사형이 선고된다. 그가 이루지 못한 현실과의 타협으로 그의 생은 마감된다.

아프리카 알제리, 이슬람교가 대다수인 곳에서 태어난 백인의 프랑스인 까뮈.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과 그가 느꼈을 이방인의 삶이 오버랩되어 소설을 읽었다. 고전 문학 소설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독자들에게 풍부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가치중립적 시선으로 글을 쓰고, 독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으로 작품 속 사건을 이해하고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을 해석한다. 책을 읽거나, 음악과 미술품을 감상할 때 작가가 제시한 정보로 작품에 대해 쉽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들은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다. 독창적이고 다양성을 가진 작품들은 현실문화에 다채로움을 제공하는 좋은 원료가 된다.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도 인상파의 그림처럼 묘하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낯선 자의 이탈적인 관념과 행동은 정답 없는 해석들이 가능하다.

관 계

김미령


나는 모든 관계에서 때때로 이방인이 된다. 혈연관계나 사회적 관계 구분 없이 자의든 타의든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고, 예상할 때도 있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이방인이 되기도 했다. 사회 집단 내 관례에서도 이방인 적인 사고와 행동은 가능하다. 때때로 나에게 나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바라보는 자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하는데, 짐승들과는 의사 교류를 할 수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는 사안이긴 하다) 관계들 속에서 간혹 느껴지는 낯선 공기. 예전과 다른 미묘하게 틀어진 상대와의 거리감 속에 느껴지는 서늘함은 나를 외롭거나 분노케 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과 끊어 낼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이방인이 되었을 때, 그 상황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 객체가 되어 자신을 낯설게 보고 있을 때의 스산함이란. 나에 대한 자괴감과 무너짐 시작된다. ‘평소 어떻게 행동했길래 이런 상황이 생겼나?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놓친 것이 뭐지? 저 인간은 왜 저래?’라는 나에게 던지는 물음표 가득한 질문과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여러 정황을 조합하고 논리적 판단에 근거한 답을 찾아도 정답과 오답을 오갈 뿐 명료한 기준과 판단이 힘들다. 생각하기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고, 기준이 달라지면 옳고 그름이 흐릿해지고, 선과 악의 판단도 헷갈리는 혼란스러운 지점이 계속된다. 그 혼란의 틈에 나는 이방인이 되어 머문다. 불편한 의식 속 어느 지점에 머무는 동안 나는 나에게 실망하여 애꿎게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주변에 대한 분노로 억울하다고 외치며 자신을 위로하기도 한다. 엄청난 감정적 피로감에 종국엔 맥이 풀려 타이른다. ‘이제 그만, 여기서 그만 멈추자. 받아들이자.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나의 잘못 일 수도 있다. 나는 할 때까진 했다는 생각을 한다.’ 낯선 시간 속을 견디며 나를 일으켜 세운다. 툭툭 털어낸 잡념과 뉘우침과 분노가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뿌려진다. 그렇게 견디며 보낸 시간과 양만큼 나는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는 걸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저 내가 지치거나 익숙해진 거다. 간혹 내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 상황이 종료되거나, 새로운 상황 속으로 내가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나를 둘러싼 공간 속에서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해 선별된 단어와 행동을 상식과 교양이라는 가치관 아래 조절한다. 내 생각과 다른 말들을 공기 중에 쏟아내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적당한 진실과 거짓 속에 악함이 없는 거짓말과 알맞은 웃음은 인격과 사회화로 포장된다. 좀 더 매끈하고 호감스러운 나를 추구한다.

내가 이방인이 되어도 좋다는 결심 하는 순간 나의 행동과 말들은 거침이 없고,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단죄하듯이 바라본다. 내가 옳고 그름의 기준과 선과 악의 정답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 아래 하는 나의 언행은 나를 솔직하게 만든다. 나의 의식과 가까워진 나의 모습들은 관습과 규범으로 꾸며진 나의 모습보다 더 나 다 운가? 글쎄, 그런 것 같진 않다. 한바탕 나의 드러냄을 행하고 나면 나는 또다시 그런 내 모습에 낯선 소름이 돋고, 시차를 둔 이방인의 모습으로 후회하기도 한다. 반복되는 위로, 타이름, 뉘우침, 분노는 또 다른 질문들을 내게 퍼부어댄다. 정답은 늘 한결같을 수 없으며, 악도 언제나 단죄되진 않고, 선도 늘 옳음은 아니다.

모든 상황 속에 나의 판단이 다수의 타인들과 획일화된다면 나는 외롭지 않을까? 나는 내쳐지지 않을까? 나는 두렵지 않을까? 나는 고민하지 않을까? 무겁고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사납게 내리더니 갑자기 햇살이 비치는 날씨가 낯설다. 나는 오늘도 모든 관계 속에서 외롭거나, 두렵거나, 망설인다. 나는 아직도 이방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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