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부장 과 부 사장
94년 6월.
국내 전자회사에 입사했다. 나이키 회사의 슬로건인 Just Do it이란 단어가 갑자기 생각났다. 1990년대 시절에는 대부분의 기업체 채용기준은 동일한 회사에 두 번 지원하면 당연히 불합격 처리된다 라는 묵시적 룰이 있었다. 주변 친구들 얘기도 한번 지원에서 탈락한 회사에 또 지원 시 당연히 불합격한다라고 하면서 굳이 돈 낭비, 시간 낭비하는 일로 고민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그래도 오기가 생겼다. 왜 내가 떨어져야 하나 합격한 사람들의 면면을 봤을 때 나보다 특별히 뛰어나 보이지도 않았다.
오기가 발동해서 일단 다시 해보자(Just Do It)라고 결심하고 입사원서를 동일한 회사에 다시 제출했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성격이라 일단 저질렀다. 몇 주 뒤 ‘합격을 축하한다’는 우편물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합격 소식에 한편으로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어떻게 합격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에 아직도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해 남들이 망설일 때 일단 해보자 라는 그런 성향이 이때 이미 굳어졌던 것 같다.
같은 해 입사 동기가 있었다. 당시엔 같은 해 입사하고 입사 월이 비록 다르더라도 같은 날에 같이 그룹 연수를 받았다. 그중 필자와 입사일이 똑같은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그 동기는 입사 때부터 조금 남달랐다. 연수 프로그램 중 토론과 발표 시간엔 항상 먼저 발표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늘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당시 아직도 필자 머리에 맴돌고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연수 기간 중 나의 포부를 말할 때 보통의 경우 열심히 노력하여 임원의 자리까지 가 보겠다 라 고 다소 두리뭉실하게 발표하는데 반해 이 동기는 이 회사에서 꼭 사장까지 가보겠다 라 고 자신감 있게 얘기했다. 그렇게 연수가 끝나고 본인이 원한 부서 혹은 회사가 지정해 준 부서로 각자 배치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흘러 2019년 12월.
입사동기들이 많다 보니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업무를 하면서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깜짝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했다. 필자와 한 날 한시에 입사한 동기가 부사장으로 진급했다는 기사였다. TV에서도 보도는 되었지만 처음엔 긴가 민가 했다. 바로 그 동기였다. 동기가 부사장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편으론 축하의 박수를 보냈지만 한편으론 살짝 자괴감도 들었다. 동기는 승승장구 벌써 부사장의 위치에 올라간 반면 필자는 아직도 만년 부장이었다. 대기업 부사장이라는 자리는 그 기업의 창업자의 후손이거나 상위 1%의 능력을 직장인이나 감히 가능한 위치의 자리였다.
그럼 같은 해 입사했지만 30여 년 지난 시점에서 왜 이렇게 차이가 났을까 하는 고민을 해 보았다. 여기에 대한 명백한 답을 찾으면 직장을 준비하거나 이미 직장을 다니는 이들에겐 희소식이 되겠지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에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나름 두 가지 관점에서 추측해 본다.
첫째는 환경이다. 맹모삼천지교 하는 말이 있다. 맹자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 중의 한 인물로 꼽힌다. 이런 맹자도 어린 시절 처한 환경으로 맹자의 미래를 걱정한 맹자 어머니가 교육적으로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어떤 사람이 성장과 성공을 위해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름하는 좋은 예이다. 이런 관점에서 동기는 승진을 하기에 좋은 환경을 접했다. 기업에선 승진을 위해 그 승진을 결정할 수 있는 결재권자와 자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부서가 영업과 기획팀이다. 물론 그 부서에서 근무한다고 무조건 승진이 빠르고 높은 위치까지 갈 수는 없다.
둘째 능력이다. 능력이란 단어의 의미를 좀 더 깊게 들여 다 보면 지식 측면에서 봤을 때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대학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SKY 출신들이 일반 대보다 학문적으로 더 능력이 있다 라 고 본다. 그러나 능력에서 지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100을 기준으로 봤을 때 아마 20 정도 수준으로 미비하다 라는 필자 생각이다. 왜냐 하면 능력의 또 다른 부분으로 지혜라는 것이 있다. 지식이 단순히 학문적인 영역인데 비해 지혜는 실제로 삶을 살아오면서 몸으로 직접 체득한 살아 있는 지식이다. 이 지혜가 결국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더 확실한 도구인 것이다.
회사에서 어떤 위기의 순간에 지혜로운 사람이 더 옳은 판단을 하게 되고 그 옳은 판단이 회사를 발전시키고 그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 결국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게 된다. 동기는 이런 관점에서 지식보다 지혜가 더 많았다.
부사장.
일반 회사원이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쥘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자리다. 그러나 누구나 갈 수 있는 자리는 결코 아니다. 선망의 대상은 되지만 상위 1%만이 도달할 수 있는 자리이기에 이 자리에 너무 연연하면서 직장을 다닐 필요는 없다고 본다. 30여 년 다녀 보니 부사장이란 자리도 좋지만 평범한 보통의 회사원이 어느 정도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부장의 자리도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온갖 노력으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시간에 가족과 더 오붓한 시간 그리고 내 건강과 취미를 위한 활동에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30여 년 직장 생활해본 필자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