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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마끼끼 Sep 20. 2024

바보

그렇게...지내오다.

  이듬해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처음 생활은 정말 고통스러웠던 걸로 기억된다. 시골 촌뜨기라 놀리는 녀석들과 싸운 적도 허다했고, 그들의 기를 꺾고자 악물고 했던 공부도 중간을 넘어서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점은 그들보다 약삭빠르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일 년이 체 지나가기도 전에 난 그들과 동화될 수 있었고, 예전에 내 모습들을 서서히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 처절했던 기억마저도…


  앗! 놀라는 내 눈앞에 그녀의 젖은 손이 보인다. 내 얼굴에 송송히 맺힌 물방울. 작은 구슬이 되어 내 노폐물들은 땅끝으로 떨어뜨린다. 이제 그녀의 젖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살며시 미소가 스치더니 이내 자신의 스웨터에 손을 스윽 닦는다. 붉은 스웨터의 물기 묻은 부분이 알록달록하다. 더 이상 서로 말이 없다. 내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느낀다. 여전히 기차는 덜컹거리는구나. 그 중간중간에 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인가? 난 무얼 생각하고 있는가? 어느덧 나는 깊숙이 턱을 괴고 있구나.


  나는 턱을 괴곤 공부를 했다. 공부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유일한 유희였다. 턱을 괴곤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공부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밀려오던 환희의 감정은 아직도 찌릿찌릿하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짧은 순간동안 세상이 변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대부분은 절망적인 상황으로의 변화를… 이런 연유로 고개 들기가 두려워 더 공부를 오래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약간은 지루했던 고교시절을 보내고 난 대학에 갔다. 처음 대학에서 맛본건 목표부제에 따른 상실감이었던 것 같다. 술과 담배… 더 이상 나에겐 환희가 없다. 웃는 모습뒤엔 항상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는 나의 모습이 있었다.

  “이것 좀 가르쳐 주실래요?”

  “아, 예. 그러니까…”

  그녀와는 참 많이도 걸었었다. 여자는 항상 기쁘게 얘기를 하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끔씩 끄덕이며 걸었다. 어느덧 그녀의 집 앞에 오면 언제나처럼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는 길엔 항상 여운이 남는 그녀의 입술을 느끼곤 했다. 삶의 한순간! 유일한 나의 환희였고 기쁨이었던 순간이다. 그러던 그녀의 입술이 언제부터인가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입술은 붉은빛이 아니다. 그래 난 그녀의 입술이 한 번도 붉어보였던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우리…이제 그만 만나자.”

  돌아섰다. 그녀가 울었는지 어땠는지는 지금은 기억이 전혀 없다. 안타까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되뇌이던 말이 있었다.

  “난 즐거워해서는 안된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난 또 어색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다. 내 모습은 참 바보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보의 곁에서 함께 웃고 있는 그녀를 딴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웃음이 멎는다. 다시 창밖을 본다. 전주와 전주사이가 얼마만큼이나 될까? 그 사이를 지날 때마다 뛰는 내 심장의 고동은… 항상 이런 생각들이 난다. 지금 보는 이 풍경이, 이 상황들이 언제인가 한 번쯤은 꼭 겪어봤던 것 같다고. 그네도 나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프로이트란 친구의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우리가 꿈을 꾸고 난 직후 그 꿈의 내용이 겪어본 것 같기도 하고, 전에 또 꾼 것 같기도 한 것은 실제로 우리가 무한히 깊은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수면 중에 우리의  모든 신체운동이 정지한 지극히 고요한 상태하에 그것이 고개를 쳐든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그래 그렇다면 난 지금 지극히 평온한 상태에서 싱그런 꿈을 꾸고 있구나. 맞아. 우린 틀림없이 예전에 이런 여행을 갔을게다. 그때도 난 지나가는 전신주의 간격마다 뛰는 내 심장을 느끼고 있었을게다. 언젠가 먼 훗날에 지금의 모습을 기억하려 하겠지. 그녀와 난 전생에서도 만났나 보다. 그녀의 환한 웃음소리와 함께 난 다시 바보 같은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바보같이 웃지 말고…”

  내 웃음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꽤 추위가 매서웠다. 부모님은 여러 가지 당부를 하셨다. 난 또 어색하게 씨익 웃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뒤로 한채 터덜터덜 걸어갔다.

  “자. 여러분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첫날밤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고 거기에 속해 있는 난 마치 태양의 인력에 의해 그 주위를 맴도는 행성 같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날은 단 하루뿐이었다. 곧 바깥생활 속에서의 난 없어졌다. 이젠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집에서보다 더 깊은 잠 속에 빠져들 수 있었다.


  즐거움이 없는 생활… 아마도 내가 바라던 것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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