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적 삶의 권유 -마르코스 바스케스-
“인생에서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만사를 두 가지 범주로 나누고 구별하는 것이다.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과 내가 통제하고 내릴 수 있는 결정들이 그것이다.”
-에픽테토스-
통제의 이분법은 스토아학파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에픽테토스는 세상을 두가지로 구분했는데 하나는 통제할 수 있는 일이고 나머지는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느끼는 불행의 대다수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사실 그 마저도 온전히 전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갑작스레 찾아오는 병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예방하기위한 노력은 통제 가능한 부분이고 찾아오는 병은 통제 불가능한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타인의 마음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타인에게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면 슬퍼한다. 타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신경 쓰고 상처받는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소홀하다. 우리는 어쩌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삶을 스스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에너지와 노력을 쏟지 않고 통제할 수 없는 걸 걱정하면, 불안과 좌절만 생길 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케로의 궁수이야기를 교훈 삼을 수 있다. 키케로의 궁수가 화살로 목표물이 맞히기 위해서 활을 만들고, 화살을 만들고 활을 쏘는 연습을 한다. 이 준비과정은 통제 가능한 부분이다. 활을 쏠 때 줄의 강도와 화살이 가르키는 방향도 통제 가능하다. 하지만 일단 화살이 활을 떠난 시점부터는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화살이 과녁에 명중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 있다. 결과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결과에 집중한다. 결과에 모든 것을 건다. 물론 결과는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과정이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건이 벌어지길 기대하지 말고,있는 그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도록 하라.그러면 인생이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다. -에픽테토스-
스토아학파는 많은 걸 얻으려고 애썼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만족했다. 많은 걸 얻으려고 애썼다는 행동에 의의를 두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가끔은 수동적인 태도라고 오해 받기도 하지만 사실 결과에만 집착하고 과정을 등한시하는 것이 진짜 수동적인 태도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딱 하나뿐이다.당신의 손에 달리지 않은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에픽테토스-
운전을 할 때면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고속도로 진출로에서 미리 출구로 나가는 차선으로 달리는 차들과 진출로 입구에서 급하게 끼어드는 차가 있다는 것이다. 진출로 차선으로 미리 달리면 아무래도 많은 차들이 한 차선으로 달리게 되니 정체되기 쉽다. 정체를 피하고자 다른 차선으로 달리다가 진출로 입구 쪽에서 끼어드는 것이다.
얌체운전으로 불리는 끼어들기는 도로교통법 제22조와 23조에 명시된 불법적 행위다. 하지만 상시 정체구간이 아니라면 여전히 많은 차들이 진출로 끼어들기를 하고, 특별히 단속도 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런 성향의 차들을 보며 호기심을 느낀다. 평소에는 점잖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이가 어릴수록 자동차 보험회사는 더 비싼 보험금을 책정하는데 이는 통계적으로 나이가 어릴수록 사고 발생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유는 경험부족이나 부주의한 운전 습관 그리고 과속 때문이다.
내가 호기심을 느끼는 부분이 이런 점인데 운전성향과 투자자의 성향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운전은 도로라는 무대에서 교통법규라는 룰을 정해놓고 수많은 운전자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상호작용한다. 투자와 꽤 유사하다. 투자도 시장이라는 무대에서 수많은 투자자들이 규정내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거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투자자가 가지고 있는 많은 편향이 운전자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운전자가 상습적으로 진출로 입구에서 끼어드는 심리는 무엇일까?
우선 속도에 있다. 진출로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을 기다리기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가서 입구에서 끼어들면 남들보다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빨리 가기만을 위해서 끼어들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고속도로 진출로에서 상습적으로 끼어들기 하는 운전자가 만약 식당에 갔는데 줄이 길게 서있다면 그가 운전하던 습관처럼 새치기를 할까?
만약 그가 은행에 가서 번호표를 받았다. 대기 인원이 10명이라면 그는 기다릴까? 아니면 새치기를 할까? 병원에서는 어떨까? 많은 환자들을 제치고 먼저 진료를 받고자 할까?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식당 앞에서 길게 선 줄, 버스 정류장에서 줄 서있는 사람들, 은행, 영화관, 병원, 관공서 등등 줄을 서는 것이 익숙한 풍경인 곳에서는 새치기를 구경하기 어렵다. 하지만 운전을 한다면 이런 끼어들기는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도대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1965년 워싱턴 대학의 두 정신과 의사 캐롤라인 프레스턴과 스탠리 해리스는 시애틀 지역의 운전자를 대상을 연구를 진행했다. 그들은 마지막 운전에 대한 기술, 능력, 주의력을 운전자 스스로에게 평가하도록 했다. 이들 중 3분의 2는 평소와 같이 운전했다고 말했고 나머지는 아주 좋았다고 평가했다. 이상한 점은 이 연구에 참여했던 운전자들은 모두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였다는 사실이다.
인간 본성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실제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이슨 츠바이크-
두 교수는 운전경력이 아주 깨끗한 사람을 대상으로도 연구를 했고, 무려 참여자의 93% 이상이 자신의 운전 실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답했다.
인간의 과신편향은 진화론적으로 호모사피엔스가 먹이사슬 최상단에 위치하는데 도움을 줬다. 만약 인간들 모두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넓은 대륙으로의 이주도 없었을 것이고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지금처럼 발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평균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집단은 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밖에 없다.
하지만 투자와 운전에 있어서 과신편향은 여러 문제를 낳는다. 운전자의 과신은 자만심이고 자만심은 우월감에서 비롯된다. 식당에서는 줄을 잘 서는 사람도 운전대를 잡는 순간 줄을 서지 않는다. 이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운전실력으로 이어진다는 잘못된 사고에서 비롯된다.
목적지향적 심리가 빠른 속도를 운전 실력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식당에서는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해서 새치기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으면 그런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우월감은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우월한 운전실력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옆차선에서 빠르게 달려서 진출로 입구에서 끼어드는 행동은 운전실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끼어들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진출로 차선을 달리고 있는 차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들이 양보하기에 가능하다는 의미다.
끼어들기로 인한 사고율은 교통사고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고 유형중의 하나다. 즉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고 도로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전형적인 상황이 아니라 이례적인 상황이다. 상습적으로 끼어들기를 해도 사고가 나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많이 해봐서 괜찮아가 아니라 반대로 많이 하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더 높아진다. 대수의 법칙에 의하면 1년에 딱 한 끼어들기 하는 운전자보다 1년 내내 끼어들기 하는 운전자의 사고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운전자를 투자자로 바꿔서 대입해보자.
우리는 투자하면서 속도를 중시하지 않는가? 빠르게 얻는 큰 수익이 곧 투자실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렇게 빠르게 수익을 냈을 때 시장을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가?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 매번 그렇게 빠르게 큰 수익을 얻고자 하지는 않는가?
실제로 급등주를 먼저 사서 수익을 본다면 자신이 얻은 정보와 그것을 바탕으로 투자한 자신의 판단이 다른 투자자보다 우월했다고 여겼던 적이 있는가?
통제의 이분법은 투자에서 매우 중요하다. 통제할 수 있는 곳에만 에너지를 쓰고, 통제할 수 없는 곳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식투자를 거꾸로 한다. 오르는 것을 팔고, 내리는 것을 산다. 적게 벌게 크게 잃는다. 그리고 통제할 수 있는 과정은 대충 지나치고, 통제할 수 없는 결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하루 종일 주가 가격창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내리는 주식을 보고 화낸 적이 있는가? 폭락한 주식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적이 있는가? 나는 모두 경험해 봤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유는 그 과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과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나는) 주식을 선택하는 과정에 소홀하다. 대충 정보를 얻고, 검증하는데 큰 에너지가 소요되니 어림짐작으로 검증하고 정보를 믿어버린다. 대충 믿어버린 사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정보를 더 맹신한다. 정보가 틀릴 경우 나 자신마저 틀렸다는 감정이 생겨서 더욱 합리화한다. 이 모든 과정은 통제할 수 있는 과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홀했던 과정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결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스토아 학파의 학자인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자는 결과가 아니라 행동의 의도에 관심이 있다. 초기 행동은 우리가 통제하지만, 그 끝은 행운의 여신이 결정한다.”
투자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과정은 매수의 근거를 찾는 것이다. 근거 없는 매수는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원인이다.
근거가 명확했다면 그 투자는 수익을 얻지 못했어도 성공한 투자다. 결국 그런 결정들이 모여서 성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의 통제의 이분법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리고 투자와 같은 중요한 결정에서 이를 자주 무시하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거나 주식 매수 버튼을 누를 때, 우리는 얼마나 통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을까? 투자자라면 꼭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스토아적 삶의 권유
-마르코스 바스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