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는 유명한 문장의 의미를 길게 적어 놓은 장편소설이다. 편의를 위한 물건들은 목적성을 두고 만들어진다. 냉장고는 음식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발명되었고,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졌다. 냉장고나 의자는 기능을 상실하면 폐기된다. 식육으로 길러지는 돼지, 소, 닭들도 목적성이 뚜렷하다. 목적성을 미리 두고 존재하게 된 것을 실존주의 철학에선 “본질”이라고 본다. 인간은 특별한 목적성 없이 태어난 “실존”적 존재다. 사람은 어떠한 기능을 잃었다고 해서 폐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를 가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고 정리해 표현한다.
영도 흰여울 마을 벽에 적혀 있던 “나. 지금. 여기”라는 글자가 내게 와닿았던 그날. 그 글의 함축적 의미가 좋아 가끔 되뇌었다. 얼마 후 “나, 지금. 여기”라는 글은 어려운 실존주의 철학 개념을 쉽고 간단하게 나타낸 문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독서회에서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추천했다. 사르트르는 회원님들께 기면증, 두통, 독서 중단의 증상을 선물했다.(내가 한 걸까?ㅋㅋ) 읽어 내기가 결코 쉬운 책은 아니지만, 읽고 나면 보이지 않는 완장을 어깨에 단다. “나는 구토를 읽어 봤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의미부여가 생긴다. 『구토』를 읽으며 이해할 수 없는 사르트르의 언어가 좋았다.
나는 그저 살아남아 있을 뿐이에요.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난들 생존 이유를 알고 있단 말인가?
‘까닭 없이’ 주어진 이 인생 앞에 놀라고 있다.
<본문 중 발췌>
까닭 없이 주어진 내 삶에 오늘도 글을 쓴다. 아직 완벽히 이루지 못한 “작가 되기”라는 나의 목적을 위해 작은 몸짓이라도 발버둥이라도 쳐본다.
희 주
김미령
꽃이 배경으로 그려진 가족화가 바람을 타고 도로 위로 날아오른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자그마한 여자아이. 4월의 도로는 벚꽃 비가 흩날린다.
“엄마, 여기서 건너자. 더 걷지 말고. 응?”
“안돼, 여긴 위험해. 차가 많아.” 엄마는 늘 아파트 정문과 가장 가까운 건널목을 지나쳐 다음 건널목을 이용한다. 건널목 앞에만 서면 엄마는 내 손을 꽉 잡았고, 손에 땀도 난다. 엄마는 강아지풀 같이 하늘거리고 겁이 많다.
“엄마, 나 아이스크림 먹을래.” 뒤쪽 건널목을 이용하면 매번 귀찮지만, 건널목 앞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날엔 기분이 달콤하다.
“희주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엄마아, 아니이, 딸기이.” 엄마는 여기 올 때마다 묻는다. 나는 바닐라보다 딸기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다. 도로에 가득한 벚꽃이 딸기 아이스크림 색깔이랑 비슷하다. 엄마는 벚꽃이 예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꽃으로 가득한 벚나무가 참 예쁘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희주야, 안녕.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안녕하세요.” 나는 문 앞에 서서 꾸벅 인사를 한다. 한글 선생님이 오셨다.
“어머, 희주야, 너 너무 웃긴다.” 채점하던 선생님이 크게 웃는다.
“희주 말이 맞네. 엄마는 간식을 주시지. 오늘은 뭐 먹었어? 맛있었어?”
“딸기 아이스크림요. 건널목 앞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딸기 맛으로 컵에 담아 먹었어요.”
“희주는 옷이 좋구나? 희주는 어른이 되면 예쁜 옷을 많이 입고 싶니?”
“네, 그런데 어른 말고요. 엄마가 8살 되면 입을 수 있다고 했어요. 3년 있다가요.” 나는 발이 닿지 않는 책상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붙박이장 문을 연다.
“선생님 이거 보세요. 진짜 많죠? 엄마가 미리 다 사놓은 거래요. 희주 학교 갈 때 입으라고요. 서랍 안에도 있어요.”
“와, 진짜 많네. 희주 빨리 커서 학교 가야겠네.”
“네.” 나는 선생님께 크게 웃어 보인다.
“어머니, 수업 다 끝났습니다. 희주 정말 재미있어요. 이것 좀 보세요.”
선생님은 한글 교재를 거실로 들고나가셔서 엄마한테 펼쳐 보여 주신다.
① 엄마는 나에게 ______ 주신다. ② 나는 커서 ________ 싶다. "어머니, 제가 방문 수업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1번은 <사랑>, 2번은 <장래 희망직업>을 적거든요. 그런데 희주는 1번엔 <간식> 2번엔 <예쁜 옷을 입고 싶다>라고 했어요. 어머님도 저처럼 쇼핑 많이 좋아하시네요. 호호 저도 작년에 백화점 역시즌 상품 할인 가격이 좋아서 아들 녀석 패딩을 한여름에 샀거든요. 입혀보니 많이 크더라고요. 워낙 애들은 금방금방 커서 넉넉한 크기로 구매했더니. 너무 큰가? 싶기도 해요. 호호.”
“아…. 네.” 엄마는 식탁 위 물컵을 급히 마신다.
“엄마, 곧 이사 갈 건데, 영어학원 레벨 테스트를 꼭 쳐야 해? 학원도 옮길 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얘가 진짜. 분점이라고. 엄마가 몇 번을 말했니? 월반하면 옮기는 학원에서도 그대로 유지야. 너 레벨 테스트에서 떨어지기만 해 봐.” 12살 내 인생의 불행은 영어다. 왜 조상님들은 개고생 해가며 바벨탑을 쌓아서, 신의 분노를 산 걸까? 그리고 신도 바벨탑만 부수면 되지, 인간의 언어를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잘게 쪼개 버린 건 너무 한 거 아냐? 그로 인한 후손들의 경제적 손실과 저주스러운 고통은 어쩌라고. 내 생각이지만, 언어가 같았으면 인류도 전쟁을 덜 일으키지 않았을까? 공부해야 하는데 잠이 오네. 쏟아진다. 글자가 사라져 가네. 공… 부… 해야 하는데.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다. 분명히 봄인데, 체감은 여름이다. 아침부터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은 똑같은 옷에 똑같은 모자에 마스크까지 하시고 짐을 옮기고 계신다. 마치 한 사람의 분신술 같다. 새집으로 옮겨진 옛집의 물건들이 상자 속에 가득하다.
“사장님, 이 상자가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조심히 가세요.”
“희주야, 뭐 마실래? 엄마랑 아빠는 아파트 입구 카페에 시원한 커피 사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아뇨, 전 얼음 많이 넣은 찐한 아이스티요.”
“그래, 우리 음료수 먹고 좀 쉬었다 나머지 짐 정리하자. 너도 쉬고 있어.”
“네. 전 괜찮아요. 제 방은 정리하고 있을게요.”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커다란 상자들이 묵직하게 놓여 있다. ‘어 이건 왜 이래? 희수라고? 오타네. 엄마가 진짜 바쁘셨네.’라고 생각하며 상자를 열었다. 아기의 초음파 사진이 날짜별로 붙은 산모 수첩과 신생아가 입는 아주 작은 옷도 곱게 개켜 있다. 투명 플라스틱 캡슐 모양 상자에 든 탯줄도 보인다. ‘와, 신기하네. 이런 게 있었어?’ 나는 처음 보는 나의 어린 기록들에 흥분되어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그런데, 이상하다. 산모 수첩도 아기 수첩도 탯줄도 각각 두 개씩 있다. “박희수 아기 수첩, 박희주 아기 수첩” 수첩을 펼쳐본다. 예방 접종 날짜가 2003년과 2009년으로 시작하는 각각의 아기 수첩. 내가 아주 어릴 때 보았던 사진이 가득했던 앨범. “엄마, 여기 얼굴은 내가 아닌 것 같아.”라고 했더니 엄마가 “아니야. 희주 맞아. 사진이라서 그래, 그리고 애들은 크면서 얼굴이 점점 변해.”라고 대답하고 엄마가 급히 덮어 베란다 창고로 가져갔던 그 앨범이다. 앨범을 열어 찬찬히 자세하게 본다. 내가 아니다. 내가 입었던 옷을 입고 있지만, 내가 아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들고 먹고 있는 이 아이는 내가 아니다.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다. 손이 떨리고 심장박동은 온몸으로 진동하며 쿵쾅거린다. 꽃이 가득한 가족 그림.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현관문이 열리고 부모님의 소리가 들린다.
“희주야, 좀 쉬지. 여기 아이스티.” 음료는 바닥으로 무겁게 떨어지고 얼음이 바닥에 흩어진다. 나와 마주한 엄마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눈을 흔들림 없이 정면으로 쳐다본다. 아빠가 소리쳤다.
“여보, 아직, 안 버렸어? 내가 버리라고 도대체 몇 번을 말했어.”
엄마는 아직 내 방문 앞에서 울고 있다. 우는 엄마는 현실이고, 내가 본 사진은 현실이 아닌 것 같고, 침대에 누워 흘리는 내 눈물이 머리카락 사이를 끊임없이 가로지른다. 눈을 감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크고 또렷이 들린다. 눈을 뜬다. 몇 시지? 얼마나 지난 걸까? 문을 확 열었다.
“어엉, 어어엉. 희주야, 희주야.” 퉁퉁 붓고 빨개진 엄마의 눈과 코.
“이제 그만해. 엄마 울음소리도 듣기 싫고 눈물도 보기 싫어.”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여름 햇살. 차가운 딸기 스무디를 손에 들고 엄마와 나란히 걷는다.
“엄마, 나는 희수를 대신해서 태어난 게 아니야, 나는 나로 그냥 태어난 거야, 지금 여기 엄마랑 걷고 있는 딸은 나야. 희수를 대신해 살아가는 게 아니고, 나는 나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 희주로.”
“알아, 엄마가 미안해. 엄만 딸을 건널목에서 구하지 못한 자격 없는 엄마가 아닌,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어. 잃어버린 자식이 없는 엄마가 되고 싶었어. 엄만 또 실패한 엄마가 되어버렸네. 딸에게 상처 준 엄마로. 거짓말하는 엄마로.”
“아니야, 엄마. 내가 희수가 아니라서 희수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는 몰라. 그렇지만, 희주 엄만 좋은 엄마야. 오늘부터 엄만 희주 엄마만 하는 거야. 지금부터 일일이야.” 팔을 크게 벌려 엄마를 깊게 안아 본다. ‘엄마, 사랑해. 나는 죽지 않을게, 엄마와 살아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