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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갖는 진정한 힘

내전, 대중, 혐오, 법치 -피에르 다르도-

by 폴리래티스


독서조각


1974년 스톡홀름의 한 겨울날, 노벨 경제학상 시상식이 열린 웅장한 홀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군나르 뮈르달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두 명의 수상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각각의 배우자, 알바 뮈르달과 헬렌 하이에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두 부부는 마치 두 개의 상반된 세계를 대변하는 듯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회자는 두 경제학자의 업적을 소개했다.


"군나르 뮈르달 박사는 불평등과 사회적 정의 문제를 다루며,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한 업적으로 유명합니다. 반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박사는 시장의 자율성과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며 계획 경제의 위험성을 설파했습니다."


칵테일 리셉션에서 우연히 두 부부가 같은 테이블에 서게 되자, 묵혀 둔 긴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알바 뮈르달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며 하이에크 부부를 향해 말했다.


"오늘의 상은 단지 학문적 성취를 넘어선, 더 큰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이에크 박사님의 이론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엇을 제안하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하이에크는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도움은 정부의 손길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어설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지나친 개입은 자유를 억압하고, 장기적으로 더 큰 불평등을 초래할 뿐입니다."


군나르 뮈르달이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하지만, 자유는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최소한의 안정과 기회가 제공될 때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말다툼은 점차 격해졌고, 주변 사람들은 어느새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알바 뮈르달은 한 발 더 나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이에크 박사님, 제가 당신이 쓴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언급을 읽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독재 정권을 옹호할 수 있습니까? 피노체트 아래에서 수천 명이 학살당하고 고문받았는데, 당신은 그것이 경제적 자유를 위한 대가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이에크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알바 여사, 저는 독재를 옹호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시장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안정성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두 경제학자의 사상은 서로 상반된다. 노벨상위원회가 밝힌 두 사람의 수상 이유는 “화폐와 경기변동 이론의 개척, 그리고 경제와 사회 및 제도적 현상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다.


두 경제학자는 경제학 이론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치와 사회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경제학이란 경제만 따로 두고 논해서는 안 되며 정치화 사회를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념과 사상이 판이하게 달랐다.


군나르 뮈르달은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이런 사회 경제적 문제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은 자체적으로 꾸준하게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꼭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부의 집중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 보건, 고용과 같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아내 알바 뮈르달과 북유럽 복지 정책의 기반을 만들었고, 그의 아내 알바 뮈르달은 198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둘의 노력으로 스웨덴은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복지국가가 됐다. 하지만 스웨덴은 글로벌 경제위기와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스웨덴에서 장기로 집권하던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은 2022년 정권을 우파 성향의 우파 정당 연합에 내어줬고, 제2 야당은 극우 정당이 차지했다.


과도한 복지정책 반대와 반 이민정책의 반대 심리가 작용한 결과다.


프리드리 하이에크는 정부의 규제를 줄이고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학파였다.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자유를 억압할 수 있지만 반대로 자유를 촉진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고전 자유주의로부터 나와 발전했다.


고전 자유주의가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면서 큰 정부를 주장하는 케인즈학파에 밀려나게 됐고, 신자유주의 학파는 케인즈학파에 반대하면서 일어났다.


신자유주의자는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공산주의와 같은 것들로부터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한정부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신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재산의 보호다.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부가 필요했다. 즉 시장경제 자유를 위해서는 보다 강한 정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칠레의 피노체트, 영국의 마가렛 대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하이에크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경제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물을 얻어냈다.


칠레에서 쿠데타로 부임한 아우구스트 피노체트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자유경제를 보호하기위해 강력한 정부를 표방했고, 국민들을 억압했다. 그의 정권하에서 사망 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3200여명으로 추정되며(레티그 위원회 조사) 3만명 이상이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벌어진 비인간적인 행위는 수많은 비난을 받았고, 1988년 국민투표에서 패해 정권을 이양했다.


그는 이후 1998년 스페인에서 재임기간 동안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되었고 칠레로 송환되었다. 그는 반정부인사 살인과 고문, 실종, 불법자금 등의 사유로 재판을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형사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6년 피노체트는 사망했다. 칠레는 피노체트의 재임기간을 두고 많은 의견이 엇갈린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살인자, 독재자, 학살자로 부르지만 일부는 칠레 경제를 현대화하고 타 남미 국가와는 다르게 꽤 괜찮은 경제를 유지하는 것을 그의 공으로 돌렸다.



어느 기갑 부대 대령이 쿠데타를 기도하고, 한 카메라맨이 죽어 가면서 자신의 죽음을 촬영하고, 아옌데의 해군 보좌관이 암살되고, 소요가 일어나고, 험악한 말이 난무하고, 온 칠레 국민이 저주를 퍼붓고 벽에 이념적 그림을 그리고,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아옌데를 지지하는 대행진을 벌였다. 그 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모네다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폭격이 그치자 대통령이 자살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

-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이는 제국주의 전략의 승리로서, 지난 천일 동안 이루어낸 갖가지 사회적 진보를 그 이전으로 돌려놓았을 뿐 아니라, 칠레를 미증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실험하는 실험실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남쪽의 작은 나라는 '시카고 보이즈'의 지도 아래 몇 지 실험들을 진행했다. 1973년 9월 11일부터 이어진 17년의 독재 기간은 토마스 물리안과 마누엘 가라테가 '자본주의 혁명'이라고 명명한 시기로, 사회가 군사정권에 의해 개조되었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반혁명이었다.

프랑크 고디쇼. 「칠레 1970~1973(chill 1970~1973)


하이에크는 훗날 다음과같이 말했다.


“주지하다시피, 독재자가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의 완전한 부재 속에서 통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자유주의를 결여한 민주 정부보다 자유주의적 독재를 선호합니다.”


하이에크는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을 옹호했다는 비난을 받지만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은 지금까지도 많은 국가에게 수용되고 있다.




투자조각


어떤 사람이나 선호하는 정치성향, 사상, 이념, 경제, 사회 문화적인 관습이 있다. 하다못해 두사람이 식당에 가도 서로 다른 메뉴를 주문하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똑 같은 것을 선호할 수 있겠는가?


현대 경제학은 케인즈학파와 시카고학파(신자유주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구분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나뉘기에 이것을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 많은 것을 걸고 싸울 수 없다.


나도 선호하는 정치성향과 이념이 있다. 하지만 나는 투자자로써 선호와 이익을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한다.


어떤 시대에 어떤 사상과 이념이 필요한지는 닥쳐봐야 아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에서 살면서 과거를 들여다보며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후확신편향에 빠져 있는 것 뿐이다.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말하지만 세상에는 중요한 규칙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열역학 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다. 세상 모든 것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른다.


내가 어떤 정치사상과 이념을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이 천년 만년 이어졌을 때 나한테 이득이라고 여기는 것은 선호와 이익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조금 무거운 주제이지만 정치와 경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실 경제학의 태동은 재정 경제학이었다. 국가의 경제 정책을 고안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학문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국가의 부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이고, 동시대의 다른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홀,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경제학과 정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앞서 살펴본 두 경제학자의 주요 사상에는 큰 정부와 작은 정부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단어를 오해해 다른 뜻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큰 정부는 강한 정부이고, 작은 정부는 약한 정부라고 생각하는 오판이다.


하이에크가 주장한 신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작은 정부다. 정부는 자유시장경제에서 적은 영향만을 끼쳐야 한다. 다만 자유시장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룰이다. 규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말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 경제이기 때문에 누군가 반칙을 한다면 정당한 거래를 할 수 없다.


축구로 예를 들어보자면 22명의 선수들이 자유롭게 축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축구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반칙이 난무하고, 힘이 쌘 선수들이 약한 선수들을 상대로 정당한 시합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심판이 필요하다. 가끔 심판이 경기를 지배하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심판은 경기에 영향을 적게 미치면서 공정한 경기가 치러지게 해야 한다.


작은 정부도 마찬가지다. 자유시장경제에서 누구도 반칙 하지 않고 정당한 거래가 이뤄지게 만들어줘야 한다. 자유시장이라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신용이란 거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잠재워 준다. 만약 내가 가진 재산을 보호받지 못한다면 누가 자유로운 거래를 하겠는가?


국가는 사유재산을 철저하게 보호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자유를 억압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란 시장경제를 뜻하지 사회문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강한정부가 필요하고, 신자유주의 경제를 위해서는 어느정도 개인의 자유가 침해 받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을 어느정도 인정한다. 선부론과 똑같이 닮아 있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궤를 같이한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하이에크에게 경제적 조언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내세운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이다. 검은 고양이 하얀 고양이 가리지 않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의미인 흑묘백묘론은 중국의 개방정책을 의미했다. 즉 공산주의 사회주의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지독하게 싫어했던 하이에크의 조언을 받은 덩샤오핑은 선부론을 내세웠다.


평등주의적 경제 정책과 중앙 집권적 계획경제 체제하에서 경제발전은 더디고 성장을 저해한다고 생각한 그는 집단농장부터 없앴다. 생산량을 동일하게 할당 받는 집단농장의 생산성은 낮다. 하지만 집단농장을 해체하고 개인이 수확한 것은 개인이 갖게 되자 생산량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그럼 군나르 뮈르달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은 장기적을 실패인 것일까? 현재 중국이나 한국은 성장이 멈췄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뒤를 돌아보니 경제 양극화가 심하게 기운 상태였다. 가난한 시절 사람들이 정부의 선부론을 따른 것은 정부의 강한 힘이기도 했지만 내가 희생함으로써 자식들 세대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경제성장은 많은 국민들이 더 이상 가난하지 않고, 굶지 않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양극화는 그대로였다. 내 자식만큼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지만 가나는 대물림 되고 있다. 가난이 대물림 된다는 사실을 안 현 시대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자식을 위한 나의 희생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국가가 선부론을 경제정책으로 삼을 때 국민들은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애국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그 보상을 물려주고자 했음이다. 하지만 가난이 대물림 되고 양극화는 더 심해지는 이 시점에서 정부가 다시 낮아진 경제성장을 핑계로 다시 선부론을 주장한다면 어떤 국민이 이에 동의하겠는가?


많은 국민들은 이제 복지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복지라고 만능이겠는가? 복지정책은 한정된 자원을 나누는 것이다. 결국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복지는 무용해진다.


하지만 선택적 복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국가의 분명한 책임이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는 또다른 많은 문제를 양산할 뿐이다. 결국 과도한 복지는 국가경제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선호와 이익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고 모두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다.


나는 1848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이익에 관한 말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나오고 소련이 붕괴하는 14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공산당이 세계의 절반을 뒤덮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엄청난 사상과 이념 대립이 지속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몇몇 이념의 충돌은 있지만 적어도 그 시절보다는 훨씬 나으니 하는 말이다.


물론 공산당이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벌어진 수많은 문제와 희생들을 알고있다. 대한민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동족상잔의 비극 전쟁을 치렀고, 현재까지도 분단되어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언젠가 반드시 일어난다. 그 확률이 미비하더라도 말이다. 조금 이기적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났기에 현재의 평화가 존재한다고 여긴다. 다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공산주의 덕일지 모른다. 민주주의가 아직까지 제기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라는 반대되는 사상, 이념과 경쟁하면서 성장했고, 또 그들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신용을 얻었다.


하지만 하나의 체제와 이념이 지속되면 또다시 무질서해질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큰 정부와 작은정부가 서로 계속해서 자리를 바꾸듯, 좌파정권과 우파정권이 계속 자리를 바꾸듯이 말이다.


나는 그래서 민주주의의 힘이 대단하다고 여긴다. 내가 어떤 사상을 지지하든 그 사상이 고이고 고이면 민주주의는 이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칠레의 피노체트를 물러나게 한 것도 민주주의의 힘이다. 이를 뒤집을 힘이 없다면 독재정권이고 북한처럼 스스로 자멸하는 지옥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없는 국가가 정상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루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앞으로 우리는 또 여러 차례 홍역을 겪게 될 것이다. 작은 정부가 들어서고 문제가 생기면 다시 큰 정부가 들어서고, 다시 문제가 생기면 우파정권이 그리고 다시 좌파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이념이라고 해서 욕하고 분하고 화낼 필요 없다. 스스로 자정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투자자라면 선호보다 이 시대에 무엇이 내게 이익이 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찾을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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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피에르 다르도 , 크리스티앙 라발 , 피에르 소베트르 , 오 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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