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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령 Oct 14. 2023

장 난

말이  품은 마음 8

   “민우야, 어디야? 출발했어?”

   “아니, 이제 퇴근하려고. 조금만 기다려 15분이면 도착해?”

   “아니, 오늘은 못 만 날 것 같아. 우리 일요일에 봐. 내일도 출근할 것 같아.”

   “가희야, 그렇게 일하면 몸 상해. 어제도 늦게 까지 야근했잖아. 저번 주 토요일도 출근하고.”

   “미안, 미안, 부장님이 갑자기 해외 출장 가신다고 해서, 그전까지 보고서 마무리해서 결재받아야 하거든. 지금 바빠서 길게 통화 못 해. 다시 전화할게. 끊어. 미안. 사랑해.”

나는 끊어진 휴대전화 화면에 뜬 가희의 이름을 멍하니 쳐다본다.

   “P건설 임원 김가희”

라고 직접 저장한 자신의 이름. 가희는 최단기 최연소 임원이 되어 회사에서 전설이 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기의 화면이 대기 모드로 까맣게 바뀐다.

   ‘여친에게 바람맞은 건가? 가자. 집으로.’   


   언젠가부터 출근하면서 마시던 커피가 점점 쓰워진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기가 빨리는 것 같고, 월급날 다음으로 기다리는 점심시간은 늘 아직이다. 산소 호흡기 같은 퇴근시간이 반가운 입사 8년 차 직장인. 나와는 달리 매일 회사에 자석처럼 출근하는 가희는 열정적으로 회사 일을 한다. 회 센터 활어장에서 소쿠리에 잡아 올린 반짝이는 핑크색 도미처럼 팔딱 거리는 가희의 에너지는 언제나 나에겐 넘사벽이다.      


   “난, 여자가 있는데, 난, 여자가 있는데.”

휴대폰 벨소리로 지정해 놓은 음악이 힘차게 울린다.

   ‘가희다. 그래 난 바쁜 여자 친구가 있지.’

초록색 통화버튼을 터치한다.

   “네, 김가희 과장님.”

가희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왜 그래, 화났어?”

   “어허, 나 그렇게 속 좁은 남자 아니다. 일은 잘 마무리했어?”

   “응, 부장님이 맘에 든다고 하셔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지. 이제 한숨 돌렸고, 우리 저녁 같이 할까? 내가 미안하니까 비싼 한우 사줄게.”

   “그런데, 어떡하지? 나 강원도에 있어.”

   “진짜? 누구랑? 거기 왜 갔어? 너 어제도 그런 말 없었잖아?”

   “하하, 순진하긴. 장난이지. 집에 있어. 오늘은 4월 1일 만우절이야. 소고기 보다 애인 얼굴 보러 갈게. 너희 집 앞에 있는 식당에서 봐. 야근한다고 피곤할 텐데, 빨리 먹고 너도 쉬어야지. 내일도 정시 출근이지?”

   “응. 당연하지.”

가희는 편안한 차림으로 식당에 먼저 와서 고기를 굽고 있다. 내 기분을 의식했는지, 평소보다 말이 많다.

   “자기야, 자긴 학교 다닐 때 만우절 장난쳐 봤어?”

   “당연하지. 중학교 2학년 때 한 번, 3학년 때 한 번, 두 번 일거야. 푸하하. 지금 생각해도 진짜 난 그쪽으론 천재야. 만우절 이틀 전인가? 영어 학원 밑 단골 편의점에서 팥빙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편의점 이모님이 입구에 뚜껑 있는 멀티 쓰레받기통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으악. 으악. 어떻게? 어떻게? 말하시면서 소리 지르시는 거야. 평소 조용하신 분이 난리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쓰레받기 안에 엄청  큰 바퀴벌레 한 마리가 있다고 너무 무섭다며 쓰레받기를 편의점 밖으로 좀 빼서 벌레를 좀 치워 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 거야. 나는 그때 바로 만우절 아이디어가 번개같이 훅 하고 생각 난 거야. 다 먹어가던 팥빙수를 한 입에 쓸어 넣고, 휴지로 빈 아이스크림 통을 닦은 후 분리수거 통에 넣었던 뚜껑을 다시 챙겼지. 여기서부터가 히트야. 친구랑 합동 작전으로 쓰레받기를 편의점 밖으로 가져간 뒤 빗자루로 한쪽 틈새만 낸 후, 팥빙수 아이스크림 통 안으로 그 녀석을 몰아넣었어. 재빨리 뚜껑을 닫아, 편의점 이모님께 카타 칼을 빌려 조심스레 뚜껑에 흠집을 두 개 정도 내어 숨구멍까지 만들었어. 바퀴 벌레가 죽으면 안 되니까. 하하. 왜냐고? 다음 날이 만우절이니까 그 걸 교실에서 풀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거든.”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상상만 해도 소름 돋아.”

   “그런가? 아무튼 계속 들어 봐. 2시 컬투 쇼 보다 재미있어. 친구랑 같이 어찌어찌해서 팥빙수 용기에 바퀴벌레를 잡아 가뒀고, 집에 도착해 스카치테이프로 뚜껑과 용기를 십자모양으로 단단히 고정도 했어. 이 녀석을 혹시나 집에서 놓쳐 버리면 기절할 우리 엄마를 위해 단단한 봉인이 필요했어. 벌레도 숨은 쉬어야 하니  숨구멍이 막힌 아이크림 통에 다시 카타칼로 숨구멍 만들어 줬어.

수학선생님 시간에 한 번 풀고 담임선생님 종례시간에 한 번 더 풀 계획이었지. 하하. 수학 선생님과 담임선생님 두 분 다 여자분 이셨지. 그 당시 우리 담임선생님께선 종례가 무지 길었거든. 다음날 등교하면서 초등학교 문방구 앞에서 바퀴벌레랑 모습이 비슷한 장난감 곤충을 두 개 더 사서 학교로 준비해 갔어. 계획은 완벽했어. 미리 반 아이들이랑 입을 맞춰서 수학시간에 푼 바퀴벌레를 발로 밟아 죽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종례시간에 또 써야 하니, 꼭 다시 생포하자고 우린 결의를 다졌어. 수학 시간에 먼저 한 번 풀었더니, 선생님은 교실을 나가 버리셨지. 수업시간은 자유시간이 되었고, 반 아이들과 합심해서 그놈을 다시 잡아 가뒀어. 그때의 단결심이란 3차 대전이 일어나도 우린 승리했을걸. 하하. 엄청났어. 종례시간에 선생님께서 들어오시자마자 풀어서 종례도 훅 끝내고 우리는 교실을 나왔지. 친구들한테 그땐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집에 가기 바쁜 애들은 바퀴벌레에 관심도 없더라고.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쌤들은 끝까지 모르셨지.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상황들은 너무 자연스럽잖아. 하하.

   그리고 중 3 때 우리 반 단체 채팅 방에 교실에 전기 공사가 있어서 15분 늦게 등교하라고 담임선생님처럼 공지 올려서 애들이 다 같이 15분 늦게  등교했어. 그건 범인이 확실한 장난이라서 만우절이라 무사히 넘어갔어. 우리 반이 다른 반에 비해 등교 시간이 15분 빨랐거든.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께선 교사 발령 후 첫 담임을 맡으셨는데,  열의가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꽃이셨어. 피곤했지. 아침에 독서하라고 우리를 15분이나 빨리 등교시킨 거지. 그 뒤로 등교시간은 평준화되었고, 난 과반수가 넘는 친구들의 지지를 얻어 반장이 되었어. 거짓말 조금 보태서 기권한 놈, 투표용지에 실수 한 놈 빼고는 다 날 찍었데. 하하.”

   “자기, 보기랑 다르네. 자기 생긴 건 완전 모범생이잖아.”

   “그런가? 재미없게 생겼다는 뜻이지?”

   “뭐래? 그런 뜻 아니잖아?”

   “농담이야. 오늘 만우절이잖아.”

   “호호. 그러네. 민우야, 나랑 결혼할 거야?”

   ‘갑자기 훅 들어오는 결혼? 오늘 만우절. 아, 농담인가 보다.’

상추쌈을 입안으로 넣고 있던 나는 반쯤 들어간 상추쌈을 도로 꺼내, 가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상추쌈을 다시 입으로 넣으며 우물거리며 말한다.

   “너 만우절이라고 장난하는 거지? 안 속아. 순간 놀랬어.”

   “아니야, 너만 좋으면 나 너랑 결혼할 거야. 넌 다른 남자들이랑 다르더라. 내가 회사 일로 바빠서 사귀는 사람한테 신경을  못 써준다고 화내지도 않고, 볼 때마다 늘 배려해 주고  편하게 해 주는 네가 좋아. 널 만나면 불편하지 않아. 넌 나의 인생을 지켜줄 것 같아. 난 결혼해도 정년까지 직장 생활하고 싶거든.”

민우는 입안에 든 쌈을 꿀꺽 삼킨다.

   “아, 일생에 한 번인 청혼을 상추쌈 싸 먹으며, 이렇게 평범하게 받을 수도 있구나. 그런데 가희야, 너 결혼식엔 꼭 와야 한다. 결혼식 날 출장 가면 안 돼. 신혼여행도 꼭 가야 하고.”

   “푸하하, 알았어. 너, 말에 뼈가 있는데?”

   “가희야, 나는 딸 바보 아빠가 되고 싶은데. 딸 둘은 낳는 거다. 어때?”

   “뭐래? 맛있는 고기나 많이 드셔. 공깃밥이랑 된장찌개도 시켜줘?


    가희와 나는 둘 다 남들보다 결혼이 많이 늦었고, 오랜 직장생활로 모아둔 결혼준비금으로 결혼 준비는 별문제 없이 진행이 빨랐다. 가희는 여전히 회사 일로 바빠서 결혼식 준비에 까다롭지 않게 쉽게 쉽게 결정하고 예약했다. 우리가 의견이 유일하게 안 맞는 상황은 농담처럼 스치는 자녀 출산 문제였다. 나는 늘 딸 두 명은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럴 때마다 가희는 농담처럼,

   “나는 자기만 있으면 돼. 아이는 없어도 돼. 우리 둘만 재미나게 살자.”

라고 웃으며 얘기했다. 나는 결혼하면 가희도 생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김치를 먹듯. 결혼하면 아기는 당연한 기본 옵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희도 나도 아이에 대한 생각을 심각하게 얘기하지 않았고, 몇 번 편하게 농담처럼 얘기한 후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결혼 후 직장 생활에서 소멸되었던 의욕과 활력이 다시 되살아났다. 가정이 생겼고, 세대주가 된 나는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는 아내가 있고, 곧 예쁜 딸도 생길 테니, 열심히 일해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빨리 하고 싶었다. 멋진 남편과 아빠가 되어야겠다는 목표와 꿈이 생겼다. 나는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늘 형들의 옷을 물려 입고, 동물의 왕국처럼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험하게 싸우며 컸다. 나와는 다르게 나의 딸들은 공주처럼 키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엔 승진할 것 같았고, 진짜로 동기들 중에 가장 빠르게 과장이 되었다.

   “자기야, 나 과장 승진 했어. 이 과장, 이 과장님 크크. 입에 쫙쫙 붙네.”

   “진짜? 축하해. 민우야. 오늘 마침 야근이 없어. 우리 과장끼리 축하주라도 해야지. 우리 남편 최고.”

저녁을 먹고 가희와 연애 시절 가끔 가던 와인 바에 방문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와 은은한 조명, 유리잔에 비친 반짝이는 조명. 둥글고 큰 와인 잔에 담긴 붉은 자주색 와인 에라주리즈 맥스는 내 말에 자주 웃어주는 가희를 그날 따라 유독 예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우아하고 얼큰하게 취한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출근 준비를 하던 가희가 옷을 입으며 나를 본다.

   “자기야, 이상해. 나 생리를 안 해. 요즘 피곤해서 그런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가희야, 혹시 임신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늘 콘돔 사용하잖아. 임신하면 난 끝장나는 거야. 우리 회사는  출산휴가, 육아 휴직하면 승진 포기나 마찬가지야. 나는 임신하면 안 돼.”

   “그래도 막상 아기가 생기면 너도 기쁠걸.”

   “아니, 절대. 네버. 네버. 생기지도 않을 아이 얘긴 그만하자. 나 먼저 출근할게. 이따 저녁에 봐. 퇴근 늦어지면 연락할게.”

가희가 나간 뒤, 나도 몇 분 후 집을 나선다.

   ‘가희는 말은 저렇게 해도 아기가 태어나면 예뻐서 난리일 거면서. 모성은 여성의 본능인데, 그게 어디 가겠냐고? 자, 나도 돈 벌러 가보자.’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더니, 가희가 벌써 집에 도착해 있었다.

   “가희야, 나 왔어. 벌써 자? 거실에 불도 안 켜고.”

안방 문을 여니 가희가 누워 있었다.

   “우리 가희 옷도 안 갈아입었네. 자는 거야? 나 왔어. 진짜 자는 거야?”

   “아니. 안 자.”

가희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손엔 임신 테스트기가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테스트기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가희는 내게 테스트기를 건 냈다. 표시창에 빨간 줄이 두 개다. 임신이다.

   “가희야, 축하해. 진짜 진짜 축하해. 나 아빠 되는 거야?”

나는 가희를 사랑으로 깊이 안았다. 가희는 팔에 힘을 주어 나를 밀어냈다.

   “축하? 나는 기쁘지 않아. 이제 어떡해. 내 승진은 나의 목표는 나의 삶은 끝장 난 거야. 왜 임신이 된 거지? 민우야, 우리 관계 가질 때 콘돔 잊은 적 있었어?”

   “아니. 절대, 네가 얼마나 챙기는데. 술 먹고  취해도 콘돔은 꼭 챙기더라.  콘돔이  네 주사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 콘돔이 불량이었나? 가희야, 이것도 다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받아들이자. 그만큼 조심했는데, 생긴 아이라면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아기 일거야. 나는 너무 기쁘다. 낼 아침에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자. 마침 토요일이네. 같이 가면 되겠다.”

   “응.”

다음날 집에서 가까운 산부인과를 찾아 접수를 하고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산부인과엔 배가 둥근 모들의 배 위에 남편과 자신의 손을 올려두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민우야, 나 임신이면 아기 지울래. 아직 세포일 거야. 아직은 아기를 가질 시기가 아니야.”

   “뭐라고? 난 절대 찬성할 수 없어.”

나의 순간적인 큰 소리에 가희와 나 사이에 어색함이 흘렀다. 나는 화가 났다.

   “김가희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우리는 진료실로 들어갔고, 가희는 초음파 기계 옆 침대에 누워 윗옷을 올렸다. 그때,

   “쿵, 쿵, 쿵. 산모님 심장소리 들리시죠? 축하합니다. 임신하셨어요. 여기 이 부분 보이시죠. 아기 심장 소리가 아주 좋아요. 5주 정도 되셨네요.”

   “저, 선생님 혹시 중절 수술 가능한가요?”

   “가희야, 지금 뭐라고 하고 거야?”

나는 다급히 말했다.

   “예? 아, 네. 임신 주 수는 가능하지만, 저희 병원에선 하지 않는 수술이니 다른 병원을 알아보셔야 합니다.”

   “네.”

가희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을 받아 병실을 나왔다. 병원 계단을 아무 말 없이 내려오던 가희는

   “살인이겠지. 심장소리가 들렸어. 나는 세포 일거라 생각했는데. 심장이 벌써 생겼네.”

가희는 내 눈을 보지도 내 손을 잡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가희야. 수술은 너무 해. 네 말대로 살인이라고.”

  “그렇지? 나도 그건 못 하겠어. 심장 소리가 너무 또렷하네.”

그날 가희가 입었던 찢어진 청바지의 구멍이 커서 병원 계단을 내려오며 굽어지는 가희의 무릎에 난 흉터가 내 눈에 들어왔다.


   가희는 임신한 사실을 회사에 얘기하지 않았다. 회사 일을 변함없이 하려고 욕심을 냈다. 야근도 휴일 특별근무도 불평 없이 했고, 혹시라도 뒤처질까 안절부절 하는 모습도 보였다. 얼마 후, 시작된 가희의 입덧은 가희의 등을 두드리는 나의 위도 같이 흔들리게 했다. 우우웩 욱. 가희는 우리에게 온 아이도, 입덧도 힘겨워했고, 냄새 때문에 음식이 먹기 힘든 탓에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희는 지속적인 구토로 인해 탈수로 쓰러질 것 같은 빈혈을 느꼈고, 일어서면 머리가 무척 어지럽다고 했다. 소변색도 진해져 병원을 방문해 몇 번의 수액 치료를 받았다. 소중한 우리 아기의 요란한 신고식. 가희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힘겨운 신체적 변화를 겪으며 무척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나는 최대한 가희의 기분을 살피며 맞춰야 했고, 집 안 일도 거의 내가 다  하다시피 했지만, 나는 그 모든 과정이 태어날 아기를 보는 순간이면 다 보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산부인과 정기 검진일도 내가 가희보다 더 잘 챙기고 나도 급한 일이 없으면 검진일에 늘 동행했다. 임신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나 담당 의사 선생님은

   “분홍색 옷을 많이 준비하세요. 아기가 엄마를 많이 닮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얼굴이 보이세요? 전 잘 안 보이는데. 아내를 많이 닮았어요?”

라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잠깐 나를 웃으며 쳐다보셨고, 나는

   “아, 알겠습니다. 이제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하하.”

라며 대답하며 들뜬 마음으로 어머니와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기 방은 예쁜 분홍이 들로 하나 둘 채워졌다.


   “민우야, 나 양수가 터진 것 같아. 빨리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가희는 새벽에 나를 깨워 다급히 말했다. 나와 가희는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다행히 가희는 자연분만으로 건강한 딸을 순산했다. 신생아실에 꼼지락 거리는 나의 공주님은 내게 온 작은 천사였다. 일을 하면서도 아이가 보고 싶어 몇 번이나 사진을 찾아봤다. 가희도 조리원에서 출산 후 힘든 몸을 천천히 회복하고 있었다. 나는 회사 일에 더욱더 의욕적으로 임해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아빠가 되었다는 현실이 내게 활력이 되었다.

가희와 아기가 집으로 돌아온 날, 분홍색이 가득한 아기 방 침대에 나의 천사를 눕혔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행복은 내 가까이에 있었고, 아기의 웃는 얼굴은 행복에 더 예쁜 행복을 더했다.


   빠른 업무복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가희는 90일의 출산휴가를 50일만 신청했다. 출산 휴가를 끝내고, 다시 출근하기 전 날 가희는 신입사원이 첫 출근 하듯 들떠 있었다. 아이는 장모님과 어머님이 번갈아 맡아 주시기로 하셔서 우리는 육아에 대한 고민이 없었고, 생각보다 모든 일은 편안했다. 그날 밤 퇴근 후 가희의 얼굴은 생기가 가득했고, 눈이 반짝였다.

   “오랜만에 업무에 복귀하니까 어때? 힘들지 않았어?”

   “좋아. 다 좋아. 긴장감 있는 곳의 경쾌함과 생생함 정말 오랜만이었어.”

   “우리 공주님도 오늘 할머니와 잘 지냈나 봐. 잘 자네.”

가희와 마시는 맥주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복직을 앞두고 가희는 딸아이의 모유 수유를 분유로 바꿨다. 나는 엄마 젖을 찾아 우는 은지를 보며 마음 아팠지만, 생각보다 쉽게 분유에 적응했다.


   오늘은 어린 은지를 돌봐 주신다고 힘드신 어머니를 위해 가까운 교외로 나가 바람도 쐴 겸 바다 풍경이 좋은 식당에 방문했다.

   “너희도 밖에서 일한다고 피곤할 텐데. 그냥 집에서 먹어도 되는데. 이러는구나.”

   “아니에요. 어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우리가 은지를 맡겨서 죄송해요.”

   “그래, 나도 이제 늙어서 너희 형제 끼울 때 보다 많이 힘들긴 하구나! 내가 아들 셋도 키웠는데. 호호.”

   “어머니, 감사드려요.”

가희가 다소곳이 말한다.

   “그래, 사돈어른도 힘드시겠다. 다음 달엔 외할머니랑 우리 은지가 같이 있겠구나. 여기 은지 좀 안고 있거라. 밥 먹기 전에 화장실에서 손 좀 씻고 오마.”

   “네, 어머니. 오늘은 식사하실 동안 제가 은지 볼게요. 편히 식사하세요. 은지야, 엄마한테 와. 아고고 예뻐라.”

복작복작한 도시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오랜만에 바닷가 근처 식당으로 나오니 시야가 확 뚫려 기분이 좋다.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위 윤슬은 별을 내려놓은 듯하고, 맑은 하늘과 잔잔한 바다가 평온하다.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시는 어머니가 자리를 못 찾으시는 듯 보여서 손을 높이 들어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여기에요.”

   “응, 그래. 요즘 내가 영 정신이 없구나.”

   “아니에요. 식당이 크잖아요.”

잠시 후 어머니는 또 손을 씻으신다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신다.

   “어머니, 금방 다녀오셨잖아요?”

   “아니다. 나는 손 씻으러 화장실에 간 적이 없어. 다녀올게.”

라고 말씀 하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가희는 그럴 수 있다고, 자기도 가끔은 자신이 금방 바른 화장품이 생각이 안 나서 다시 바르기도 한다며 웃으며 말한다.

   ‘그래 나도 손에 휴대폰 쥐고 휴대폰을 찾기도 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은지는 겉싸개 속에서 곤히 잔다. 임신기간 입덧이 유별나서 성격이 굉장한 공주님이 태어나나 싶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얌전히 조용히 안겨 잔다. 신생아들이 다들 한다는 낮 밤도 바뀌지 않아 밤에도 길게 잘 잔다. 이런 아이라면 한 명 더 키워도 될 것 같다. 혼자 크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형들이랑 지지고 볶고 싸우다 코피가 터져서 병원에서 치료도 받았지만, 가끔은 형제가 있어 든든한 기분도 든다. 지금은 다들 바빠 자주 못 보지만, 그래도 나와 같은 피를 가진 그들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큰 형 집이 오늘 방문한 식당과 가까워서 식사 후 어머니와 함께 방문하기로 며칠 전에 얘기해 두었다. 형도 아들을 낳아 기른다. 딸이 갖고 싶었는데,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라며, 나를 부러워한다. 어머니와 오랜만에 방문하는 형의 집이다. 마중 나온 형을 가희가 먼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아주버님. 별일 없으시죠? 그런데 형님은요?”

   “어머니, 오셨어요. 제수씨 오랜만이네요. 아내는 과일 준비 중이에요.”

형수님이 손을 닦으며 마중 나오신다.

   “오셨어요? 어머님 안녕하세요. 예쁜 손녀 보시니 좋으시죠? 동서 왔어. 도련님 소원 푸셨네요. 부러워요. 호호.”

   “그래, 손녀 좋지. 그래도 우리 큰 손자가 최고지.”

   “할머니. 아고 내 새끼.”

거실 식탁에 앉아 과일을 먹으려고 하니 어머니가 손을 씻겠다며 일어나신다.

   “어머니, 방금 전에 손자랑 같이 손 씻고 오셨잖아요.”

   “그래? 내가 손을 씻었어?”

   “할머니, 화장실에서 나랑 비누로 씻고 왔잖아.”

나와 가희가 눈이 마주치고 분위기는 약간 어색해진다. 잠에서 깬 은지가 울어서 어머니는 은지 배고플 시간이라며 분유를 타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형이 조용히 묻는다.

   “엄마가, 자주 저러셔? 아까 식당에선 어떠셨어?”

   “아니, 오늘 처음 보는 모습이야.”

   “어머니, 나이도 있으시니까 치매 검사는 받아보자. 초기에 약 드시면 진행 속도는 늦출 수 있어.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선 어머니는 곤히 주무셔서 자세하게 평소 일들을 물을 수가 없다.      


   “여보세요. 엄마?”

   “그래, 나다. 너는 바쁘다고 전화도 잘 안 하더니, 웬일이냐?”

   “엄마 내일 일찍 우리 집에 와서 은지 좀 봐줘요. 엄마, 나 어떡해. 흑흑”

   “왜 그래? 너 무슨 일이야? 이번 달은 안 사돈이 은지 보기로 했잖니?”

   “엄마, 엉엉. 시어머니께서 치매래. 어머님께서 불안해서 은지를 못 봐주시겠데.  자기가 정신이 없어져서 혹시나 은지를 어떻게 할 까봐 무서우시데.”

   “아이고, 저런. 쯧쯧. 어쩌니. 사돈도 마음이 말이 아니겠다. 그래 내일 일찍 너희 집으로 가마.”

   “엄마, 고마워요.”


   요즘은 장모님이 은지를 돌봐주고 계셔서 가희의 감정 표현이 훨씬 편하다.

    “이건, 명백한 남녀 불평등으로 인한 승진 차별이라고. 내가 출산휴가를 받아서 그런 거야. 나보다 능력도 없는 박 과장이 차장으로 승진했어. 내가 이럴까 봐 출산 휴가도 50일만 쓴 거잖아. 자기도 알지?”

   “알지. 그래도 어쩌겠어? 이의를 신청할 수도 없잖아. 다음엔 승진될 거야. 걱정 마.”

   “아, 진짜. 내가 출산만 안 했어도 이번엔 난데. 엄마, 엄마. 김치찌개 진짜 맛있어. 나는 이런 맛 안 나던데.”

장모님도 가희가 늦둥이라 연세가 많으시지만, 손녀를 많이 예뻐하셔서 잘 돌봐 주신다.

   “아이고, 저 놈에 욕심. 이 서방이 이해하게. 내 딸이 원래 자리 욕심이 많아서 학교 다닐 때부터 반장이든 부반장이든 하나는 꼭 하더라고.”

   “네네. 장모님. 저도 알죠. 하하.”

   “아이고 이제 은지 눕혀야겠어. 잠들었네. 아이고, 무릎이야.”

   “엄마, 괜찮아?”

   “안 그래도 요즘 부쩍 아프네. 내일은 토요일이라 너랑 이서방도 출근을 안 하니 병원에 예약해 뒀다. 병원 갔다가 네 아버지 반찬도 좀 챙겨서 집에 다녀와야겠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다 늙어서 부부간 생이별이다. 젊었을 때도 안 하던 주말부부를 이 나이에 하는구나. 은지 조금만 더 크면 어린이집에 맡겨. 이 늙은 엄마 잡지 말고.”

   “네네. 조금만 더 크면 꼭 맡길게요. 엄마, 지금은 너무 어리잖아. 돌은 지나고 맡기려고요.”

   “장모님, 죄송합니다.”

   “그래, 나 먼저 은지랑 자네.”


   유모차에 은지를 태워 가까운 공원을 산책한다. 도란도란 가희랑 얘기를 하며 공원 주변을 뛰어다니는 작은 꼬맹이들을 본다.

   ‘은지도 크면 저 꼬마 아이처럼 뛰어다니겠지? 나도 저 아빠들처럼 아이를 목마를 태워 걸어 다니겠지?’

나는 즐거운 상상 속 미래에 가 있다.

   “자기, 뭐 마실 거야?”

   “시원한 걸로 아무거나.”

   “캐러멜 마키아또로 주문했어. 자 받아. 달달하니 맛있어. 잠깐 폰에서 진동 오네. 아빠잖아? 여보세요. 아빠? 무슨 일 있으세요?”

   “아이고, 가희야 어쩌니, 엄마가 병원에서 나오다가 오토바이랑 부딪쳐서 다리랑 팔을 다쳤어. 허리도 아프다 하고. 지금 네 엄마랑 병원에 있다.”

   “네? 어머, 어떡해요? 엄마는 많이 다치셨어요? 뺑소니는 아니고요?”

   “응, 보험회사 직원도 여기 나와 있다.”

   “제가 당장 그리로 갈게요. 네. 네. 알아요. 그 병원.”

   “어떡해. 자기야, 빨리 가자. 엄마가 병원 나오는 길에 오토바이랑 교통사고 났데.”

   “뭐? 큰일이네. 장모님, 많이 안 다치셨고?”

   “몰라, 작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아. 아무튼 세종병원으로 빨리 가자.”

장모님은 다리와 팔에 깁스를 하셨고, 허리도 요통이 심해서 많이 힘들어하신다. 은지가 걱정이라는 장모님의 말씀에 아니라며, 어머님 몸이 더 중요하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인사하며 병실을 나선다. 가희와 나는 머리가 멍해진다. 나는 내일 중요한 미팅 있어서 결근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가희가 담당 부장님께 말씀드리고 월차를 내기로 한다. 내일 은지랑 있으면서 은지를 맡길 수 있는 베이비시터나 영 유아 어린이집을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여보세요. 부장님. 김가희 과장입니다. 죄송해요. 휴일에 쉬시는데. 통화 가능 하세요?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나셔서 갑자기 제가 내일 휴가원을 신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요. 죄송해요. 내일 하루만 휴가를 쓰고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가희야, 부장님이 뭐라고 하셔? 된데?”

   “알았다고 하셨지만, 목소리가 별루야. 하긴 누가 이런 상황을 좋아하겠어?”

가희는 부하직원에게 휴가계를 부탁하고 몇몇 중요한 지시 사항을 전달한다.

   “가희야, 좋은 베이비시터를 구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은지 하나 봐줄 사람이 없겠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나는 불안 해 하는 가희를 진정시킨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걱정이 되긴 마찬가지다.


   오늘따라 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고 회의도 너무 길어진다. 회사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가희에서 전활 한다.

   “가희야, 베이비시터는 구했어? 믿을만한 사람이야?”

   “시터 못 구했어. 입주 베이비시터는 제공 인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최소 1~2주 전에 신청해야 한데. 내일 당장 어린이집에 입소할 수도 없데. 영 유아 어린이집도 신청하고 기다려한데. 어떡해? 아, 진짜. 미치겠어. 나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하냐고?”

   “내가 회사에 말해 볼게. 오늘 늦게 까지 야근해서 어떻게든 마무리한다고 하고 방법을 찾아볼게. 알아보고 다시 연락할게. 걱정 마.”

가희랑 통화는 그렇게 했지만, 내일은 거물급 클라이언트(광고주)와 미팅이 잡혀 있고, 워낙 큰 광고라 놓치면 인사고과에 치명적이다. 상무이사님까지 신경을 쓰시는 사안이라 휴가는 말도 못 꺼내는 상황이다. 나는 몇 시간 후 가희에게 톡을 보낸다.

   “가희야, 미안해.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부장님이 사표 쓰고 결근하래. 낼 중요한 클라이언트 미팅이거든. 가희가 회사에 한 번 더 부탁해 줄 순 없을까? 그리고 오늘 야근도 해야 해서 집에 빨리 들어갈 수 없겠어. 일이 자꾸 꼬이네.”

지금 가희와 직접적인 통화는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에게 어떤 원망과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비겁하지만, 결국엔 마지막까지 가정을 책임지게 되는 건 남자인 내가 될 테니 이런 상황에 결근은 어리석다. 짬짬이 휴대폰을 확인해도 답 메시지가 없다. 읽긴 읽었는데…. 안 봐도 뻔하다. 불같이 화가 나 있겠지. 야근 때문에 팀원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가희에게 메시지가 온다. 아, 진짜 열어보기가 힘겹다.

   “알았어. 부장님께 말씀드렸고, 나 대신 박 차장이랑 우리 팀 차석이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어. 이런 식으로 나는 조직에서 망해가는 거야. 자기가 원망스러워.”

뜨아악, 가희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다. 차라리 잠 못 자는 철야 야근이 나을 것 같다. 씻고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회사에 출근해야 하니 새벽에 집에 잠깐 들렀다. 내 집인데 도둑처럼 심장이 벌렁거린다. 난 단지 열심히 일하고 온 가장일 뿐인데, 무슨 죄인 같다. 거실에서 조용히 잠깐 자다 가야겠다.

   “우우웅”

진동으로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깨어 출근할 준비를 한다. 물이라도 한 컵 마시고 출근하려고 냉장고로 갔더니, 샌드위치가 식탁 위에 놓여 있다. 가희가 소파에서 자고 있는 나를 봤나 보다.

   ‘가희야, 미안해. 다 우리 가족을 위한 길이야.’

눈치 없는 혀는 샌드위치가 맛있다. 허전한 위장도 샌드위치가 많이 반갑다.

가희의 응원으로 나는 성공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광고를 따냈다. 부장님의 따뜻한 눈길이 양털 이불이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고, 늦은 야근으로 피곤할 테니 팀원 전원에게 조기 퇴근이 내려진다. 부장님께 집 사정을 얘기하고 휴가를 신청한다. 지은 죄가 있어, 집에 가기 싫지만,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집으로 출발. 내일은 내가 은지를 돌볼 수 있다는 무기를 하나 옆구리에 차고 집으로 향한다.


   “가희야, 나 왔어. 일이 잘 끝나서 조금 빨리 퇴근했어. 내일 휴가도 받아왔어. 내일은 내가 은지 볼게.”

젖병과 기저귀를 든 가희가 보인다. 싸늘하다.

   “미안해. 샌드위치 고마워. 그래도 나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왔어.”

가희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본다. 저런 눈빛 너무 무섭다. 나는 눈을 밑으로 내린다.

   “자기야, 나도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싶어. 나도 그러고 싶다고. 나 육아휴직 권유받았어. 명퇴 권유와 뭐가 다를까? 우리 회사에 유일하게 남은 과장급 여직원이 나야. 나는 전설이 되고 싶어. 나 왠지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아. 이러다 이름 없는 엑스트라로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자리를 피해 욕실로 향한다. 샤워 후 은지를 보러 아기 방에 들어가려고 하자 가희가 막아선다.

   “금방 겨우 재웠어. 나도 좀 쉬자. 나중에 일어나면 안아주고 분유도 먹여.”

   “응, 살짝 얼굴만 볼게.”

   “가희야, 자기 오늘 힘들었는데, 저녁은 맛있는 걸로 시켜서 먹자. 뭐 먹을래?”

   “아무거나. 이 상황에 뭔들 맛이 있겠니?”

잠시 후 배달된 보쌈 정식을 먹으며 가희의 표정을 살핀다.

   “콜라에 얼음 넣어 줄까? 육아 휴직 신청 할 거야?”

   “자기, 미쳤어? 그럼 사직서 내는 거잖아? 나는 절대 회사 그만두지 않을 거야?”

   “그럼 은지는 어쩌려고?”

   “그래서 말인데, 그렇게 예뻐하는 은지 자기가 회사 데리고 출근할래?”

   “….”

너무 당황스럽다. 마시던 물에 사리가 들려 기침이 멈추질 않는다.

   “내 참. 우선 월차 연차 남은 거 다 써서 10일 정도 휴가 쓰려고. 오늘 입주 베이비시터 신청 했으니까 출근 전까지 구해질 거야. 대부분 일주일이면 배정된다니까 기다려 보자. 사설 기관에도 신청해 놨어. 부장님도 우리 입장 이해한다고 하시더라고. 구두 결재는 났고, 서류 신청은 출근해서 해야지. 낼 출근해서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해. 내일은 퇴근이 많이 늦을 거야.”

   “잘 됐네. 미안하고 고마워.”

   “민우야, 나한테 많이 고맙지? 나 독박 육아 같은 기분이 들어.”

   “아냐, 아냐, 나 열심히 도울게.”

   “자기야, 왜 돕는다고 얘기하는 거야? 같이 한다고 해야지. 육아든 집안일이든 같이 해야 하는 거지. 자기가 날 돕는다는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이건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나에게 베푸는 선행도 아니잖아. 육아와 집안일은 결혼생활의 일부야.”

   “어? 그래. 그렇지.”

이렇게 한 고비를 넘기며 하루가 간다. 작은 콧등에 송알송알 땀까지 맺혀 가며 젖병을 열심히 빠는 은지를 보니 인간은 뭐든 어릴 때부터 열심히 하는 게 운명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도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젖병을 붙잡고 있다. 둘째는 포기다. 하나도 너무 힘들다. 진짜로.


   가희 말대로 일주일 후 은지를 맡아 주실 분이 배정되어 간단한 서류 확인을 거쳐 계약서는 상호 협의하여 작성하기로 했다. 신생아 경험이 많으시고 집에 CCTV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하셔서 신뢰감이 생긴다. 가희는 베이비시터 신청과 함께 아기 방과 거실에 CCTV를 설치했다. 아무래도 남이니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은지와 적응기간에 별다른 문제가 발생되지 않아 가희도 휴가를 더 연장하지 않고 출근이 가능하다. 가희의 출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안정화되어 가니 가희를 대하기가 한결 편하다.

   “이모님, 우리 은지 잘 부탁드려요. 은지야, 엄마 다녀올게. 자기야, 나중에 봐. 나 먼저 출근해.”

   “응, 나중에 봐. 이모님, 오늘 수고 많으시겠어요. 잘 부탁드려요.”

   “네, 걱정 마세요. 은지야, 엄마 아빠 가시네. 아이고, 예뻐라. 아기가 너무 순하네요. 방긋방긋 잘 웃기도 하고요.”

   “네, 감사합니다. 은지야, 아빠 갔다 올게.”

어머님이나 장모님과 은지를 두고 출근할 때 보다 마음이 무겁다. 달리는 차에 창문을 활짝 내린다. 룸미러에 걸어둔 가족사진이  세찬 바람에 흔들린다.


   노란 은행잎이 까만 아스팔트 위를 이지 저리 옮겨 다니는 가을이다. 이모님과의 시간이 쌓여가는 동안 은지도 생후 6개월이 되어 뒤집기가 가능할 만큼 자랐다. 흔들흔들하며 엎드려, 나와  눈을  맞추며 작고 빨간 입술로 환하게 웃기라도 하면 나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행복하다.  예쁘다. 사랑스럽다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모자란 내  딸 은지. 그 작은 손을 내 입에 넣고 앙앙하고 소리를 내면 은지는 까르르 하며 웃는다.

  “이모님, 은지가 왼쪽 오른쪽 너무 잘 뒤집네요. 책에서 보니 질식 위험도 있다고 해서 신경이 많이 쓰여요.”

가희가 과일을 챙기며 말한다.

   “아이고, 잘 보면 되지. 자주자주 아기를 봐야지. 이제 시작이지. 좀 이따 기어 다니면 진짜 정신없고 힘들지. 장난 아니랍니다. 호호.”

   “이모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우리 은지 어린이집 갈 때까지 쭉 부탁드려요. 섭섭한 거 있으시면 맘에 두지 마시고, 언제나 말씀하세요.”

가희의 말에 진심이 담긴다.

   “네, 네. 우리 은지 예뻐서 이 할미가 그만둘 수가 있나? 아이고, 벌써 이유식 먹을 시간이네. 은지야, 오늘은 뭐 맛있는 거 먹을까?”

요즘 같아선 둘째도 키우겠다 싶은 맘이 들어 가희에게 잠깐 스치듯 물어보니 질색팔색이다. 무슨 벼락 받을 소리냐고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던지 그 뒤로는 다시 묻지 않는다.


   출근 후 집에 설치된 CCTV를 자주 챙겨 보지 않을 만큼 이모님은 은지를 진심으로 예뻐하신다. 처음엔 틈만 나면 봤었다. 뉴스에서 안 좋은 소식들이 보도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챙겨보게 되었지만, 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과장님, 여기 부탁하신 커피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오, 땡큐. 요즘은 커피를 마셔도 잠이 오네. 하하. 잠도 깰 겸  복도에서  마셔야겠네. 오늘은 머리가 멍하니 집중이 안 되네.”

   “앗, 뜨거."

   "어머, 과장님 죄송해요. 제가 결재서류를 마지막으로 잠깐 챙겨 보며 걷다가 과장님을 못 봤어요. 어떡해요. 이를 어쩌나. 화상 입으셨어요?”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재킷을 걸치고 있었더니 화상까진 아니야. 나도 잠이 와서 복도를 걸으며 잠깐 눈을 감았는데, 그때 하필이면 자네랑 부딪쳤네. 신경 쓰지 마. 가던 길 가. 걱정 마. 괜찮아.

   “그래도 옷이 엉망이네요. 어떡해요?”

   “아메리카노니까 세탁하면 다 없어질 거야.”

   “그럼, 제가 세탁비라도….”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게. 잠깐, 휴대폰 진동 온다. 전화 왔네. 어서 가봐.”

   '새 옷인데 오늘 왜 이러지? 아침에 오토바이랑도 사고 날 뻔했는데. 거참. 별일이네.' 

   “여보세요. 가희야 웬일로 모닝 전활 다 하고?”

   “자기야, 엉엉 어떡해. 우리 은지가 침대에서 떨어졌데. 엉엉.”

   “뭐? 어쩌다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 지금 외근 중이냐. 자기 조퇴 가능해? 이모님이 병원 데리고 가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 중 한 명은 가야지. 엉엉. 어떡해. 어떡해.”

   “알았어. 내가 갈게. 울지 말고. 다시 전화할게.”

오늘따라 도로에 차는 왜 이렇게 많은지. 맘은 급해 죽겠는데. 신호도 자주 빨간색에 걸려 주행이 쉽지 않다.

   ‘아, 진짜. 아침부터 재수가 없더니만.’

병원에서 CT검사를 해보니 이상이 없다고 해서 한 시름 놓긴 했지만, 완전히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이모님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보신 거예요?”

   “죄송해요. 침대 칸막이가 고정이 덜 되었나 봐요. 이유식 넘치는 소리가 들려서 맘이 급해서 그만…. 확인을 잘했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은지 뒤집기를 해서.”

   “지금 변명하시는 거예요. 아이가 자주 움직여서 잘 봐야 한다고 말씀하셔 놓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면 안 되죠. 은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 뻔하셨어요.”

   “자기야, 은지 이리 줘봐.”

외근을 대충 끝내고 가희가 불안한 마음에 병원으로 왔다. 가희는 이모님을 향해 불같이 화를 낸다.

   “이모님, 아이를 어떻게 보신 거예요? 저희가 얼마나 잘해 드렸는데, 감사하다고  우리  은지  잘  부탁드린다고  따로 보너스도 넉넉하게 챙겨 드렸고요. 무책임하게 이게 뭐예요? 정신이 있으세요? 없으세요?  우리  은지가 이모님  진짜 손녀였다면 이렇게 하셨을 까요?”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이모님은 허리 숙여 미안하다고 말씀하신다.

   “네. 네. 안 놀라게 생겼어요? 은지야, 엄마야 괜찮아? 엉엉 이제 괜찮아. 엄마야. 엄마야.”

오늘은 금요일이다. 이모님은 매주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셔서 우리 집엔 일요일 밤늦게 혹은 우리가 출근하기 전 월요일 아침 일찍 다시 출근하신다. 이런 분위기에 우리 집에서 같이 계신다면 서로가 힘든 일 일 텐데 다행히 금요일이라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분리된다. 오늘은 이모님이 평소 가실 때와는 다른  분위기로  헤어진다. 가희는 조심히 가시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은지를 재우고 가희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치킨에 맥주를 시켜 먹는다. 가끔 예고도 없는  상황에서 분노가 우리를 덮쳤을 때 겉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모습은 사회적 껍데기를 벗긴 ‘날 것의 내 모습’이다. 그런 ‘날 것의 내 모습이’ 현실화되었을 때 나타난 분노의 행위가 사방으로 뻗어 내 곁을 지나가면 남는 건 되돌릴 수 없는 실수들과 깊은 후회다.

    ‘좀 더 참아야 했었다고. 그럴 것까진 없었다고.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그 사람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하겠지. 누구나 실수는 해. 나도 그런 적 있었어.’

라는 한 발 늦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예의. 씁쓸한 후회가 맥주와 함께 목으로 넘어간다. 안주를  삼키며  떠오르는 화가 났던 상대와 함께한 좋은 추억도 머릿속에 스친다. 맥주는  입 속으로 차갑게 들어와  씁쓸한 맛으로 목을 넘어간다. 그렇게 가희와 나는 각자의 실수와 후회를 감당하며 무거운 금요일 밤을 보낸다.


   일요일 오후 김밥에 라면으로 아점을 먹고 있을 때, 베이비시터 사무실에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네 고객님. 사무실입니다. 금요일까지 담당해 주셨던 여사님이 어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셔서요. 급히 다른 분으로 재배치해 드린다고 연락드립니다.”

   “뭐라고요? 이렇게 갑자기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아기가 이제 낯가림도 해서 많이 울 텐데 일방적인 조치 아닌가요?”

나의 속마음 속  질문들을  직접적으로 물어볼 순 없다.

   ‘ 저기요, 거짓말 아닌가요? 이모님께서 화가 나셔서 우리 집에 안 오신다고 하신 거 아닌가요? 병원에 입원 진짜 하셨나요? 안 하셨죠? 거짓말하는 거 아닌가요?

하고 말이다.

   “아, 네. 아기가 힘들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어쩔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여사님께서 예전부터 두통을 간혹 말씀하셨는데, 어제 갑자기 너무 아프셔서 응급실로 가셨데요. 검사결과 뇌혈관이 부어 있으셔서 입원 검사 후 시술하셔야 하고 10일 정도 입원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몇 시간 후 새로운 베이비시터분이 오시고, 우린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을 받아 드린다. 새로 오신 분은 그만두신 이모님 보다 훨씬 젊으시고 이제 50세이신 분이다. CCTV가 있다는 사실에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미 설치된 상황이었고, 앞에 계신 던 분도 별 불편함 없이 근무해 주셨다며 설득한다. 은지는 예상대로 낯설어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다. 가희와 여러 가지 사항을 의논하며 새로 오신 시터분은 은지와 적응시간을 가진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마음이 가볍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예전 이모님처럼 아기를 안아 우리 부부를 배웅하는 모습 없다.  이번 이모님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시는 분이다. 개인적인 친분은 그분의 관심사가 아닌듯해 보였고, 공과 사를 깔끔히 구분하는 직장인 여성의 분위기가 풍긴다.

지난 이모님께서 병원에 계신다는데,

   ‘이모님께 전화라도 한 통 드려볼까? 하지 말까? 괜히 아침부터 싫은 소리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 나쁜데.’

하는 생각을 하며 운전을 한다. 또다시 갑갑증이 몰려와 창문을 연다. 룸미러에 걸어둔 가족사진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꼭 내 마음같이 흔들흔들 갈팡질팡이다. 이젠 제법 바람이 차다. 추위에 어깨가 떨려 창문을 올린다.

   ‘벌써 겨울이구나!’


    코로나가 온 세상 뉴스에 가득하다. 다른 나라 감기 인원수까지 체크해 가며 뉴스를 보기는 태어나 처음이다. 누구의 실수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정확하고 투명한 원인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치료실이 부족하고 약이 부족하고 생필품이 배달되고 어디에선 누군가가 죽어가고 사람이 사는 모든 국가가 코로나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은지의 옷을 개비던 이모님께 전화가 온다.

   “보건소라고요? 어머, 진짜요? 아, 네 알겠습니다.”

퇴근 후, 저녁밥을 먹으며 무심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나는 보건소라는 말에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텔레비전을 끊다. 이모님은 은지 방으로 이동하셔서 갑자기 마스크를 하시고 가방을 가지고 나오신다.

   “은지 아빠”

 이모님은 내게 다가오지 않으시고 멀리 떨어져 조용히 말씀하신다.

   “저, 제가 얼마 전에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었는데, 친구가 코로나 확진자라고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어요. 죄송해요. 저도 내일 보건소로 가서 검사받아 보라고 연락이 왔네요. 집에 가서 결과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제가 출근했을 때 은지는 자고 있어서 아직 은지를 한 번도 안지 않았고요. 제가 개비고 있던 옷만 다시 세탁하시면 되겠어요. 이만 갈게요. 오래 머무는 것이 오히려 폐 끼치는 일이겠어요. 계세요.”

문이 닫힌다. 나는 기가 막힌다.

   "도대체 친구랑은 왜 밥을 드셨어요? 당신 직업이 베이비시터면서 그것도 생후 1년도 안된 아기를 돌보는 일인데, 이런 시국에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사람이 너무 책임감 없는 거 아니에요?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만든 거 에요?"

들어줄  상대가 없는 혼자만의  독백.  막말을 써가며 허공에 대고 혼자 주절주절  말을  해 댔다. 가버리고 없는 이모님을 향한 분노를 마구 쏟아내고  있는데, 집 앞 마트에 다녀온  가희가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상황을 알린다. 가희의 긴 분노가 시작된다. 엄청나다.

  “그러면 우리도 보건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우리 출근은?”

  “보건소는 무료니까 우리도 그냥 내일 검사받으러 가고, 아, 진짜 출근이 문제네. 회사에 말하고 검사 후 출근 한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일단 먹던 밥부터 먹고. 좀 더 생각해 볼게.”

그때 휴대폰에 회사전화가 뜬 메시지가 올라온다.  

   “제작 1 부서 1팀에서 코로나 확진자 발생. 제작 1부 1팀 모든 직원 보건소 검사 후 결과 통보 후 출근 요망.”

   “가희야, 우리 팀에서 확진자 나왔어. 진짜 난리다. 난 어차피 보건소 가야 해. 그런데 누가 확진이지?”

다행히 우리 가족은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모님은 확진되어 당분간 출근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다시 우리는 서로의 출근이 문제가 된다. 그 쯤 회사에선 자택 근무와 사무실 근무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여기저기서 확진자가 넘쳐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상황에서 은지를 맡아 줄 베이비시터를 구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희야, 우리 육아 휴직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자.”

   “안 그래도 나도 생각 중이었어. 난 이미 출산휴가를 섰고, 지금껏 난 우리 가정이나 은지에게 긴급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휴가도 짬짬이 신청하면서 가정에  급하게  일어난  문제들을 해결해  왔어. 그 결과 지금 회사에서 나의 위치가 많이 위축되어 있어. 이럴 때 육아휴직계 내면 나는 사직서 제출이나 같아. 이번엔 자기가 육아휴직을 신청했으면 좋겠어.”

   “가희야, 미안하지만, 난 안 돼. 우리 회사에서 육아 휴직을 낸 남자 직원은 거의 없고, 인사고과에 치명적이야. 휴가 후 돌아오면 책상이 빠진다고. 그리고 좀 있으면 나 차장 승진이야. 골든타임이라고. 지금 내가 육아휴직을 내는 건 말도 안 돼.”

   “그럼, 나는 말이 돼? 나도 육아 휴직 쓰면 승진 포기나 마찬가지야. 너도 알잖아. 나도 위기타임이라고. 이번엔 진짜 안 돼.”

가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눈에도 살짝 눈물이 보인다.

   “가희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너와 나 중에서 결국 직장생활을 오래 할 사람은 누구일 것 같니? 내 욕심이 아니야.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하는 생각이고, 판단이야. 우리나라 중역이나 임원 중 여자 비중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월급도 남자 직원에 비해 여직원이 작은 게 현실이야. 그리고 너도 알잖아. 위로 올라가려면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사내 인간관계도 중요해. 인간관계는 일만 잘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잖아. 학연, 지연, 스포츠 동호회 활동, 군대까지 포함된다고. 남자 상사들과 술도 먹어야 하고, 개인적인 교류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데 여자인 너에게는 갈수록 힘들어. 은지에게도 아빠보다는 엄마가 돌봐 주는 게 낫잖아.”

   “나는 능력으로 승부할 수 있어. 자기 같은 생각을 가진 남자들이 위에 고인 물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여자들의 사회생활이 힘든 거야. 지금 우리를 봐. 남편이라는 사람부터 자기 아내의 사회생활을 막고 있잖아.”

   “가희야, 나 같은 남자가 우리나라 남자의 보편적인 모습이야. 이런 남자들이 너의 직장상사고, 너의 거래처 사장이라고. 네가 혼자서 다 바로 잡으며 깃발 들고 나아 갈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바라는 대로 꿈꾸는 대로 공명정대한 인사관리가 된다고 착각하지 마. 현실을 제발 똑바로 봐.”

   “내가 뭘 봐야 하는데? 더럽게 부정부패한 직장? 무능력한 상사? 내 인생을 가로막는 남편? 너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랑 결혼한 거야. 그런데 너도 다른 남자들이랑 똑같아.”

   “그래서 너 우리 결혼을 후회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아? 가희야, 너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네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잖아. 나는 그때 한 가정을 책임질 무게감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나에게 그 짐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하겠다고 다짐했어. 너 상황이 네 맘대로 안 된다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남 탓만 할 거야? 가희야 너, 결혼이 장난인 줄 알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너의  욕심과 목표를  조금이라도 희생할 생각이 없구나.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전설이 되고 싶은 네 목표를 위해 우리 가족이 다 양보하고 희생해야 해?”

   “이민우. 너 어떻게 그런 말을 나한테 해?”

   “왜? 너는 막 말 해도 되고 나는 안 돼? 너를 위해 나는 진짜 많이 참았어. 도와주려고 애쓰고 애썼다고. 한 가정의 가장이 가족을 책임지며 직장생활을 더 잘하겠다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내가 널 막는다고? 내가 자기 아내를 괴롭히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해?”

   “….”

   “가희야, 너의 능력은 나도 알아. 그렇지만, 부조리함 속에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가 너를 굽히는 거라도 그게 패배는 아니야. 가희야, 현실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가  반듯이  해 내고야 말겠다는 모험심이 아직 어린 우리 은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어. 은지가 코로나라도 걸려봐. 우리에게 남는 게 도대체 뭐야? 가희야, 당장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잖아. 그다음은 휴가기간 동안 천천히 생각해 보자. 감정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

   “알았어. 알았다고. 억울해. 내가 여자인 게 내가 엄마라는 게 나의 약점이 되어버렸어. 나는 여자라서 불행한 적이 없었고, 예쁜 은지를 낳고 엄마라서 행복했는데, 나의 근원적인 모든 것들이 나의 약점이 되어 나를 끌고 가. 나를 마구 흔든다고. 벗어날 수가 없어. 포기할 수 없는 것들 중에서 내게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너무 힘들어.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강요당하는 이 상황을 견뎌내기가  너무 힘겨워.  나에겐 너무 가혹해.”

   “알아. 그래도 우리 가정을 위해 이게 지금으로선 최선일 거야.”


   이제 은지는 기고, 앉고, 걷는다. 아이의 커가는 모습은 직장 내 나의 성취와는 다른 만족감을 갖게 한다. 가희의 회사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경영에 어려움이 생겨 부서가 축소되거나, 합쳐지며 대규모 인사이동이 이루어지거나 직원들에게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가희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했을 땐, 가희가 근무하던 부서는 타 부서에 소속되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 있다. 같이 일하던 부원들도 명퇴하거나 가희처럼 가정 휴직을 신청하거나 타 부서에 근무하는 실정이다. 가희는 자신의 직장 내 위치와 영향력에  대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에 힘겨워하고 있다. 자신이 팀장으로서 불안한 그 시기에 육아 휴직을 신청하지 않고 회사에 계속 근무했더라면, 자신의 부서를 지켰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자신의 지난 선택이 후회스럽다고 자주 말 한다. 근무를 하고 있지만, 가희에게는 비중 있는 프로젝트가 주어지지 않고 있고, 사내에서 주목을 받거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잘 오지 않는다고 한다.

중간 간부 이상 참석하는 회의를 마치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가희에게 부재중 전화 한 통과 퇴근길에 맥주를 사 오라는 가희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민우야, 나 여기까진 가 봐.”

   “왜? 사무실 분위기가 더 안 좋아졌어?”

   “사무실 분위기는 예전부터 더 안 좋을 수 없을 만큼 안 좋았었고, 나보고 명퇴 신청하래.”

   “뭐? 갑자기? 그건 너무 하잖아."

   "나도 부장님께 그렇게 얘기했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어. 이해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고."   

   "가희야, 회사에 서운하겠지만, 내가 듣기엔 상황을 바꾸긴 힘들 것 같아. 너도 그동안 힘들었는데, 은지 좀 키워 놓고 다른 일 찾아보자. 나 사실 이제 막 돌 지난 은지를 어린이 집에 맡긴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어. 아직 코로나도 끝나지 않았고, 어린이집들도 뉴스 보니 휴원하는 곳도 많데. 확진자도 계속 나도고 있고, 학교도 아직 정상 등교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삶은 늘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진짜 내 예상보다 일찍 사직서를 내네. 이렇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나는 머리카락이 하얀색이 되었을 때 박수받으며 회사에서 퇴직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건 너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또 뭐가 더 있나 싶기도 해. 회사에서 버틴다고 이겨 낼 수도 없을 것 같아. 퇴직의 시간만 잠깐 늘리는 거겠지.”

   “은지 잘 키우면 되지. 난 우리 은지 커가는 거 보면, 내가 세상의 귀한 보석 하나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이 된 듯 뿌듯해. 너도 그동안 애 많이 섰어. 은지 좀 키워놓고 다른 일 찾아보자.”

나는 가희의 손을 힘주어 꼭 잡는다.


   가희는 집안일과 은지를 키우는 일을 업무처럼 완벽하게 하려고 한다. 점점 까다로워지고 작은 일에 초초해하며, 걱정이 많다.

   “자기야, 설거지한 게 이게 뭐야? 기름기가 다 안 지워졌잖아. 이렇게 성의 없이 할 거라면 하지 마.”

가희는 내가 해 놓은 설거지들을 다시 설거지 통으로 담아 놓으며 직접 다시 씻는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이리 줘. 다시 내가 할게.”

   “됐어. 은지나 보고 있어.”

가희는 내가 해 놓은 집안일에 불만이 많다. 내 딴에는 한다고 하는데도 가희의 기준에선 항상 십 프로 부족하다.

   “매일매일 밥을 정성 들려하면 은지와 자기는 맛있게 먹고 똥으로 싸버려. 내가 한 모든 것이 결국엔 똥이 되어 변기 속에 사라져. 내가 한 것들은 매일매일 사라지고 내가 무엇을 얼마큼 이루었는지 성과를 남기거나 남에게 나의 성취를 보일 수도 없지. 나의 성장을 측정할 아무런 기준선이 없어. 나의 모든 희생과 정성으로 키우는 은지도 내 마음같이 커 주지 않고, 늘 부족한 아이로만 성장하는 것 같아. 도대체 나는 매일 뭘 하는지 모르겠어.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잖아. 나는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고, 그런 걸 할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모든 기회를 잃어버렸고 이젠 기회가 오지도 않아.”

가희의 푸념에 내가 할 수는 대답은 없다. 단지 누구나 그러고 사는 것을 왜 저렇게 힘들어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퇴근 후 듣는 가희의 반복된 넋두리에 나까지 지쳐 간다. 결혼 전 회사에서 기 빨리는 갑갑함을 퇴근 후 가희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느낀다. 가족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어 다음 날 출근 하고 싶은 나의 욕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을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가희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과의 교제도 점점 힘들고 유대가 멀어지면서, 가희는 갈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밤에 잠도 푹 자는 것 같지 않다. 가희의 날카로움은 점점 심해지고 나를 자주 신경질적으로 자극했다.

   “가희야, 모두가 그렇게 살아. 살아간다고. 삶에 뭐 특별한 영광 같은 게 있는 줄 알아?”

   “자기가 특별할 수 있는 내 인생에 브레이크를 건 거야. 내가 그때 육아 휴직만 내지 않았더라도 내가 집에서 이러고 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제발 그 얘기 그만해. 가희가 양보해 준거 알아. 그것도 고맙다고 내가 반복해서 얼마나 얘기했니?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고 너도 인정했잖아?”

   “난, 멋지게 살고 싶었어. 이건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야. 아니라고.”

가희는 자주 울었다. 나는 미안하면서도 그런 가희의 모습에 화가 난다. 내가 주말에 모임이 있어 외출하게 되면 일주일 내내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는 자신은 생각해 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며 울고 화를 낸다. 어쩔 수 없는 모임이라 참석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해도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예전에 신입사원이 자기한테 늦게 택시 타는 게 무섭다고 해서 데려다 준거 기억나?”

   “그런 일이 있었어? 기억 안 나는 데?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얘기가 왜 나와?”

   “내가 그때만큼 슬프다는 얘기잖아. 내가 그렇게 힘들어했던 일을 자긴 잊었단 말이야. 내가 그날 얼마나 울었는데. 그 걸 잊었다고? 자긴 늘 그런 식이야. 내 아픔과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잊고 늘 반복해.”

   “그러니까 내가 뭘 잘 못 한 거냐고? 나도 잊은 그 일이 지금 내가 모임에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너의 대화법은 이해하기가 힘들어. 맥락 적으로 안 맞잖아. 뭐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 말을 좀 알아듣게 해 봐.”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방향으로 흐른다. 말다툼을 하다 보면 도대체 가희가 뭘 얘기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가희는 점점 아침에 일어나길 힘들어하고, 매사에 의욕이 없고, 식욕도 떨어져 야위어 간다. 한 곳만 멍하니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희가 혹시나 우울증에 걸렸나 하는 걱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정신과 상담을 신청하고 가희에게 같이 방문해 보자고 여러 번 권유했고, 생각보다 쉽게 가희의 승낙을 받아 오늘 같이 병원에 방문하기로 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저의 아내가.”

   “잠깐만요.”

원장님은 손을 들고 나의 말을 제지한다.   

   “아내 분께 직접 듣고 싶은데요. 환자분, 요즘 어디가 불편하세요?”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요즘 잠들기가 많이 힘들고, 의욕이 없고, 우울감이 있어요.”

   “집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없어요. 그냥 남편이 원망스러워요. 그리고 저의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보잘것없다고 느껴져요.”

   “남편 분은 지금 부인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내가 힘들다는 것 저도 압니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둔 뒤로 점점 생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내의 직장생활을 위해 사직서를 낼 순 없잖아요. 아내가 사직서를 내게 된 건 그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날 이후 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모든 게 제 잘못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원장님은 메모 도중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지금 남편분의 반응은 굉장히 특이하고 흥미롭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남편 분들의 반응은 대체로 분노나 억울함, 당당함으로 표현됩니다. 내가 돈을 안 벌어주느냐? 내가 뭘 잘못했느냐? 내가 바람을 폈냐? 집에서 편하게 애만 보면 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등 대다수 남편 분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얘기하지요. 표면상으론 환자분의 가정환경엔 문제가 없고, 남편분의 뚜렷한 잘 못도 없으시거 든요. 오히려 굉장히 모범적인 남성상입니다. 그런데, 가희 씨의 남편 분은 순순히 백 퍼센트 자신의 잘 못이라고 순응하시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뭔가 부인에게 말하지 못한 잘 못이라도 있으신가요? 혹시 아내 몰래 외도하셨나요?”

   “네? 외도 라니요? 세상에 그런 건, 절대 한 번도 생각 적도 한 적도 없습니다. 맹세해요. 단지….”

   “편히 말씀하세요. 상담하실 때 숨기거나 거짓말하시면, 아내분께 적절한 치료가 어렵습니다.”

   “네, 사실은 ….”

갑자기 목이 마른다.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일을 이렇게 이런 장소에서 느닷없이 얘기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해 봤다. 곁눈질로 가희를 힐끔 쳐다보니, 의심스럽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다. 환장할 노릇이다. 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여기서 말을 하지 않고 집에 가더라도 가희가 끈질기게 물어볼 것이다. 나는 울고 싶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표현이 이런 상황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에라 모르겠다.’

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 그냥 만우절 장난 같은 심정이었을 뿐이었다.

   “전 결혼 전에 몇 번 아내에게 말했었죠. 결혼 후 딸을 갖고 싶다고요. 그러나 늘 가희는 아이는 계획에 없다며 웃고 넘어갔어요. 우리 둘은 그 문제로 심각하게 대화한 적이 없었어요. 저는 결혼하면 출산은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고, 아내도 말은 저렇게 해도 막상 아기를 가지면 행복 해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과장으로 승진 한 날이었어요. 우린 기분이 들떠있었고, 둘 다 와인을 평소보다 좀 많이 마셔 분위기도 좋았어요. 아내가 샤워하고 있을 때 준비한 콘돔에 구멍을 냈어요. 피임약도 숨기고요. 한 번 이런다고,

    ‘설마 임신이 되겠어.’

라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고요. 그냥 장난기가 발동되어 학창 시절 만우절에 장난치듯 가볍게 한 행동이었지요. 그런데 아내가 정말 임신이 된 거예요. 처음엔 저도 놀랐어요.

   ‘뭐야, 이렇게 한 번에 된다고? 이건 우리 부부에게 운명의 아기야. 틀림없어.’

라고 생각 했지요. 아내가 입덧을 힘겨워할 때도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회개하는 마음으로 회사에서 진짜 열심히 일했어요. 내가 능력 있는 남편과 아빠가 되어 아내와 딸을 절대 고생시키지 않는다면, 모든 게 다 용서되고 괜찮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결과가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집안일도 최대한 돕고, 능력 있고, 충실한 가장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사실 사회적으로도 지금의 저는 그런 모범적인 가장의 기준에 많이 모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근무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갑자기 가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떳떳하게 나에게 할 수 있어? 결국 민우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네가 내 인생을 망친 거라고.”

가희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울면서 진료실을 나가버린다. 원장님은 메모를 그만두고 의자에 몸을 기대어 나를 쳐다본다. 나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급하게 인사만 꾸벅하고 진료실을 나온다. 병원 밖으로 나와 가희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 진동이 느껴진다.

   “나, 엄마 집으로 갈게. 은지는 내가 데리고 갈게.”

뭔가 큰 실수 한 것 같다.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고, 여길 예약하지 말았어야 했다.  

   ‘줸장, 내가 괜한 바보짓을 했구나.’

집에 도착해 보니 은지도 가희도 없다. 내가 끝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나의 보물을 누군가가 훔쳐간 듯 갑자기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며칠 후, 이혼 서류가 등기우편으로 배달되어 왔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이럴 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혼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에 화가 불쑥불쑥 난다. 이혼에 절대 합의할 순 없다.

   ‘가희와 나는 각자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혼소송이 진행되겠지.’

그날 나는 그냥 술에 취해 한 가벼운 장난이었다. 나도 일이 그렇게 될 진 몰랐다. 앞으로 벌어질 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점집에 가서 무당 앞에 다소곳이 앉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가희가 임신한 후로 산모와 아기를 위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될지 몰랐다. 그것도 이러한 이유로 다시 피우게 될지는 상상도 못 했다. 시작은 가벼운 장난 같았고,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장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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