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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마끼끼 Sep 27. 2024

두번째 빚

그렇게...또 보내다.

  이마에 땀이 맺혀있다. 이내 향기가 느껴지나 싶더니 그 향기가 내 땀방울들을 모아간다. 땀방울들이 하나씩 향기 속으로 사라진다. 잠시 그 향기를 느낀다. 보랏빛의 향기! 싱그럽기 그지없는 오후. 자유롭고 환희에 가득 찬 시간. 평온한 안식만이 그윽한 이 자리에 내가 있구나.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온다. “Yesterday Once More” 내 옆에 앉은 그녀는 작은 손수건을 들고 있다. 그녀의 입도 가느다랗게 떨린다.


  “뭘 흥얼거리냐?”

  제대날짜를 며칠 앞둔 나병장이 내 옆에 와 앉는다.

  “날씨가 참 좋구나.”

  “…..”

  멀리 능선을 바라보았다. 침묵의 시간들. 얼마나 흘렀을까?

  “나도… 나도 그 녀석을 좋아했었다.”

  그의 눈에 내 시선을 끌어당긴다. 곧 그가 시선을 떨군다.

  “나도 안다.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하지만 난… 난..”

  다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의 눈동자를 본다.

  “내가 남을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나의 안에선 항상 누가 날 좀 말려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나는 몸을 죄여오는 거북함에 그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날 죽여서라도 더 이상 나 자신이 괴롭지 않게 하기 위해…”

   “…..”

   “하지만 아무도 날 말리진 못했다. 말리다가도 이내 날 포기했지. 그리고… 난 점점 더 내가 만든 나의 악의

   구렁텅이 속에서 날 만족시키기 위해선 주먹을 휘두르고 닥치는 대로 무언가를 뺏어야만 날 채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거든”


  나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무얼 말하려고 하는 거냐?

  “하지만 내 안에서 항상 소리쳤어. 누가 날 좀 말려달라고. 아니 죽여달라고…”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훗”

  난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난 그에게 무얼 기대하고 있는가?

  “녀석… 근식이가 날 말릴 수 있었던 유일한 놈이지. 다만 녀석이 날 죽이지 못해 내가 녀석을 죽인 거고…”

  “…..”

  “내가 이 더러운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아나?”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시선을 곧장 바라봤다. 분노에 몸이 전율했다.

  “바로 그때 죽었어야 하는 게 나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어섰다. 그리곤 비틀비틀 그의 후회스러운 삶의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떨리는 나의 몸은 그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부대에선 며칠 전부터 공사가 한창이었다. 난 막사뒤에서 배수로 정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가을이라곤 느낄 수 없는 많은 비가 쫘악 퍼부어댔다. 배수로를 파면 그새 빗물에 떠내려온 흙이 그걸 다시 채울 정도였으니까…

  “안 되겠다. 어이! 대충 하고 들어 가자고.”

  “여긴 조금만 손 좀 더 보겠습니다. 자꾸 흙이 떠내려와서…”

  “그렇다고 자꾸 거기 파면 위험해. 뒤에가 산이라 무너질 위험이 있으니까 적당히 해 두라고.”

  “예… 먼저 들어가십시오. 곧 가겠습니다.”

  아무리 해도 떠내려오는 흙 때문에 여태껏 해왔던 작업이 도루묵이 될 상황이었다.

  “제기랄!”

  어쩔 수 없었다. 난 배수로를 좀 더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삽으로 산허리를 파내기 시작했다. 비가 더 거세어진다. 빨리 끝내고 들어가야지…

  ‘우지끈!’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다. 놀라 고개를 들자마자 난 흙속에 파묻혔다. 축대가 무너진 것이다. 산사태다. 다행히 주위엔 아무도 없었지만 그것은 날 살려줄 사람도 없음을 의미했다. 숨이 막힌다. 예전에 이런 적이 있었지. 그때도 난 침전해 갔었다. 누가 나의 팔을 당긴다. 얼핏 근식이가 보인다.


 눈을 떴을 때 곧 병원임을 직감했다. 난 또 살았구나. 하지만 어떻게…

 “뭐 아무런 이상은 없는 것 같으니까 걱정은 하지 마시죠.”

 대대장이다. 곧 내게 시선을 돌린다.

 “다행이군. 이제 나병장에게 가볼 텐가.”

 약간은 원망 섞인 목소리라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를 구하고 중태에 빠진 나광수 병장 말이네.”

  “예?”

  내가 흙속에 파묻혀 들어갈 때 그 소리에 놀란 부대원들이 뛰쳐나와 있었단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달려 나갔고 아직도 흙이 쏟아지고 있는 그곳에서 날 끄집어냈다고 한다. 그러곤 마치 그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흙더미에 파묻혔다.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산사태가 멈추자 부대원들이 동원되어 녀석을 구해냈고 이미 녀석은 굴러 떨어져 내린 바위에 위해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한다. 하지만 왜 하필 녀석이었나?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병장님”

  어떻게 목구멍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들리리가 없겠다. 녀석은 자고 있으니까. 산소마스크를 하고 누워있는 게 옛날의 모습일랑은 전혀 기억나게 하지 않는다. 돌아섰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녀석이 팔을 휘두른다. 산소마스크를 떼내라고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녀석이 더 급해진다. 무엇에 홀린 듯 난 그에게서 산소마스크를 떼냈다. 그가 웅얼웅얼거린다.

  “마.. 말은 하고 죽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남은 생명을 붙들고 있다. 마치 그 자신이 원하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양 자신의 죽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에겐… 꼭 들려줄…”

  측은하다. 내가 녀석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을 알았던가? 내 생명의 은인이긴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근식이는… 내 형이다.”

  잘못 들었다. 분명 잘못 들은 것이다. 그의 가슴을 잡는다. 그리곤 흔들었다.

  “난 녀석과 배다른… 형제다.”

  잡았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이내 잡았던 두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누이도 이…있었…”

  그래 빨간 입술을 가진 누이! 정말로 네가 근식이와 형제로구나!

  “후횐없다. 이제야 근식이에게 가니까.. 좀 늦었…”

  말이 없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흐른다. 나도 찜찜한 맛을 느낀다. 눈이 뜨거웠다. 그는 지금 근식이를 만나고 있다. 포옹이라도 하는지 미소를 짓는다. 눈을 감는다. 녀석은 이제 그 지배력을 쓰려고 하는가 보다. 미소 띤 녀석의 얼굴이 꽤 잘 어울린다고 느껴진다.


  ‘미안해. 날 살린 너에게 아직도 고맙단 말 한마디 못했어’


  난 내 생명을 대가로 그들에게 또다시 빚을 지도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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