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삶으로의 회귀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집에서 출발 회사 도착하니 7시
이때부터 전투적인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7시 30분에 필자가 속한 부서의 현지인 매니저 5명과 30분에 걸쳐 회의를 했다. 그날 수행할 업무에 대해 지침을 주고 그날 어떤 예상 문제점이 무엇인지 같이 협의를 했다. 아침 회의가 끝나면 그때부터 전날 한국에서 온 메일을 보고 답변 메일을 보냈다.
평균 하루에 받아보는 메일은 약 200여 개. 이 메일에 일일이 답변을 하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았다. 그래서 받아본 메일에 답변을 위한 우선순위를 정했다. 우선순위는 당연히 내가 속한 조직의 최 상위 관리자가 보낸 메일에 최우선적으로 회신을 했다. 그래야 그날 하루가 보다 순조롭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조직 생활을 어느 정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자의 마음을 이해하리라 본다. 일례로 어떤 상사는 아침 8시에 한국에서 메일로 업무 지시를 하고 그날 오전 중으로 답변을 요구하는 분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때 론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산모가 아기를 낳기 위해 열 달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급해도 이 기간 동안은 참아야 한다. 그 기간을 참지 못하고 아기가 보고 싶다고 7개월, 8개월째 빨리 애기가 나오도록 재촉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러나 때론 이런 논리가 회사에선 통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히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고 그 기간이 지나야 나올 수 있는 결과를, 참지 못하고 열 달이 지나야 나오는 아기를 8개월 되는 달에 만들어 내어라고 재촉했다.
그러다 보니 설익은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서 보고되는 자료는 역시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 보고서가 이 한건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여러 보고서가 이런 식으로 하루에 만들어져야 하기에 보고서 작성에 하루 온종일 매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그 보고서만 만드는데 시간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왜냐 하면 보고서 만드는 일 외에 한국 여러 부서에서 요청하는 메일에 일일이 답변도 해야 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면 한국 사람이 1시간 이내 완료할 수 있는 일을 현지인들은 3시간, 4 간이 지나도 자료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보니 필자가 직접 만들어 대응을 하다 보니 좀 과장해서 얘기하면 정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샛별 보고 출근해서 달이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시간에 퇴근하는 날이 거의 5년간 이어졌다.
이상은 필자가 인도네시아 주재원 시절 겪었던 이야기다.
참 바쁘게 살아왔다. 돌이켜 보면 어떻게 이런 어렵고 바쁘고 힘든 시절을 무사히 극복했는지 참 신기할 정도이다. 필자의 어떤 동료는 업무적으로 업체 담당자와 한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를 하다가 수화기를 잡은 오른쪽 팔이 펴지지 않아 바로 그 길로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서야 팔이 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시절을 20여 년 겪어 오다 보니 모든 일상사가 매사 빨리 행해져야 했다. 이런 회사에서의 생활이 가정에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었다.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할 때도 조금이라도 늦어진다고 생각되면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하고 밥을 먹을 때도 건강을 위해 천천히 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빨리빨리 먹어야 했다. 심지어 아내와 아이들이 모처럼 쇼핑을 할 때도 여유 있게 옷을 고르고 싶은 마음도 이해 못 하고 빨리빨리 고르고 가자고 재촉하곤 했다.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왔을까?
남보다 좀 더 빨리 승진을 하고, 남보다 좀 더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왔다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제 회사 생활 30년이라는 고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시점에서 큰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건강에 대한 적신호였다. 그동안 앞서 살아갔던 회사 선배들이 왜 승진, 출세가 건강한 삶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종종 읊조리는 말이 이제 서야 피부로 와닿았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기 위해 S R T 열차를 타고 가면 거의 2시간 만에 갈 수 있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치들이 순식간에 지나가기에 바깥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반면 무궁화 열차를 타고 가면 지겹도록 천천히 가지만 바깥으로 보이는 경치들을 천천히 음미도 하고 마음의 여유도 가질 수 있다.
30년간 SRT를 타고 온 것처럼 열심히 빨리 달려왔다. 이제는 무궁화를 타면서 천천히 바깥 경치도 구경하면서 좀 더 여유 있는 삶을 살아 보는 것이 인생 후반부의 목표다.
빠른 삶도 좋지만 느린 삶으로의 복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 같기도 하다. 그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